38화
“오늘 하루 종일 사교계가 떠들썩했습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문 때문에요. 공작님도 알고 계셨을 테죠?”
“지금 레이디 캐서린께선 제가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로이슈덴 공작님을 뵙기 위해서 온 것 아니냐고 묻는 건가요?”
“…….”
캐서린은 대답 대신 어깰 으쓱했다. 변명할 테면 해 보라는 듯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같은 레이디로서 부끄럽네요. 록그버그 공작가의 명예와 평판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고 이곳에 오시다니.”
로엔은 캐서린의 경멸 어린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감사하군요, 레이디 캐서린. 제 가문의 평판을 신경 써 주시기까지 하고. 하지만 앞으론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저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들이 벌어지니, 신문을 볼 수가 없더군요.”
그레이트 모먼트에 낸 공개 청혼에 대한 언급이었다.
“신문에 낸 공개 청혼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군요. 가끔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에 귀족들이며, 레이디들이 종종 공개 연서를 싣는 것과 같은 맥락일 뿐인데요.”
“어떻게 공개 연서와 공개 청혼이 같은 맥락이란 건지 모르겠군요.”
“왜 다르다고 생각하시죠? 오히려 연서의 이름을 이니셜로 표기해, 불륜을 교묘히 연정으로 탈바꿈하는 게 더 나쁜 것 아닌가요? 저는 부도덕하게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한마디로 저나 로이슈덴 공작 역시 미혼의 귀족이니,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로이슈덴 공작님은 록스버그 공작님의 관심과 애정을 원치 않으시죠. 어쩌면 끔찍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요.”
캐서린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떨었다. 마치 검은 베일에 감춰진 로엔의 흉터를 본 것처럼.
“불운을 몰고 다니는 괴물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군요.”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 모습으로 로이슈덴 공작님을 만날 생각을 하시다니.”
채찍 같은 질책이 쏟아졌다. 멸시와 경멸을 담은 시선 역시도.
그러나 로엔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럼 레이디 캐서린은 자격이 있는 모양이군요.”
“저야 당연히…….”
캐서린은 성급하게 뱉어 내던 뒷말을 삼켰다.
레이디들 앞에서 제 속내를 드러내는 게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만약 공작님께서 절 선택하신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용의는 있답니다.”
“자신 있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랑케의 페이라스모스가 이미 공작님의 마음을 차지했다고 하던데. 이번엔 고급 창부가 레이디 캐서린의 라이벌이 되겠어요.”
“헙!”
“풋!”
여기저기서 돼지 염통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캐서린은 고갤 숙이곤 웃음을 삼키는 레이디들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무례하시군요. 정확하지 않는 소문으로 로이슈덴 공작님을 모욕하시다니.”
“그 소문들이 진짜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소문들이라니? 그게 무슨…….”
“별 뜻 없이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레이디 캐서린. 아, 그리고 제가 반은 틀리다고 했는데, 왜 틀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군요.”
로엔이 손을 들어 검은 베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당장 멈춰요.”
캐서린이 당황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로엔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검은 베일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얼굴의 반을 가면으로 가린 로엔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 말도 안 돼.”
“헙! 저게 괴물 공작의 얼굴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레이디들의 목소리에 찬탄이 섞여 들었다.
아름다웠다.
비록 얼굴의 반은 상처를 숨기려는 듯 가죽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드러난 나머지 반쪽은 인간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상처가 때문에 얼굴을 가려야 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무엇보다 레이디들은 록스버그 공작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는 충격에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저도 동참해 볼 생각입니다. 비록 반쪽뿐인 얼굴이지만, 최선을 다해 로이슈덴 공작님을 유혹해 볼 생각이거든요.”
로엔의 아름다운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갔다.
투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은은한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캐서린 역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대장, 폐하께서 보내셨더군요.”
“네? 초대장이라니.”
캐서린 대신 옆에 서 있던 제인이 정신을 차린 듯 되물었다.
“캠벨 후작가의 파티 초대장이요. 저는 폐하께서 직접 보내셨더군요. 파티에 꼭 참석하라는 친필 서신과 함께.”
로엔이 뒤로 넘겼던 검은 베일을 다시 썼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둡고 음습한 록스버그 공작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또 뵙죠, 레이디 캐서린. 전 폐하의 명대로 파티에 참석해야 할 것 같아서.”
로엔은 다시 한 번 황제인 에드윈을 언급한 뒤, 파우더 룸을 나갔다.
“말도 안 돼. 보셨어요? 그 아름다운 얼굴을?”
“세상에, 저런 얼굴이셨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흉터만 아니었다면 아드리안, 아니 타란 대륙 최고의…….”
“레이디 에밀리, 그 입 좀 다물어 주시겠어요? 시끄럽군요.”
캐서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순간 레이디들이 캐서린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얼굴엔 묘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이디 캐서린께서도 얼른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제 말은 로이슈덴 공작님을 빨리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레이디 제인은 지금 내가 저 반쪽짜리 괴물 공작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고급 창부 따위에게 밀린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또 언제 파티에 참석할지 모르니 얼굴 도장을 미리미리 찍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캐서린은 닫힌 문을 쏘아보았다. 아직도 밀려드는 모멸감과 함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불운을 몰고 다니는 괴물 공작 주제에, 감히.
하아,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제 입으로 레이디 그리젤라를 인정해야 했던 순간은 치욕 그 자체였다.
록스버그 공작의 콧대를 단번에 꺾을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을 손에 넣는 것.’
더 나아가 록스버그 공작을 포함해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로이슈덴 공작이 저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 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폐하께서 초대장을 직접 보내셨다는 뜻은 뭘까요?”
에밀리의 말에 캐서린의 싸늘하게 말했다.
“뭐긴 뭐겠어요? 로이슈덴 공작님을 보기 위해 왔다고 말하기 껄끄러워 거짓말을 했을 텐데.”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레이디 에밀리, 정말 순진하네요. 직접 보셨나요? 공작님이 언급했던 폐하의 친필 서신을요.”
“그건 아니지만…….”
“그러니 거짓말이란 거예요. 친필 서신을 요구해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무엇보다 로엔 록스버그는 레이디였지만, 공작 신분이었다.
꼼짝 없이 모욕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캐서린은 제인에게 고갤 돌렸다.
“레이디 제인? 지난번에 말했던 그 묘약이요.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에서 판다고 했던 가요?”
“아, 네.”
“효과는 있고요?”
“그건 걱정 마세요, 레이디 캐서린. 그리고 소문일 뿐이지만 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 님이 마법사의 후손이란 소문이 있거든요.”
“방문해 보고 싶네요.”
“그럼 이번 주 티타임에 참석해 보시겠어요?”
“티타임?”
“매주 수요일 4시에 티타임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좋아요. 함께 참석하도록 해요.”
캐서린이 고갤 끄덕이곤 벽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을 점검했다.
그리곤 파우더 룸을 나오기 전, 방 안에 남아 있는 레이디들을 응시했다.
“오늘 일은 함구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새어 나가 봐야 좋을 것 없을 테니까요.”
“네, 레이디 캐서린.”
확답을 받고서야 캐서린은 제인과 함께 파우더 룸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삼켜지지 않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용서할 수 없어. 몇 배로 되갚아 줄 거야.’
캐서린의 분노의 화살은 어느새 로엔 록스버그 공작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버지인 캔싱턴 백작의 서재에서 록스버그 공작가에 관한 서류를 본 게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지? 독에 대해 말했던 것 같은데.’
관심이 없어서 지나쳤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성질을 죽였어나 했나?’
협박이 아니라, 계획대로 동정심을 유발했어야 했다.
거기다 얼굴까지 드러내다니.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충동적이었다.
놀라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들이 비웃는 괴물 공작이 무시당할 존재가 아니란 걸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비록 반쪽뿐이긴 했지만.
“괜한 짓을 했어.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텐데.”
실례로 로엔이 검은 베일을 걷고 흠결 하나 없는 반쪽짜리 얼굴을 들어냈을 때, 파우더 룸의 레이디들은 물론 캐서린이 숨을 삼키며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 모습에 묘한 만족감이 들었지만, 잠시뿐이었다.
잠깐의 희열 때문에 얼굴을 드러내는 행위가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냉정함을 잃다니. 나답지 않은 일이었어.”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일까? 갑자기 이성을 잃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이유가.
지금껏 귀족들의 멸시를 견디는 것도, 이유 없는 경멸을 받는 것에도 둔감했다.
그들이 뱉어 내는 추악한 감정들은 그녀에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아니, 상처를 입을 만큼 그들이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데 마치 여인으로서 자존심이라도 상한 듯 행동했다.
숨겨 왔던 아름다운 반쪽짜리 얼굴을 드러내며 캐서린을 충동질했다.
로이슈덴 공작을 열심히 유혹해 볼 생각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 미친. 설마 진 로이슈덴 공작 때문인 건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로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이가 없었다. 남자 때문에 이성을 잃고, 위험을 자초하다니.
로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로엔은 그레이트 홀 앞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악사의 연주와 들뜬 듯 들려오는 귀족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화려한 불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저 안에 그가 있다.
검은 제복을 입고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날 사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