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공작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절대 그런 불온한 의도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레이디 제인에겐 그런 의도는 없으셨을 테지요. 하지만 소문이란 돌고 도는 과정에서 그 의도가 불순해질 수 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소문에 둔한 제 귀에까지 들어온 걸 보면, 얼마만큼 추악하게 변했을지는…….”
“아니요. 아닙니다. 맹세컨대, 오늘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
거짓말이다.
“그러니 이곳에 계시는 분들만 들은 겁니다.”
제인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럼 오늘 처음으로 말했다는 이 소문을 만든 주체가 레이디 제인이란 뜻이겠군요.”
“네? 어어, 그게…….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저 역시 들어서…….”
당혹감에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누구에게 들었죠, 레이디 제인?”
덫에 걸린 초식동물처럼 제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그제야 제가 또다시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어리석긴!’
그리곤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캐서린을 돌아본다.
‘소문의 시작이 레이디 캐서린인 건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다.
사교계의 레이디 중 그리젤라 캠벨에게 적개심을 가질 만한 인물은 라이벌 관계인 캐서린 캔싱턴뿐일 테니까.
“레이디 캐서린?”
캐서린을 부르는 제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왜 저를 부르는지 모르겠군요, 레이디 제인.”
정색을 하며 선을 긋는 캐서린의 태도에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캐서린의 서슬에 억울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뭐, 제 잘못을 덮어씌우는 모양새네.’
로엔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따지고 보면 캐서린 캔싱턴은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다.
레이디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고, 남성들에겐 추종받는 존재였다.
사교계란 역학관계에서 제인은 캐서린에게 약자였다.
‘들러리나 벽의 꽃들 중 하나일 뿐인 테지.’
그러니 아무리 억울해도 이 자리에서 사실을 폭로할 수 없을 터다.
“록스버그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하신 것 같아서요.”
제인을 쏘아보던 캐서린이 뻔뻔할 정도로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오해를 했다면 풀어야겠죠. 그러니 말씀해 보세요, 레이디 캐서린.”
“저희가 경솔했던 점은 인정합니다. 아무리 소문이라도 폐하와 폐하의 약혼녀 되시는 레이디 그리젤라에 대해 언급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캐서린이 말끝을 흐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지었다. 정말 정말 유감이라는 듯이.
‘배우는 여기에 있었네. 당장 오페라 무대에 서도 될 수준이야.’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니 다행이군요.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구체적으로 뭐죠, 레이디 캐서린?”
여전히 서늘한 목소리로 묻는 로엔을 보며, 캐서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멸시의 대상이었던 괴물 공작에게 고갤 숙여야 하는 상황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입매 역시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저희의 실수를 한 번만 눈감아 주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저흰 한 번도 폐하의 선택을 의심해 본 적이 없거든요.”
캐서린이 동의를 구하듯 레이디들을 쭉 둘러보았다.
“네, 맞아요.”
“공작님,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는 걸 믿어 주세요.”
물꼬가 트인 듯 레이디들의 변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흐음. 폐하의 선택을 의심해 본 적 없다고 하시니, 한 가지 묻고 싶어지는군요.”
“뭐든 물으셔도 됩니다.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거든요.”
턱을 치켜든 캐서린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제가 알기로 폐하의 신붓감 후보가 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레이디 그리젤라와 캐서린 맞나요?”
“후보는 많았지만, 폐하께서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상대가 둘이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게 맞군요. 그럼 물을게요. 레이디 캐서린은 폐하의 선택을 의심한 적 없다고 하셨죠?”
“네, 맞아요.”
거듭되는 질문에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지 캐서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레이디 캐서린은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레이디로 그리젤라를 인정하신다는 건가요?”
순간 캐서린이 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그리곤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올린 눈으로 로엔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야 로엔의 의도를 깨달은 모양이다.
“제가 왜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폐하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상관이 없다니. 제 생각은 다르답니다, 레이디 캐서린. 이 소문의 근본적인 이유는 레이디 캐서린에게 있다고 보거든요. 그러니 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사람도 레이디 캐서린일 테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록스버그 공작님?”
캐서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로엔을 쏘아보았다.
“쉽게 말해, 소문의 당사자가 인정하면 끝날 소문이란 뜻입니다. 레이디 캐서린이 스스로 인정하는 거죠. 레이디 그리젤라가 자신보다 폐하와 어울리는 레이디란 사실을요.”
로엔은 분노에 떨며 캐서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까지 제 계략과 함정에 빠져 비참하게 우는 레이디들만 봤지, 제가 당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터다.
사실 로엔 역시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캐서린 캔싱턴에게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사교계란 원래 약점을 드러냈을 때 공격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추악한 곳일 뿐이었다.
‘과연 저 자존심 강한 레이디가 인정할까?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 라이벌인 그리젤라가 황제에게 걸맞은 존재라는 걸.’
보다 못한 제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캐서린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그러자 캐서린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쳐 냈다.
“아앗!”
얼마나 매몰차게 쳤는지, 캐서린의 손에 낀 반지에 쓸려 손등이 붉어질 정도였다.
한순간,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캐서린 역시 제 행동이 과했다는 걸 깨달은 듯 어깨를 움찔했다.
“치료를 해야겠군요, 레이디 제인.”
“아닙니다. 별것 아니니…….”
제인이 재빨리 손등을 뒤로 감췄다. 문제 삼지 않을 모양이다.
“뭐, 그렇다면야.”
대신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연고입니다. 상처에 바르면 효과가 좋답니다.”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병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잘 쓰겠습니다, 록스버그 공작님.”
로엔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깰 으쓱해 보이곤, 다시 캐서린을 향해 말했다.
“이제 대답해 주시겠어요, 레이디 캐서린? 만약 여기서 더 시간을 끈다면, 레이디 캐서린의 저의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로엔이 대답을 재촉했다.
“…….”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문 캐서린을 제인이 초조한 얼굴로 다가섰다.
“레이디 캐서린, 어서요.”
제인뿐만이 아니었다. 파우더 룸에 있는 레이디들의 시선이 모두 캐서린에게 향해 있었다.
“뭐 하세요, 레이디 캐서린. 공작님께서 대답을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잔뜩 겁을 먹은 에밀리가 로엔의 눈치를 보며 다그쳤다.
이내 캐서린의 표독한 눈빛이 에밀리에게 닿았고, 그 서슬에 흠칫 어깰 떨며 고갤 숙이는 게 보였다.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거짓인 모양이군요. 그럼 전 폐하께…….”
“……인정합니다. 레이디 그리젤라만이 폐하와 어울리는 상대입니다. 제가 아니라…….”
마지막 말은 입 속으로 삼켜지듯 흐릿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이로써 다 해결되었군요. 이 순간 이후 오늘 일에 대해 폐하께 언급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제야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긴장감이 사라지며,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럼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도 공작님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거든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멸감에 떨던 캐서린이 로엔의 팔을 붙잡았다.
“엇! 재수 없…….”
낮게 새어 나오는 경멸에 찬 목소리에 로엔이 캐서린을 응시했다.
“죄송해요, 공작님. 저도 모르게.”
말과는 달리 하나도 미안한 눈치기 아니었다.
오히려 로엔의 팔을 붙잡았던 제 손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닦아 내기까지 했다.
로엔은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정말 경탄할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캐서린은 배우를 했어야 했어. 오페라 역사상 길이 남는 프리마돈나가 되었을 텐데.’
그 재능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말씀하세요, 레이디 캐서린. 제게 묻고 싶은 말이 뭐죠?”
“그렇지 않아도 다들 궁금해했거든요. 파티라면 폐하의 탄신 축하 무도회와 건국기념일 파티에만 참석하시는 록스버그 공작님께서 갑자기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나타나셔서요.”
“초대장을 받아서요.”
“그러셨겠죠. 캠벨 후작가의 파티엔 초대장 없인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의심스럽잖아요.”
“뭐가 그렇게 의심스럽다는 거죠, 레이디 캐서린?”
속이 뻔히 읽혔다. 캐서린이 지금 뭘 하려는 것인지.
아마 조금 전 모욕을 당한 복수를 하려는 듯하다.
저와 로이슈덴 공작과의 스캔들을 이용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