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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36화 (37/201)

36화

“그 소식 들으셨어요? 조금 전에 로이슈덴 공작님이 도착하셨대요.”

경박하게 파우더 룸의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밀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말 한마디가 고요하던 방 안에 파문을 일으켰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레이디 에밀리의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룸에 있는 모든 레이디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사실인가요, 레이디 에밀리?”

“사실이에요. 제가 조금 전 배가 고파서 음식 접시를 들고 밖으로……. 아,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우연히 캠벨 저택의 집사를 만났는데 그의 팔에 로이슈덴 공작님의 코트가 걸려 있는 걸 똑똑히 보았거든요.”

들떠 있던 방 안의 공기가 실망스럽다는 듯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뭐야?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집사의 팔에 들린 게 로이슈덴 공작님의 코트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럴 줄 알았다며 레이디 제인이 비아냥거리자, 에밀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연히 확인했죠. 집사에게 직접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11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하셨대요.”

“그럼 지금은 파티장에 계시겠네요?”

“아니요. 지금은 라우렐 데칸 백작님과 함께 정원에 있는 휴게실에 계시는 모양이에요. 다들 라우렐 데칸 백작님이 누구신진 알고 계시죠?”

에밀리가 꿈을 꾸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리곤 레이디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또다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황실 근위대의 단장님이시잖아요. 로이슈덴 공작님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고요. 아, 오늘 드디어 두 분이 함께 파티에 계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겠군요.”

두 손을 꼭 맞잡고 시라도 낭송하듯 떠들어 대는 에밀리를 보며, 레이디들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곤 그녀에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분주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레이디 캐서린, 들으셨죠? 정말 로이슈덴 공작님이 파티에 오신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군요, 레이디 제인.”

캐서린은 관심 없는 척 드레스 자락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제인은 속지 않았다. 대신 내숭을 떨어 대는 캐서린을 보며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정말 관심 없으세요? 공작님이 처음으로 참석하신 파티인데, 첫 댄스 상대가 되셔야죠. 사실 사교계의 꽃인 레이디 캐서린만큼 공작님께 어울리시는 분도 없을 테니까요.”

제인이 한껏 추켜세우자, 캐서린의 붉은 입술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뭐, 그렇긴 하죠.”

콧대 높은 레이디답게 거만한 모습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오늘 그분도 파티에 참석한 것 같던데.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옆에 앉아 있던 레이디 중 한 명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캐서린은 ‘그분’이란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 파티에 공작님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죠. 그러니 가문의 명예나 평판 따위 진흙탕에 던지고 파티에 참석했을 테고요. 정말 같은 레이디로 창피할 정도라니까요.”

캐서린의 악의적인 비난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사실 괴물 공작보단, 로이슈덴 공작님이 홀딱 빠지셨다는 랑케의 고급 창부가 문제이지 않을까요? 소문엔 정부로 집에까지 들였다고 하던데.”

“레이디 제인! 천박하게 랑케의 창부 얘길 꺼내시다니. 그건 당연히 헛소문이에요. 고귀하신 가문의 주인께서 그런 하찮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리 없잖아요. 분명 공작님은 신분에 걸맞은 아름다운 레이디를 신부로 선택하실 거예요.”

마치 그 레이디가 캐서린 캔싱턴,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당연하죠, 레이디 캐서린. 아드리안 제국에서 레이디 캐서린만큼 아름다우신 분은 없을 테니까요.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황제 폐하께서도 보는 눈이 없으신 것 같지 않으세요?”

제인이 갑작스레 황제 폐하를 운운했다.

다들 그에 관련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사교계의 소문에 둔감한 에밀리는 처음 듣는 말인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가요?”

“정말 레이디 에밀리께선 먹는 것에 집착하지 마시고, 제발 사교계의 소문에 귀 좀 기울이세요.”

“아, 죄송해요. 레이디 제인.”

에밀리가 얼굴을 붉히곤 고갤 푹 숙였다.

그런 에밀리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더니, 제인이 한껏 물이 오른 기세로 종달새처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폐하가 약혼녀로 레이디 그리젤라를 선택하신 것 말이에요. 외모며 교양 면에서 누가 봐도 레이디 캐서린이 낫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이디 그리젤라가 선택되셨죠. 분명히 뭔가가…….”

“풋!”

그 순간 선명하게 들린 웃음소리에 파우더 룸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이런, 망했다.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온 순간, 로엔은 후회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참았어야 했는데.

로엔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이제라도 상황을 수습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레이디들의 동정심을 자극해야 하는지, 아니면…….

“감히 무례하게 웃는 사람이 누구죠? 예의 없이.”

제길, 늦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비웃음의 주인이 누군지 색출하려는 목소리에 로엔은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미련을 털어 내야 했다.

동정심 유발 작전은 물 건너간 것 같으니 방법을 수정해야 했다.

쉽게 좀 가 보려고 했더니…….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제 행동이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군요, 레이디 제인.”

로엔은 아쉬움을 감추며, 출입문에 쳐 놓은 커튼을 들췄다.

그리곤 허릴 곧게 세우곤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베일.

아드리안 제국의 사교계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록스버그 공작의 모습이었다.

“괴물…… 헙!”

“고, 공작님!”

파우더 룸에 있던 레이디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평소라면 멸시와 냉소의 대상이 되었을 테지만, 간도 크게 황제와 황제의 약혼녀를 흉보고 있던 차에 등장한 공작은 지옥에서 온 하데스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앞뒤 상황 빼고 표정만 보면, 딱 악역의 등장이었다.

‘순진한 레이디들을 한입에 삼키려는 괴물 공작.’

창백해진 레이디들의 얼굴을 보며, 로엔은 웃음을 삼켰다.

생각 없이 입을 놀린 게 얼마나 경솔했는지 아는 모양이다.

“어, 어떡해……요. 다 들었으면…….”

손으로 입을 가린 채였지만, 에밀리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비단 에밀리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검은 베일 사이로 레이디들의 경악스러운 표정이 한눈에 보였다.

‘그럼, 방법은 협박인 건가?’

뭐, 어쩔 수 없지.

언제나 그렇듯 악역을 제대로 해 주는 수밖에.

로엔은 파우더 룸 중앙에 놓여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그리곤 편하게 자릴 잡고 앉았다.

제 일거수일투족에 레이디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을 느끼며,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말해 주시겠어요, 레이디 제인? 내가 조금 전에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양.

“어, 저는…….”

제인은 입에 꿀이라도 문 듯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초조한 모습으로 로엔과 캐서린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레이디 제인, 긴장할 것 없답니다.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은 호기심일 뿐이거든요.”

아직까진 문제 삼지 않겠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란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 뜻이 전달된 듯 제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파우더 룸 안에 있는 레이디들 역시 로엔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저는…….”

“휴우, 답답하네요. 그러니까 레이디 제인의 말론, 황제 폐하의 약혼녀이신 레이디 그리젤라께서 여기 계시는 레이디 캐서린보다 못한 사람이란 건가요? 레이디 그리젤라는 폐하의 약혼녀로 선택되기 위해 후작님이 술수를 부린 것이고요.”

로엔이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리곤 제인이 아니라, 캐서린 쪽으로 천천히 고갤 돌렸다.

“어, 아니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인이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버벅댔다.

“그럼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레이디 제인?”

제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로엔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좀 난처하군요. 신하된 자로 폐하께 이런 망측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고하자니 상심하실 테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다 귀족들의 불만이 거세질 테지만, 다시 약혼녀를 뽑자고 건의해야 하는 건 아닌지…….”

로엔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에 맡기겠다는 듯이.

평소 저를 향해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레이디들이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이네. 생각 없이 뱉어 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그들이 만들어 낸 소문은 황제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대놓고 지적하는 행위였다.

또한 황제의 권위에 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레이디 제인? 할 말이 없나요?”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게 울리는 로엔의 목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던 제인이 로엔 앞으로 한 발짝 나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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