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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35화 (36/201)

35화

“어엇!”

“읏!”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충격은 컸다. 무엇보다 심장 부근에 부딪힌 탓에 고통스러웠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제 거의 아물어 가던 드래건의 비늘이 눌려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제길!”

욕설과 함께 밀려드는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조금 전 그와 부딪힌 상대가 당황한 듯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뭐지? 파티장에 검은 베일을 쓰고 나타나다니.

진은 음산하기까지 한 여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마치 지독한 어둠 같았다.

“죄송합니다, 로이슈덴 공작님.”

진은 거슬리는 듯 재빨리 사과의 말을 건네는 여인을 쏘아보았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분명 여인의 목소리였지만 톤이 높은 여성 특유의 소리가 아니라, 낮게 가라앉아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그러다 진은 여인이 쓰고 있는 베일이 필터를 낀 것처럼 여인의 목소리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파티장에 왜 검은 베일을 쓰고 온 거지?

상을 당한 게 아니라면…….

순간 진의 입매가 냉소로 비틀렸다. 눈앞의 여인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파티가 좋다고 해도 상중인 채로 이곳에 오다니. 대단히도 문란한 여인인 모양이었다.

“저, 팔을 놓아주시겠습니까?”

그제야 진은 부딪힌 순간 넘어지려는 여인을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은 재빨리 여인의 팔을 놓았다. 마치 손에 흙탕물이 튄 듯 불쾌감마저 들었다.

진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두운 복도에서 검은 베일까지 썼으면, 주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

복도는 다른 곳에 비해 어두웠고, 여인은 검은 베일까지 쓰고 있어서 여인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맞잡은 손을 계속해서 꼼지락대는 것을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말이 없지? 입이 붙기라도 한 건가?”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공작님 역시 조심하셔야 할 것 같군요. 앞을 살피지 않는 저도 잘못이지만, 공작님께서도 성급하게 걸어온 것이 사실이니까요.”

차갑게 쏘아붙이는 여인의 목소리에 진이 험악한 얼굴을 했다.

곧 죽어도 저만 잘못한 게 아니라고 하는 뻔뻔함이 기가 막혔다.

“적어도 난 상중에 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몸이 달아 있진 않지.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사내에게 몸이 단 걸 광고하고 다닐 게 아니라면.”

진이 싸늘하게 말하곤 여인을 지나쳐 가 버렸다.

“대체 뭐야? 상중인 건 뭐고, 또 사내에게 몸이 달았다니.”

로엔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진을 보며 어이없어 했다.

그러다 문득 진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내가 록스버그 공작이란 걸 모르는 건가?”

믿기지 않았다.

록스버그 공작으로서 진 로이슈덴 공작과의 첫 만남이 이런 황당한 것일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더군다나 사교계의 파티에 한 번이라도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검은 베일에 검은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상중이라니.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흐음, 생각해 보면 파티나 소문 따위에 관심 없는 진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도 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파티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와 부딪힌 문란한 여인이 나란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할지.”

로엔은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복도를 따라 걸었다.

* * *

“공작님!”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온실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라우렐이 진을 알아보곤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이제 도착했는데, 벌써 돌아가고 싶군.”

진이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기색들 드러냈다.

“믿을 수가 없군요. 파티에서 공작님을 뵙게 되다니. 제 생전엔 절대 경험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라우렐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루 종일 사교계엔 로이슈덴 공작이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라, 라우렐은 파티에 참석하기 전부터 ‘로이슈덴 공작이 파티에 참석하는 게 사실이냐.’는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아야 했다.

진을 잘 아는 라우렐은 당연히 그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것이 황제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진의 성격상 영 내키지 않으면 빠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가 파티장에 나타났다.

분명 진을 움직인 뭔가가 이 파티장에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파티에 참석하시다니.”

“밤 사냥에서 폐하를 만났다.”

“아.”

그건 당연히 짐작한 바였다.

하지만 이건 라우렐이 원한 답은 아니었다.

“폐하의 명이셨군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오늘 파티에 그분도 참석하신 것을요.”

라우렐은 캐묻는 대신 고갤 끄덕이곤,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분이라니. 누굴 말하는지 모르…….”

말하던 중 뭔가 떠오른 듯,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라우렐이 말하는 그분이 록스버그 공작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군. 뭐, 처음부터 짐작은 했지만.”

황제 에드윈이 밤 사냥을 핑계로 저를 금원까지 불렀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공작은 왔고?”

“조금 전 도착해 바로 캠벨 후작을 만나러 간 모양입니다. 응접실에서 나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고요.”

“뭐, 어디에 있든 파티에 온 이상 곧 만나겠지.”

록스버그 공작 역시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바로 저를 만나는 것일 테니까.

“흠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진과 라우렐이 고갤 돌렸다.

그제야 라우렐은 갑작스러운 진의 등장에 놀라 제 친구들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멋쩍은 표정을 했다.

“소개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이쪽은 제라르 백작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홈볼트 백작이고요.”

라우렐이 진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루빈 제라르입니다, 공작님.”

“에런 홈볼트입니다, 공작님.”

두 사람이 허릴 숙여 예를 표하자, 진 역시 고갤 끄덕여 보였다.

“루빈 제라르 백작은 기억하실 겁니다. 1년 동안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으니까요. 갑작스런 전대 백작님의 부음으로 칼라일로 돌아가야 했지만요.”

진의 시선이 루빈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군.”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루빈의 푸른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였다. 여러 기사 중의 한 명이던 저를 진이 기억할 것이라곤 당연히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3년이나 지났음에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 모습에 라우렐이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진중한 성격인데, 오늘은 정말 기쁜 모양입니다. 이렇게 소년처럼 흥분한 걸 보면요.”

라우렐의 지적에 루빈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공작님.”

루빈의 사과에 진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럴 것 없다, 제라르 백작. 함께 싸운 기사에게 내 관용은 당연한 것이고.”

진의 한마디에 루빈의 푸른 눈동자가 자부심으로 반짝였다.

“두 사람은 왕립 아카데미의 동기들입니다. 곁에 두시면 공작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라우렐의 의도를 파악한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5년 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진은 귀족들과 친분이 전무했다.

뭐, 그 전이라고 해서 다른 것도 없지만.

아마 라우렐은 진에게 방패막을 만들어 줄 모양이다.

“답지 않게 쓸데없는 짓을 했군.”

진의 타박에 라우렐이 멋쩍은 듯 웃었다.

“술친구나 당구를 즐기기에 좋은 자들입니다. 저나 세이지는 묶여 있는 시간이 많아 공작님 곁에 머물 수도 없고요. 그러니 재고해 보십시오.”

라우렐의 부탁에 진이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귀족 간의 친분 따위 필요 없었지만, 라우렐이 내보인 선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가끔 만나 내기 당구를 즐기는 것도 좋겠군.”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졌던 라우렐의 표정이 풀렸다.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공작님. 당구 실력만큼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거든요.”

에런 홈볼트 백작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말을 건넸다.

진의 시선이 에런에게 향했다.

평소라면 그의 가벼운 어투와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그것과는 달리 날카롭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는 그가 보이는 것처럼 가벼운 이는 아니란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기대되는군, 홈볼트 백작.”

차갑게 날 서 있던 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자 그가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차갑게 얼어붙었던 공기 역시 누그러졌다.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자정에 마차를 대기시켜 놨다.”

자정이라니.

라우렐 역시 진이 오랜 시간 파티장에 머물지 않을 것이란 것쯤은 짐작한 바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라우렐이 재빨리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1시 20분이었다.

한마디로 파티장에 도착해 1시간도 채우지 않고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공작님, 서둘러 파티장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참석한 파티에는 1시간 이상 머무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

“그런 웃기는 룰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군.”

당연히 처음 들어 봤을 테지. 지금까지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파티를 주최한 캠벨 후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과거에 이런 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터라, 귀족들이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칙을 세웠거든요. 아마 바로 돌아가신다면 캠벨 후작님과 결투를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려던 라우렐을 대신해 루빈 제라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의 시선이 루빈 제라르 백작에게 향했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온화함이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닌 자인지 말해 주는 듯했다.

“결투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않아도 뻔히 짐작이 되는군.”

여전히 불만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루빈의 말처럼 캠벨 후작과 결투를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무엇보다 캠벨 후작은 황제인 에드윈의 사돈이 될 자였다.

그러니 괜스레 얽혀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뭐, 룰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들어갈까? 최대한 빨리 돌아가려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될 것 같거든.”

진은 세 사람에게 고갤 끄덕여 보이곤 테라스를 나왔다.

그리곤 파티가 한창인 그레이트 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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