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 내 정신 좀 봐. 깜빡 잊고 있었네요. 여기. 제가 준비해 온 약혼 축하 선물입니다.”
그제야 생각난 듯 로엔이 벨벳으로 된 상자 두 개를 꺼냈다.
“선물이요? 난 받고 싶지…….”
“이건 폐하의 부탁과는 상관없이 드리는 것이니 부담스러워하실 필요 없답니다.”
로엔이 재빨리 선을 그었다.
그제야 떨떠름하던 그리젤라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리젤라가 조심스럽게 벨벳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상자에 박힌 유명한 보석상의 로고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어머, 이건 샬럿 보석상의 것이군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샬럿 보석상의 로고를 손끝으로 훑어 내린 뒤,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그리젤라가 숨을 삼켰다.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와 호리우스의 눈으로 세팅이 된 목걸이와 귀걸이는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불빛에 아름답게 빛났다.
“말도 안 돼.”
그리젤라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너무 고가의 물건인지라 선뜻 손을 대지도 못한 듯했다.
무엇보다 로엔이 선물한 보석은 지금 사교계의 레이디들이 혈안이 되어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연줄이 없으면 주문을 해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폐하의 약혼녀의 지위에 걸맞은 물건을 준비하느라 애를 좀 썼거든요.”
“마음에 들어요, 공작님. 정말 마음에 들어요.”
조금 전 떨떠름한 반응과는 달리 그리젤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황홀한 듯 빛났다.
보석을 선물한 이가 추문의 주인공인 괴물 공작이란 사실도 잊은 모양이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쁘군요. 지금 당장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파티에 참석하시는 건 어떠세요? 모두 부러워할 겁니다.”
“그래야겠어요.”
그리젤라가 여전히 보석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호감을 사는 덴 성공한 것 같군.’
로엔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머지 상자도 열어 보세요. 만물상점에서 구입한 건데, 들리는 소문엔 레이디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하더군요.”
마치 뱃사람을 유혹하는 전설의 세이렌처럼 달콤하기까지 했다.
“만물상점이라면, 혹시 시모네타의 그 가게를 말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젤라가 보석 상자를 내려놓고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남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점의 주인 말론 새롭게 출시된 향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은 아직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시판하기 전에 딱 하나만 만들었다고 들었으니, 칼라일에서 이 향수를 쓰는 건 오직 레이디 그리젤라뿐일 것 같군요.”
로엔의 설명에 그리젤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곤 서둘러 상자를 열었다.
수정으로 된 보랏빛 유리병이 불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특히 유리병의 뚜껑은 보석으로 세공되어 그 어떤 보석보다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향수의 이름이 ‘바유’라고 하더군요. 바람의 여신이란 뜻의. 그러고 보니, 레이디 그리젤라와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바람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매혹적인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폐하께서도 레이디 그리젤라를 약혼녀로 선택하신 것일 테고요.”
로엔이 대놓고 칭찬을 하자, 그리젤라의 뺨이 붉어졌다.
사실 그리젤라의 외모는 평범에서 조금 웃도는 정도였다.
현재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캔싱턴 백작가의 영애인 캐서린의 화려한 외모에 비하면 수수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인 에드윈은 화려한 외모가 매력적인 캐서린이 아니라, 수수하고 청아한 그리젤라를 선택했다.
황태자 시절부터 수많은 여인들과 연애를 즐겨 온 바람둥이 황제에겐 참하고 믿을 만한 성품의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에 그리젤라 캠벨이 들어맞은 것일 테고.
황제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교계에선 황제의 그런 선택을 두고 아직까지 뒷말이 많았다.
그리젤라가 캠벨 후작가가 가진 제력과 힘으로 술수를 부려 캐서린의 자릴 빼앗았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당연히 그 소문은 캐서린이 퍼트렸을 테지. 사교계의 종달새인 레이디 제인의 입을 통해서.’
안 봐도 뻔했다. 사교계란 원래 권모술수에 능한 곳이니까.
황제의 약혼녀가 정해진 후 아드리안 제국의 사교계는 사교계의 꽃인 캐서린과 황제의 약혼녀인 그리젤라를 중심으로 편이 갈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계를 정리하자면, 캐서린과 그리젤라는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다.
“바유라니. 이름마저 아름답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로엔이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캠벨 후작은 물론 그리젤라 역시 당황한 표정을 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후작님, 오늘 제게 보여 주신 따뜻한 배려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부탁은 잊어 주세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저야 폐하의 명대로…….”
“괜찮습니다, 후작님.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 할지라도, 후작님이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무방한 부탁이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제가 도저히 염치가 없어서…….”
로엔이 죄인처럼 고갤 숙였다.
그러자 검은 드레스 차림의 로엔이 평소보다 더 처연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점심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닙니다, 공작님. 제가 폐하의 명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돌아가신 선대 록스버그 대공께 신세를 진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답으로 돕겠다는 뜻 같았다.
“아버지와요?”
로엔의 떨리는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렸다.
부모를 사고로 잃은 후, 그리움에 사무친 듯 울음이 묻어 있었다.
“어, 저기.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내내 냉정함을 유지하던 로엔이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며, 캠벨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후작님께서 아버지를 언급하시는 바람에 보고 싶어져서 그만.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로엔의 사과에 캠벨 후작이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로엔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베일 속에서 눈가를 슬쩍 훔쳤다.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된 듯 손수건을 다시 후작에게 건넸다.
“레이디 그리젤라?”
“아, 네. 말씀하세요, 공작님.”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리젤라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이 절 돕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니 마음 쓰실 필요 없답니다. 전 혼자도 괜찮거든요.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로엔이 위태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연기는 완벽해야 했다.
“그리젤라, 너에게 정말 실망이구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런 귀한 선물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런 분을 돕지 않는 건…….”
응접실 문이 닫히기 직전, 캠벨 후작이 그리젤라에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끼는 던져 놓았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로엔은 허릴 곧게 펴곤 앞을 응시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이제 사교계의 꽃인 레이디 캐서린을 만날 차례였다.
이 시각이면 분명 파티장이 아니라 파우더 룸에 있을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직 로이슈덴 공작이 파티장에 나타나진 않는 것 같고.
아마 그를 기다리기 지친 레이디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이번엔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흐음, 여전히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
로엔은 숨을 고른 후 파우더 룸으로 향했다.
* * *
마차에서 내린 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캠벨 후작가의 저택을 응시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인데도 대낮처럼 불을 밝힌 저택의 등불은 한껏 무르익은 파티의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짐, 자정까지 이곳에 마차를 대기하고 기다리도록 해.”
이제 막 파티장에 도착한 주인이었다. 그런데 벌써 돌아갈 생각부터 하는 제 주인을 보고도 마부인 짐은 고갤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주인님.”
진이 고갤 끄덕인 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후작의 얼굴만 보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명이니, 적어도 1시간은 파티장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벌써부터 지루하군.”
어두운 표정으로 걷는 동안 어느새 저택의 현관 앞에 당도했다.
“로이슈덴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그레이트 홀까지 모시겠습니다.”
진의 코트와 장갑을 받아 든 집사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릴 숙였다.
“아니, 그럴 것 없다. 그런데 데칸 백작은 오늘 파티에 참석했나?”
“데칸 백작님은 정원의 휴게실에 계십니다. 사람이 많아 홀은 답답하시다며, 조금 전 친구 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어느 쪽이지?”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아니. 어딘지 알려 주면 내가 가지.”
차갑게 거절하는 진의 태도에 집사가 눈치 빠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한 번 더 청했다간, 그 차가운 서슬에 목이 달아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복도를 지나 오른쪽 끝에 보이는 문입니다. 정원과 바로 이어지는 곳이 휴게실입니다.”
진이 고갤 끄덕이곤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라우렐 데칸이 파티에 참석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사가 알려 준 대로 복도를 따라 걷다가 코너가 나오자 오른쪽으로 지체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림자를 닮은 검은 인영이 그의 심장을 향해 힘껏 부딪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