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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33화 (34/201)

33화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로엔은 내내 참고 참았던 말을 꺼냈다.

“같은 입장이라고 하시니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이 무슨 뜻이냐는 듯 로엔을 보았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원해서 한 일도 아닌데, 폐하께 죄책감을 가질 필욘 없다는 뜻이에요. 정말 반역을 꾀하는 게 아니라면.”

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한순간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흐름을 멈췄다.

“너, 주제넘어.”

“죄송합니다, 공작님.”

진은 로엔을 남겨 둔 채 등을 돌렸다.

‘정말 이상한 여인이다.’

지금껏 보아 온 여인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나약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다.

타고난 기품과 우아함 때문인지 말투와 표정에서 거스를 수 없는 고결함이 엿보였다.

진짜 정체가 뭘까? 어떤 가문의 레이디일까?

진은 알고 싶어졌다. 레이디의 모습을 하고 파티에 참석한 시모네타의 모습이.

그녀를 떠올리자 놀랍게도 극에 달했던 짜증 역시 점점 사라졌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원해서 한 일도 아닌데, 폐하께 죄책감을 가질 필욘 없다는 뜻이에요. 정말 반역을 꾀하는 게 아니라면.」

한낮 여인의 말이었다. 그것 역시 정체를 숨긴.

그러나 지금껏 누군가에게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거짓말투성이는 질색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녀가 뭘 숨기고 있든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제 목숨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뭐든 눈감아 줄 용의가 있었다.

뭐라고 규정지을 순 없지만, 처음으로 갖게 된 의미 있는 존재였으니까.

아침을 맞는 진의 발걸음이 가볍다. 더는 하루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말에 오른 진은 제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깨닫지도 못한 채, 공작저로 향했다.

* * *

칼라일의 밤은 화려하다.

특히 정복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귀족들은 사교시즌과 상관없이 파티를 열었다.

유리엘라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설치된 가스등이 밤새 도시를 밝혔다.

밤이 주는 은밀함과 환락을 쫓는 가면 파티는 앞으로 타란 대륙에 들어올 전리품에 대한 기대와 맞물려 더욱 향락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수도 칼라일을 찾는 무역상들이 가세하면서, 귀족들의 저택은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대낮처럼 어둠을 밝혔고, 최고급 샴페인과 파티의 분위기를 돋을 악사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파티라.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지겨워지다니.’

힘든 저녁이 될 것 같았다.

로엔은 허릴 곧게 세운 채, 캠벨 후작가의 응접실을 눈으로 살폈다.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가리는 건 대부분이 불편했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위를 살피거나 상대방의 표정을 관찰할 땐 요긴했다.

지금도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캠벨 후작을 관찰 중이었다.

“소문이 벌써 사교계에 다 퍼진 모양이군요. 칼라일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이 파티에 온 것처럼 보이니.”

로엔은 마차에 내린 순간 보았던, 캠벨 후작가의 그레이트 홀을 가득 채운 귀족들을 떠올렸다.

“폐하께서 작정하고 벌이신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하는 캠벨 후작을 응시했다.

찻잔을 들어 올리며 웃는 후작은 황제가 깐 판이란 걸 숨길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폐하께서 관여된 일이라니, 이제 편하게 말해도 될 것 같군요.”

“폐하께서 공작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심성의껏 도우라고 하시더군요. 필요한 것이 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직은 저도 생각 중이라. 오늘 새벽에 갑작스레 초대장을 받은 터라 생각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러시겠네요. 앞으로 자주 파티에 참석하실 테니 천천히 말씀해 주십시오.”

캠벨 후작의 말을 미루어 볼 때, 에드윈은 오늘 이후 저와 진 로이슈덴을 같은 파티에 계속 부를 모양이었다.

“혹시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님과의 결혼을 허락하신 겁니까? 이 부분을 정확히 알면 도움을 드리기 편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겠군요. 폐하의 뜻은 언제나 제 생각과는 달리 심오해서.”

로엔의 대답에 캠벨 후작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렇죠. 다른 귀족들은 폐하께서 한없이 유하신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선대 황제보다 더 까다로우신 분일지도 모르니까요.”

로엔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캠벨 후작을 보았다. 괜히 황제의 사돈이 된 게 아닌 모양이다.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예리했다.

“운이 참 좋은 분이시죠. 황제가 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복전쟁이 승리로 끝났으니까요.”

로엔이 캠벨 후작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 슬쩍 말을 건넸다.

“그렇죠. ‘부러지지 않은 검’의 현신인 로이슈덴 공작을 손에 넣으셨으니까요.”

눈까지 빛내며 말하는 캠벨 후작에게선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황제와는 달리 캠벨 후작은 아직 로이슈덴 공작에 대한 반감이 없는 모양이야.’

로엔은 앞에 놓인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장갑을 벗지 않은 게 생각난 듯, 캠벨 후작의 시선을 의식하며 실수인 척 검은 가죽 장갑을 벗었다.

“어, 공작님…….”

손등에 있는 화상 자국이 슬쩍 드러난 순간, 당황한 캠벨 후작이 로엔을 불러 저지했다.

“아, 이런. 실수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후작님.”

그녀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캠벨 후작을 보며 다시 장갑을 꼈다.

‘날 돕겠다는 건 개인적인 호의가 아니라 폐하의 명령 때문인 모양이군.’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흐흠, 캠벨 후작을 전적으로 내 편으론 만들 수 없겠어.’

조금 전의 반응으로 로엔은 후작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똑똑!

“후작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아, 들여보내.”

밖에서 들려온 집사의 말에 캠벨 후작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조금 전 일로 로엔을 보기가 겸연쩍은 듯 슬쩍 시선까지 피한다.

제 상처를 보고 놀란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신경 쓰실 필요 없답니다, 후작님. 생각 없이 상처를 내보인 제 불찰이니까요.”

오히려 로엔이 사과를 하자, 캠벨 후작이 더 민망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사이 응접실 문이 열리고, 후작가의 영애이자 황제의 약혼녀인 그리젤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찾으셨다고 해서 왔어요. 무슨 일이시죠?”

안으로 들어오던 그리젤라가 검은 베일을 쓴 로엔을 알아보곤 주춤 걸음을 멈췄다.

“레이디 그리젤라, 오랜만에 뵙는군요. 폐하와의 약혼식 이후 처음인 건가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약혼녀에게 예를 갖췄다.

“어, 공작님께서 약혼 파티에 오신 줄 몰랐네요.”

“그날은 사람들이 많아 폐하께 얼굴을 잠깐 비치곤 돌아왔었거든요. 아마 그래서 절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감사합니다, 공작님.”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캠벨 후작이 헛기침을 했다.

“앉아라, 그리젤라.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다.”

그리젤라는 파티가 한창인 시각에 응접실까지 불려와 괴물 공작인 저를 만나야 하는 이 상황이 영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듯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빨리 말씀해 주세요. 친구들이 기다려서.”

그리젤라의 재촉에 캠벨 후작 역시 돌려 말하지 않았다.

“오늘 파티에서 네가 공작님을 도와야겠다.”

“네? 제가요?”

그리젤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다 너무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로엔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사교계에서 대놓고 따돌리는 괴물 공작이라도, 록스버그 공작은 아드리안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분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약혼녀라고 할지라도 무례하게 굴 순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국혼을 올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젤라, 이건 폐하의 부탁이다.”

“폐하께서요?”

폐하라는 말에 그리젤라가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하얀 이에 짓이겨지는 모습을 보자, 로엔은 저 때문에 고민에 빠진 그리젤라에게 동정심마저 생겼다.

“후작님,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아닙니다, 공작님. 폐하께서 각별히 신경 써 달라며 직접 편지까지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니 제 딸 역시 공작님을 도울 겁니다.”

에드윈이 친필 편지까지 써서 보내다니. 정말 제대로 판을 깔아 줄 모양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님. 사실 초대장을 받은 뒤론, 긴장 때문인지 계속 숨을 쉴 수가 없었거든요. 분명 파티장에서 귀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로엔이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황제가 깔아 준 무대에서 제대로 연기를 해야 할 때였다.

“저는 몰랐습니다. 공작님께서 그런 마음이실 거라곤.”

캠벨 후작이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그리젤라, 내 말 알아들었겠지? 넌 폐하의 신부가 될 사람이다. 아드리안 제국의 안주인이 되려면, 폐하의 뜻을 잘 따라야 한다는 것 역시 잊지 말거라.”

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 그리젤라는 밖으로 말을 뱉을 만큼 경솔하진 않은 모양이다.

대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네 친구들을 공작님에게 소개하면 된다. 가끔 이야기도 나누고.”

“제 친구들을요?”

“그래. 그것만 해 주면 된다. 아주 쉬울 거야.”

그리젤라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주먹을 꼭 쥐는 게 보였다.

아마 캠벨 후작은 그것이 레이디에게 그 무엇보다 힘든 일이란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더욱이 지금 사교계는 저와 로이슈덴 공작과의 스캔들로 연일 들썩이고 있었다.

대부분이 추문일 테고, 그 추문의 당사자와 파티가 끝날 때까지 친한 친구라도 된 듯 행동해야 한다니.

그건 명예와 평판을 목숨처럼 여기는 그리젤라에겐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터였다.

‘이러다 울겠네.’

로엔은 베일 사이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저와 진을 동시에 초대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캠벨 후작이 저를 도와줄 것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황제의 약혼녀까지 움직일 필욘 없었다.

‘아니지. 어쩌면 약혼녀이기 때문에 더 나와 묶으려 한지도 모르겠어.’

캠벨 후작은 사돈지간이었지만, 그리젤라는 제 신부였다.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황제 대신 제 사람을 괴물 공작에게 보냄으로써, 황제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귀족들에게 알릴 생각인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의 약혼녀인 그리젤라가 그녀의 손만 잡아 준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야.’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로이슈덴 공작을 손에 넣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우선 험난한 사교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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