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입술을 내어 줄 만큼이라니.
그는 랑케에서의 키스가 첫 키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라며 책임까지 운운했다.
그러니 그에게 입술을 내어 준다는 건 전혀 가볍지 않다는 의미다.
로엔은 뜨거워지려는 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마치 고백이라도 받은 듯했다.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실 테지만 다른 레이디들에겐 절대 그러지 마세요. 이건 작정하고 날리는 작업 멘트보다 더 치명적인 것 같으니까.”
로엔이 두 손 두 발 들었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업 멘트라니. 혹시 내가 바람둥이처럼 널 유혹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요.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레이디들은 오해할 것 같다고요. 공작님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페로몬 덩어리인 거죠. 사람을 홀리는.”
진이 이해하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리자, 로엔이 한숨까지 내쉬며 어쩔 수 없이 부연설명을 했다.
“막말로 저야 공작님과는 상대도 안 되게 낮은 신분에다가, 계약으로 만난 관계니 상관없지만 다른 레이디들은 다르잖아요. 신분의 제약이 없거나 계약 관계가 아닌 상대는 공작님의 행동을 호감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제발 자각 좀 하라고, 콕 찍어 말했다.
“한마디로, 너는 착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군.”
진의 표정이 변했다. 찌푸려진 미간과 굳은 입매가 서늘함을 더했다.
‘설마 내가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는 건 아닐 테지?’
그런 생각이 들자 로엔은 적극적으로 부인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저와 공작님은 동병상련이란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는 관계잖아요. 서로를 돕기로 계약까지 한 상태고요. 그러니 전 절대 착각이나,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로엔이 재빨리 선을 그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했다.
“넌 그렇단 말이지?”
진의 차가운 물음에 로엔이 재빨리 고갤 끄덕였다.
이상했다. 로엔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부정할수록, 진의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왜 더 화를 내는 거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되자, 로엔은 오해를 풀기 위해 뭔가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빠르게 방법을 찾던 로엔은 좋은 생각이 난 듯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곤 그의 팔을 붙잡아 제 손목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손목 위에 놓인 그의 손끝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맥박을 재 보세요. 제 심장이 평소와 같은지 확인해 보시면 제가 공작님에게 다른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진이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목 위에 놓인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맥박이 뛰는 횟수를 헤아려 제 마음을 확인하라니.
엉뚱하기까지 한 로엔의 행동에 진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별 뜻 없이 하는 행동일 테지만, 진은 그녀의 사소한 모든 것에 일일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확인을 하셔야…….”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말이다.”
진이 로엔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밀려 올라가 있던 소매를 끌어내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가렸다.
“다행이에요. 저는 공작님이 믿지 않으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안도한 듯 환하게 미소까지 짓는 로엔을 보자,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진은 그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차를 내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로엔이 안으로 사라지자, 진은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어깨며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쉬어 보았지만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 이러지? 병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다 진은 제 손에 닿았던 로엔의 손목을 떠올렸다.
너무 가늘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만큼, 굉장히 약해 보였다.
그래서 불안했다. 움켜쥐기 위해 손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처음이었다. 약한 것을 보고, 그것이 망가지고 부서질까 두려움을 느낀 건.
순간 무심하던 심장이 간질거린다.
불에라도 덴 듯 로엔의 손에 닿았던 손끝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어, 꽉 주먹을 쥐었다.
“미쳤군. 단단히 돌았어.”
진은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무작정 상점 안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떨쳐 내려 애썼다.
“역시 기사시라 검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뒤에서 로엔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는지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였다.
그제야 진은 제 앞에 진열된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한 듯 상점 안을 서성이다 이 앞에 멈춰 선 모양이다.
“게르피온에서 가져온 모양이군.”
“잘 아시네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단검이거든요. 검의 손잡이에 호리우스의 눈을 박아 넣은 덕에 가격 역시 비싸게 책정되었죠.”
“얼마지? 내가 사지.”
진의 제안에 로엔이 웃으며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물건이라서요. 그래도 한번 보시겠어요?”
로엔이 유리로 된 진열대에서 단검을 꺼내 진에게 건넸다.
“나와 취미가 비슷한 자가 있는 모양이군.”
“공작님도 이 대장장이가 만든 검을 갖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몇 개 갖고 있지. 소문에 뭐든 잘라 낸다고 해서.”
몇 개나 소유할 정도로 관심이 있는 것과는 달리 진의 반응은 묘하게 심드렁했다.
“소문과는 다르던가요? 그래서 실망하셨고요?”
“다른 검들에 비해 예리하긴 하더군. 그저 내 기대치가 높았을 뿐이다.”
“설마 흙의 요정인 난쟁이들이 만든 검을 기대하셨던 건 아니시겠죠?”
그의 건조한 반응에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제 말이 사실인 듯, 진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뭐, 그렇지.”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깊고 무거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자르려 했던…….’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라 허릴 꼿꼿이 세웠다.
“혹시 그걸…… 그러니까, 제 말은…….”
로엔이 드래건의 비늘을 직접 언급할 수 없어 머뭇거리자, 진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눈치가 굉장히 빠르군. 상인이라서 그런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로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그리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타일렀다.
“모르셨나 보네요. 그건 세상에 존재하는 검으론 잘라 낼 수 없다는 걸.”
무엇보다 강제로 비늘을 잘라 내려 했다간 목숨마저 잃을 수도 있었다.
“때론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싫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 너도 그렇지 않나?”
“아…….”
충분히 공감했다.
그래서 그에게 섣부른 위로나 동정 같은 말을 무심코 뱉어 낼 수 없었다.
“신기해. 이런 게 네가 말한 유대감인 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라는 감탄사 한 마디로 내 감정을 알아채다니.”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단하던 그의 마음에 미세하지만 작은 균열이 자꾸만 생겼다.
“뭐, 그렇죠. 동병상련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니까요. 이제 앉으세요. 차가 식습니다.”
로엔이 여상하게 말하곤 자리를 권했다.
“여기.”
자리에 앉은 진 앞에 로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향긋한 차향과 함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의 입가가 느른하게 풀렸다.
“향이 좋군.”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던 그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해. 밤새 쌓였던 피로가 다 풀릴 만큼.”
“좋다고 하시니 차를 더 주문해 팔아야겠네요. 사실 이 차는 로만 상단에서 처음으로 가져온 건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어, 잠깐만요. 벌써 가시게요? 아직 차도 덜 마셨는데…….”
로엔이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진을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따라 일어섰다.
왜 갑자기 가려는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는데…….
“피곤하군. 이제 돌아가야겠다.”
정말 성격 하고는.
진짜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변덕쟁이였다.
“혹시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차를 준비할게요.”
로엔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로엔이 여전히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진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차는 좋았다. 갑자기 따뜻한 차를 마셨더니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여기 앉은 채로 잠이 들어 버릴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곤란해지는 건 너일 테지.”
“아, 그러셨군요. 제가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붙잡은 모양이네요.”
“네 탓은 아니지.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건 나니까. 대신 정식으로 널 초대하고 싶군.”
“초대요?”
“초대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티타임의 손님으론 너와 나 둘뿐이겠지만 로이슈덴 공작가의 티파티에 초대하고 싶어서. 21년 만에 처음 여는 티파티지만 실망하진 않을 거야. 요리사의 솜씨가 제법이거든.”
“당연히 가야죠. 그렇지 않아도 제레미가 만든 스콘을 다시 맛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메리언도 보고 싶기도 하고. 집사님은 잘 지내고 계실 테죠?”
로엔이 살갑게 로이슈덴 공작가 소속의 고용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건 네가 직접 와서 확인하면 되겠군.”
진은 곧 초대장을 보내겠다는 말을 하곤, 상점을 나가려는 듯 등을 돌렸다.
“저기 잠깐만요, 공작님.”
“뭐지? 아직 할 말이 남았나?”
걸음을 옮기던 진이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절 찾아온 이유요.”
“……”
갑작스러운 진의 침묵에 로엔이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어, 그러니까 꼭 이유를 듣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용건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뭐, 겸사겸사…….”
“없다고 하면 믿겠나? 사실 나도 놀라는 중이거든. 하필 왜 여기에 온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마 네 말처럼 동병상련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중이야.”
이유 없이 찾아왔다니.
로엔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해가 된 척 고갤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우리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로엔의 시선이 진에게 가 닿았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음영이 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은 평소의 냉기를 거둬 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를 감싼 특유의 서늘함은 여전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신성한 존재인 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의 주인인 듯 당당하고 고귀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