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잠깐. 이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은 보수적인 분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절 도우실 필요는…….”
로엔이 그와 제 입 사이에 손으로 벽을 세우곤,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있는 상황이라, 원하는 만큼 거리를 넓히지도 못했다.
“괜찮다. 계약서를 쓴 순간부터 널 예외로 두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필요하다면 내 입술을 마음껏 가져다 써도 된다.”
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로엔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한 손이 제 손을 감싸자, 놀라 숨을 멈췄다.
컸다. 제 손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공작님!”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로엔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은 대답 대신 로엔의 손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가로 막았던 손이 사라졌다.
두 사람의 숨결이 서로의 입가에 닿았다. 서로의 숨결에 깃든 체향이 심장을 간질인다.
청량한 바람 냄새.
로엔이 좋아는 숲의 향이다.
로엔이 눈을 들어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서늘한 빛이 감돌던 그의 눈동자에 나른한 열기가 깃들어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 때문인지, 아니면 저를 향한 열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때? 지금 사용해 보겠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도무지 믿기지 않은 상황에 심장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뛴다.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알 수 없는 갈증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진정해.’
이건 키스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체액으로 고통을 줄이는 치료제. 그래, 맹독을 정화하는 해독제를 주겠다는 제안일 뿐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심장은 그와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치 없이 설렌다.
로엔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단정한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부드러웠다. 당연히 제 주인을 닮아 차갑고 딱딱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의 입술에 닿아 있는 로엔의 시선을 알아챈 듯, 진의 입술이 유려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곤 당장에라도 입술을 겹칠 듯 가까워졌다.
두근.
이런 미친!
기대라도 하듯 심장이 또 뛴다.
“어, 잠깐!”
마지막 순간,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잠깐만요, 공작님!”
재빨리 고갤 돌리자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입꼬리를 지나쳐 뺨에 닿았다.
윽! 입술이 닿은 것은 뺨인데, 어쩐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어린 새의 솜털이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아, 아쉽다. 조금만 더…….’
순간 떠오른 생각에 로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쉽다니. 진짜 미쳤나 보다.
로엔은 위험을 감지한 초식동물처럼 몸을 최대한 뒤로 물려 그와의 거릴 벌렸다.
그러지 않고선 눈앞에 순진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의 입술에 기어코 입술을 밀어붙일 것 같아서다.
‘역시, 위험해.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저런 얼굴을 이른 새벽부터 보는 건.’
로엔은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했다.
“어, 그러니까 지금은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왜지? 아픈 것 아니었어?”
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로엔을 본다.
“견딜 만해서요. 그리고 이런 사소한 걸로 아까운 한 번의 기회를 날리고 싶지도 않고요.”
“아, 그게 걱정이었나?”
“계약을 어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이건 처음부터 계약 안에 포함시키지 않을 생각이었거든. 그럼 된 것이겠지?”
마치 큰 은혜라도 베풀 듯 웃더니, 그가 손을 뻗어 왔다.
“아니, 그게…….”
로엔은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재빨리 머릴 굴렸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제 그를 설득할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그와 입술을 겹쳐야 했다.
“사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이유라고? 이번엔 뭐지?”
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담고선 로엔을 보았다.
맹독을 해독해 주겠다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제발 진정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의식하고 있잖아.’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 진의 태도에 로엔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 있다간 주도권을 쥐기는커녕, 그에게 쥐여 줄 판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자주 사용하면 약효가 떨어지는 법이거든요. 또한 약에 중독될 위험도 있고.”
진이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히 듣고 있자, 로엔이 재빨리 덧붙였다.
“중독이라고?”
“네. 사실 제가 걱정인 건 바로 그 중독이거든요. 지금은 입술을 통해 얻는 체액으로 맹독을 해독하는 게 가능하지만, 중독이 되면 키스로는 턱도 없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죠.”
진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방법이라니?”
“그러니까 키스로 부족한 체액을 메꾸기 위해선 더한 게 필요하다는 뜻인 거죠. 예를 들어, 남녀 간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행위가요.”
로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을 보았다.
순간 남녀가 나누는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행위가 뭔지 깨달은 듯 진의 귓불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흠흠! 그건 좀 곤란하겠군. 결혼한 부부 사이도 아니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결혼도 하지 않은 우리가 그럴 순 없으니까요.”
다행이다. 그가 더는 키스를 하겠다고 고집 부리지 않아서.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로엔은 뒤늦게야 제 말이 불러일으킨 야릇하고 농밀한 분위기를 깨닫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 덥다. 더워…….
어서 빨리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화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 새벽에 절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네요. 옷차림을 보니 승마를 하신 것 같은데.”
로엔의 질문에 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승마보단 밤 사냥이라고 해야 맞겠군. 폐하의 초대로 황실 사냥터에 다녀왔거든.”
“황실 사냥터라면, 대신전의 후원을 말하시는 건가요? 신성한 땅이라는 그곳?”
로엔이 흥미를 내보이자 진이 고갤 끄덕였다.
“너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사람은 누구나 금지된 곳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법이잖아요. 저 역시 예외는 아닌지라. 사실 항상 궁금했어요. 황가의 혈통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어떤 곳인지. 특별한 뭔가가 있을 테죠?”
흥분한 듯 한꺼번에 쏟아 내는 로엔의 질문에 진의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특별한 뭔가라?’
당연히 있긴 했다. 정말, 사람을 돌게 만드는 그런 존재가.
“당연히 있지. 정말 끔찍이도 싫은 존재가.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밤 사냥을 싫어해. 의미 없는 살생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치가 떨리는지 차갑게 읊조리는 그를 보며, 로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 역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냉기에 들떠 있던 마음 역시 가라앉았다.
“오늘도 싫었겠군요. 기분이 최악일 정도로.”
“아니. 그나마 최악은 아니었지. 5년 만에 갔더니, 전과는 달라져 있었거든.”
따지고 보면 오늘 제 기분이 바닥인 건 밤 사냥 때문이 아니라, 에드윈 때문이었다.
추악한 감정을 드러내며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던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
“그럼 폐하가 원인인 모양이군요. 혹시 속을 긁던가요? 공작님의 뛰어난 능력을 질투해 황좌를 탐하지 말라며 경고라도 하면서요.”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아니라면 제가 실수했네요. 그러니 잊어 주세요. 더욱이 폐하껜 절대 이르지 마시고요. 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요.”
로엔이 목숨을 잃을까 두렵기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진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느른하게 풀렸다.
다행이다. 기분이 풀려서.
“걱정할 것 없다. 폐하께 이를 정도로 마음이 좁은 건 아니니까.”
“목숨을 빚졌네요. 감사합니다, 공작님.”
로엔이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그를 따라 웃었다.
“이건 호기심에 묻는 건데,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물어봐. 뭐든 대답해 주고 싶은 심정이니까.”
“라딘의 서의 번외편에 의하면 신성한 땅에 주술이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인가요?”
“라딘의 서에 그런 것도 써 있나?”
“네. 그 외에도 밝혀지지 않는 황실의 세 번째 예언에 관한 것도 있고요.”
“웃기는군. 내가 알기론 200년 전에 발간된 라딘의 서 특별판과 번외편은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들었거든.”
“맞아요. 제가 알기로도 두 개의 책의 초판본은 아드리안 제국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진열대에 있는 저 책 역시 가짜겠군.”
“가짜라기엔 어폐가 있을 것 같네요. 시중에 나와 있는 두 개의 책은 라딘의 조수로 알려진 타에라 님이 라딘의 예언을 듣고 기억해서 기록한 책이니까요. 제 생각엔 해석본에 가까운 책이죠.”
“라딘의 서 해석본이라니. 흥미가 돋는군.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어 봐야겠어.”
“말씀만 하세요. 제가 최상급으로 구해 드릴 수 있어요.”
로엔이 상인의 얼굴을 하며 흥정을 했다.
“좋아. 가장 비싸게 쳐줄 테니 조만간 저택으로 가져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작님. 곧 최상의 물건을 갖고 찾아뵐게요.”
로엔이 신중하게 답하곤 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주술에 대해서는 나도 자세히는 몰라. 금원을 지키는 자는 존더부르크 황가와 계약을 한 신성한 존재라는 것 외엔.”
“황가와 계약한 인외 존재라. 드래건은 아니겠군요.”
“맞아. 내가 드래건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엔 내 목숨을 위협했었으니까.”
진의 담담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로엔은 그 상황이 어린 진에게 얼마나 두렵고 끔찍했을지 짐작이 됐다.
“이래서 무책임한 어른들이 문제라니까요. 제 욕심으로 자식에게 드래건의 심장을 먹여 저주를 내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죽어 버리면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그걸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사람 생각은 하지도 않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듯 불만을 토로하는 로엔을 보며, 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 나를 대신해 화를 내 주는 건가? 내 아버지에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의 아버님이신데. 제가 욕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과는 달리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 로엔을 보며 진은 처음으로 그녀가 품고 있는 저주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혈독화는 유전이다. 그것도 부모가 물려준.
‘어쩌면 나와 같은 상황일지도 모르겠어.’
진은 처음으로 로엔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공작님은 절 얼마나 믿으시죠?”
뜻밖의 물음에 진이 로엔을 보았다.
그게 왜 궁금한 걸까?
“글쎄. 내 입술을 내어 줄 정도는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