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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9화 (30/201)

29화

“레이디들만 슬퍼하는 게 아니라, 미혼의 귀족들도 죽을 맛일 테죠. 그 문제의 명단이 존재한다니 말입니다. 이건 뭐, 로이슈덴 공작님은 어디서나 화제의 중심이시네요.”

홈볼트 백작의 말에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명문가의 수장에 서늘한 미남이니 당연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요.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혹시 시모네타 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루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차를 마시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루빈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순간 테이블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로엔이 서둘러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애써 밝게 말했다.

“제 의견이 궁금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러니까, 저는…….”

로엔이 손가락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진 로에슈덴 공작을 떠올렸다.

“공작님은…….”

‘위험한 분이시죠.’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서늘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은청색의 눈동자는 맹수의 잔혹함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위험한 이유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알 수가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러니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기도 힘들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전 ‘아니다.’ 쪽에 가깝겠군요.”

그래. 그는 ‘아니다.’야.

위험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로엔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며칠 전, 협약의 입맞춤이라며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말랑하고 부드럽던 감촉이 떠오르자, 로엔은 열이 오른 듯 더워졌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꽤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물어 오는 루빈의 태도에 로엔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의아했다. 그가 제 생각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짐작이 되지 않아서.

“인기가 많은 남자는 골치 아프거든요. 전 생각보다 독점욕이 강해서 제 것에 눈독을 들이는 꼴을 못 봅니다. 내가 남자였다면, 결투 신청이라도 했을 거라서.”

로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 결투를.”

루빈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모양이다.

“걱정 마세요, 백작님. 백작님을 마음에 품어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결투 신청 역시 하지 않을 테고요.”

“어, 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의외네요. 백작님은 그런 쪽으로 편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든 여인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 법이잖아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최대한 빨리 세 분께서 의뢰하신 목록을 갖고 제라르 백작님의 저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로엔이 붙잡을 새도 없이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곤 자릴 떴다.

루빈은 멀어져 가는 로엔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흠흠, 굉장하신 분이네요. 평소에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열정적이시고. 결투 신청이란 말에 완전 지릴 뻔했다니까요.”

홈볼트 백작의 말에 루빈 역시 동의했다.

“분명 다르지. 보통의 레이디들과는.”

그래서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 오늘 처음 봤습니다. 제라르 백작님이 레이디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요.”

홈볼트 백작의 말에 루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한 아이처럼 홈볼트 백작이 눈을 빛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작님. 우리 사이에. 아니, 진즉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제가 적극적으로 도왔을 텐데요.”

빙글거리며 웃는 홈볼트 백작을 보며, 루빈이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티가 났었나?

제 마음을 벌써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루빈은 아니라고 잡아떼려다 입을 다물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한 홈볼트 백작을 보자, 변명이 통할 단계가 아니란 걸 깨달아서다.

“홈볼트 백작, 부탁 하나 하자면 시모네타 님에겐 절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부담스러워하실 테니까.”

루빈이 어쩔 수 없이 제 마음을 인정했다.

“부담스러워할 게 뭐 있습니까? 오히려 좋아하면 몰라도. 백작님이야 어딜 봐도 아드리안 제국 최고의 신랑감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대도 들었잖아. 날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 말은 날 거절하는…….”

“왜 이렇게 순진하십니까. 그건 별 뜻 없이 덧붙인 말이지 않습니까. 아니며 백작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넌지시 던진 미끼일지도 모르고요.”

“미끼라고?”

“이래서 연애 고자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일일이 손으로 짚어 가며 다 가르치려면 귀찮거든요.”

루빈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홈볼트 백작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시절부터 홈볼트 백작의 여성편력은 유명했었다.

“홈볼트 백작, 혹시 오늘 시간 되면 저녁이라도 먹을까 하는데.”

속이 뻔히 보이는 루빈의 초대에 홈볼트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제라르 백작님의 부탁이니 특별히 함께 하죠. 대신 비싼 와인도 시킬 겁니다.”

“얼마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벨루가 자작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쳇! 제라르 백작님은 좋으시겠네요. 이제 괴물 공작의 희생자 목록에서 빠지시게 됐으니까요.”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벨루가 자작을 보며, 루빈과 홈볼트 백작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곤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이른 새벽, 어둠을 물리치는 푸른 여명이 황실 사냥터를 비췄다.

대신전의 후원이라 불리는 사냥터는 금원으로, 황실의 일족이 아니면 들어올 수없는 신성한 땅이었다.

아드리안의 귀족이라면 이 신성한 땅에 들어오고 싶어 영혼이라도 팔고 싶어 했지만, 진만은 예외였다.

어린 시절부터 신성한 땅에 들어와 에드윈과 함께 일명, ‘밤 사냥’을 할 때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곤 했다.

그땐 몸속에 잠들어 있는 드래건의 힘이 각성하기 전이라, 금원에 쳐진 결계와 주술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었다.

성년이 되지 못한 진의 몸은 나약했고, 그 속에 깃든 드래건의 힘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으니까.

어린 진은 제 손에 들린 창에 짐승의 더운 피가 덧칠해질수록 지독한 불안을 느꼈다.

살생. 밤 사냥에서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존더부르크의 직계와 그와 혈족으로 연결된 로이슈덴 공작가는 밤 사냥을 통해 황제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에드윈은 어둠 속을 내달려 두려움에 떠는 짐승의 심장을 찌를 때마다 희열에 젖었다.

광기마저 느껴질 만큼, 살육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진은 달랐다.

붉은 피가 손과 얼굴 그리고 온몸에 튀어 칠갑이 될 때마다 제 심장이 찔리는 공포를 맛보았다.

몸속에 잠든 드래건이 깨어날까 두려워 숨을 죽였다.

“로이슈덴 공작. 5년 만에 밤 사냥을 온 감회가 어때? 공작은 성인이 된 후 처음인가?”

에드윈의 목소리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그리곤 그를 붙잡고 있던 긴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요하군요. 그때와는 달리.”

성인이 된 후 처음 맞는 밤 사냥이다.

제 몸에서 각성한 드래건의 힘은 이제 그의 통제하에 있다. 그래서인지 더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한 땅에 존재하는 모든 미물들과 숲에 깃들어 있는 것들이 그에게 복종이라도 하듯 납작 엎드린 느낌마저 든다.

성인이 된 그의 몸은 더 이상 나약하지 않다.

드래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불안정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신성한 땅에 깃든 것들이 더 빨리 알아차리는 건 당연했다.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

이제 드래건의 심장을 품은 진 로이슈덴이 신성한 땅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쳇, 재미없군. 전쟁터가 그댈 망쳐 놨어. 어렸을 땐 밤 사냥을 할 때마다 짐승을 사냥하고 죄책감에 덜덜 떠는 그대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 했는데 말이야.”

에드윈이 실망한 얼굴을 했다.

“누가 믿겠어?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린 잔혹한 기사가 5년 전까지만 해도 새 하나 잡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걸 말이야.”

“지금도 이유 없는 살생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유 있는 살인은 가능한 모양이군. 전쟁터에서처럼.”

에드윈이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렸다.

“폐하의 명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 명령이라 전쟁에서 그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군. 그 어떤 것보다 기쁘군, 로이슈덴 공작. 내 명령에 복종한 신하인 그대가.”

진은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갤 숙였다. 황제의 신하로서.

그 모습이 흡족했는지, 에드윈이 말머리를 돌려 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며칠 사이에 연인이라도 생긴 얼굴이야.”

에드윈은 숨길 생각 따윈 없는 듯 보였다.

“연인이라니. 그런 사람 없습니다.”

“궁에만 있다고 내가 모를 것 같은가?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던데, 아닌가? 그대가 첫눈에 반해 부채를 받았다던 그 창부 말이야.”

그제야 진은 에드윈이 말한 연인이 누군지 깨달았다.

시모네타다. 지금 시모네타와 저에 대한 소문이 사교계에 돌고 있는 모양이다.

“헛소문일 뿐입니다. 부채의 의미를 몰라 받아 둔 것이고, 주인에게 이미 돌려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무 사이도 아니다? 소문처럼 반한 것도 거짓이고?”

에드윈의 질문에 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게. 나 역시 궁금하군. 그녀와 내가 무슨 사이인지.’

진은 며칠 전 그녀와 했던 계약을 떠올렸다.

세 번. 서로가 위험에 빠졌을 때, 서로의 편이 되어 돕자던 계약이었다.

‘그럼 친구거나 동료인 건가? 서로를 돕기로 약속했으니.’

진은 이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친구나 동료 따위는 아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를 돕자는 계약을 했다고 해도, 친구나 동료에게 입을 맞추진 않으니까.

랑케에서의 키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쳐도,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녀의 이마에 했던 입맞춤은 충동 같은 것이었다.

예뻤다. 그래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게 이유의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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