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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8화 (29/201)

28화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며칠 전에 랑케에 로이슈덴 공작이 왔었다는 것 말입니다.”

벨루가 자작이 밀담이라도 하듯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벌써 들었지. 요즘 사교계에선 온통 그 얘기뿐이니까.”

홈볼트 백작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호응했다.

“대체 로이슈덴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은 페이라스모스는 누구일까요?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면서요.”

“그랬다더군. 아마 랑케의 단골들도 모르는 걸로 봐서 그날 처음으로 선보인 신입인 모양이더군. 하지만 문제는 그날 이후, 그 페이라스모스는 공연은 물론 랑케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고.”

“아아, 어쩐지. 그래서 지금 랑케가 귀족들로 붐비는 모양이었네요. 로이슈덴 공작의 얼음 심장을 녹인 여인을 보기 위해서요.”

벨루가 자작이 구미가 확 당긴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홈볼트 백작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꿈 깨는 게 좋아. 랑케의 회원이 아닌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하룻밤에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하니까. 무엇보다 그 페이라스모스를 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없는데 말이야.”

“지금 그깟 돈이 문젭니까? 운 좋으면 로이슈덴 공작의 애첩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인데요. 그것 때문에 귀족이고 상인이고 물불 안 가리고 랑케에 발을 들여놓는 거잖아요.”

벨루가 자작의 천박한 말에 홈볼트 백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여 올렸다.

그리곤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는 루빈 제라르 백작을 건너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작님은 랑케의 회원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가 보셨습니까?”

루빈이 관심 없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 그쪽엔 관심이 없어서. 그것보다 걱정이군.”

“뭐가 말입니까?”

“로이슈덴 공작님이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에게 빠졌다면, 록스버그 공작의 공개 구혼엔 관심도 없을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 목록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될 테니 말이야.”

“빌어먹을, 괴물 공작.”

벨루가 자작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천박하게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에 대해 낄낄거리며 얘기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만물상점을 찾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쯤이면 정보는 다 모았을 걸로 보이는데요.”

홈볼트 백작의 말에 루빈 역시 고갤 끄덕였다.

“차를 다 마신 후 가 보도록 하지.”

“그게 좋겠습니다. 어? 잠깐. 백작님 저분은 시모네타 님이 아닌가요?”

홈볼트 백작의 말에 벨루가 자작과 루빈의 시선이 맞은편 건물로 향했다.

거짓말처럼 건물 안에서 나오는 시모네타가 보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그런데 왜 저곳에서 나오시는 걸까요? 신문사에 광고를 낼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루빈의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지금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귀족들이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즐겨 찾는 카페테리아였다.

노천에 테이블을 놓고 차를 즐길 수 있어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무엇보다 이 카페테리아의 장점은 신문사 그레이트 모먼트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서 오후 5시에 나오는 호외지,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을 제일 먼저 받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은 아침에 발간되는 신문과는 달리 사교계의 온갖 잡다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였다.

그 전날 있었던 사교계의 소식과 스캔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건 물론, 오늘 있을 파티며 무도회의 리스트가 올라와 있어 참석할 파티를 정하지 못한 귀족들에겐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특별판 하단에 명시된 칼럼엔 사교계에서 한 주 동안 가장 핫한 사건을 상세하게 다뤄, 귀족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함께 있는 사람은 파엘라군.”

“역시 소문대로 발이 넓은 모양이군요. 타란 대륙에서 못 구하는 물건이 없고, 인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더니. 파엘라와도 안면이 있을 줄을 몰랐네요.”

홈볼트 백작이 감탄했다.

사실 그레이트 모먼트의 주인인 파엘라는 신문에 광고를 낸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 멀리서 봐도 시모네타를 향해 깍듯이 예를 갖추는 파엘라의 행동이 눈길을 잡았다.

광고나 기사 때문에 얽힌 관계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종 관계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당연히 주인은 파엘라가 아니라, 시모네타였지만.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기다릴 것도 없겠네요. 당장 가서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홈볼트 백작의 말을 가로채며, 벨루가 자작이 잔을 물리고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 자작. 그만 앉도록 해.”

루빈이 시모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파엘라와 얘기를 끝낸 시모네타가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건너는 시모네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엘프들이 산다는 펨브르크 호수 위로 뿌려지는 금빛 물결만큼 아름다웠다.

시모네타가 테이블 앞에 서자, 루빈은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제야 지금껏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세 분을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우아한 이목구비와 신비롭게 빛나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희도 이곳에서 시모네타 님을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와 함께 차를 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홈볼트 백작에 반가움을 표하며 차를 마실 것을 청했다.

로엔이 외투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정도 여유가 있네요.”

로엔이 제안에 응하자, 루빈이 일어나 제 옆의 의자를 빼 주었다.

“친절하시네요, 제라르 백작님.”

로엔이 의자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로엔은 차를 주문하느라 루빈 제라르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는 걸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것도.

차를 다 주문한 로엔이 저에게 향해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며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아름다운 레이디가 된 느낌이군요. 세 신사분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다니 말입니다.”

“무례했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시모네타 님? 사실 시모네타 님의 미모가 넋을 잃게 만드는 마법 같은 것이라.”

홈볼트 백작이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함께 넉살 좋게 용서를 청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홈볼트 백작님.”

“사실인걸요. 그리고 조금 전까지 시모네타 님 얘길 하던 참이었습니다.”

제 얘길 했다는 말에 로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왜 세 사람이 저를 보며 필요 이상으로 놀랐는지 깨달았다.

“타이밍이 좋았네요. 특별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인연이 아닐까, 기뻤답니다.”

계속되는 홈볼트 백작의 너스레에 결국 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를 맑게 하는 부드럽고 청아한 웃음소리였다.

“저에 대한 얘기라면, 혹시 지난번에 의뢰하신 록스버그 공작님의 그 목록에 대한 것이겠군요.”

“혹시 목록이 존재하던가요?”

벨루가 자작이 두 사람의 대화에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 목록에 제 이름이 있는지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참을 만큼의 이성은 남은 모양이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타이밍 좋게 종업원이 로엔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로엔은 초조하게 다릴 떨고 있는 벨루가 자작을 보며,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느긋하게 차향을 음미하는 기품 있는 태도에 루빈의 푸른 눈동자가 짙어졌다.

“흠흠!”

루빈은 로엔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정신이 든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목이 타는지 무심코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타깝게도 목록은 존재하더군요.”

“제길!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제 우린 괴물 공작의 희생양이 될 겁니다.”

로엔의 대답에 벨루가 자작이 나라라도 잃은 듯 절망적인 신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로엔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다행히 입술을 꽉 깨물어 삼켰기 망정이지.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로이슈덴 공작은 그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에게 홀딱 빠졌으니 공개 구혼은 당연히 거절할 테고. 그럼 다음 목표는 우리가 될 것 아닙니까. 폐하께 건의라도 해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닐까요?”

“벨루가 자작,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군. 그리고 폐하라니. 너무 성급한 결론이야.”

루빈이 벨루가 자작을 나무랐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죠? 로이슈덴 공작님이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에게 빠졌다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

로엔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그것이…….”

잠시 머뭇거리던 홈볼트 백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 사교계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긴 합니다.”

“소문이 아니라, 이 정도면 사실인 거죠. 페이라스모스에게 부채까지 받은 데다 그날 이후 그 페이라스모스는 사라졌다잖습니까. 여인에겐 관심도 없던 공작이니, 첫눈에 반해 귀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집에 들인 겁니다. 정부로 말입니다.”

로이슈덴 공작의 정부라?

로엔은 처음 듣는 소문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드리안의 사교계가 소문의 당사자를 어떻게 물고 찢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대상이 로이슈덴 공작인 모양이다.

“벨루가 자작, 무례하군. 레이디 앞에서 천박한 말을 하다니.”

루빈이 난처한 얼굴로 로엔의 안색을 살폈다.

벨루가 자작 역시 이번에야말로 아차 싶었는지, 민망한 듯 머릴 긁적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백작님. 저는 레이디가 아니라 상인인걸요. 이 정도 쯤이야 웃어넘길 수 있답니다. 그나저나 정말 흥미로운 소문이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아드리안의 레이디들이 슬퍼하겠어요.”

이제 레이디들의 공공의 적이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에서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로 넘어간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둘 다 나긴 하지만…….

아니. 어쩌면 이 소문으로 괴물 공작은 동정표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어.

잘만 이용한다면…….

로엔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숨기기 위해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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