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여기 앉으세요.”
톡톡. 책상을 두드려 자릴 권한 뒤, 로엔은 반듯하게 양피지를 폈다.
그리곤 잉크의 뚜껑을 열고 깃펜을 담갔다.
“그럼 계약서는 제가 작성해도 될까요?”
계약서를 작성할 생각에 조금 전까지의 대화는 깡그리 잊어버린 채 사무적인 얼굴을 했다.
“마음대로.”
의자에 앉은 진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리 불퉁하다.
‘또 왜 저러지?’
순식간에 가라앉은 진의 분위기에 로엔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 말이 그의 신경을 또 긁은 모양이다.
‘가끔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다니까. 변덕이 심한 성격인가?’
아님, 예민하거나.
‘쳇, 까칠하기는.’
로엔은 애써 모르는 척하며, 서둘러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날 합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깃펜을 든 로엔이 막힘없이 양피지 위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려한 글씨체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감탄하듯 짙어졌다.
“여기, 다 됐네요. 저는 계약서 하단부에 특이 사항 하나를 첨부했으니, 읽어 보신 후에 공작님도 원하는 조항을 하나 추가하시면 됩니다.”
로엔이 양피지를 진 쪽으로 쓰윽 밀었다.
진은 계약서의 내용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내용은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간결했다.
서로 위험해 처했을 때, 세 번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이 다였으니까.
다만 로엔이 특이 사항으로 첨부했던 내용이 눈에 거슬렸다.
“이건 뭐지? 누가 누굴 책임진다는 거지?”
진의 지적에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공작님의 첫 키스를 가져갔으니, 저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었어요. 엄청나게 보수적이라면서요.”
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로엔을 쏘아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지겠다는 건지, 계약서엔 명시되어 있지 않군.”
로엔의 가벼운 태도와는 달리 진은 혼전 계약서라도 작성하는 신랑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아, 그건 때가 되면 아시게 될 거예요. 목숨을 내놓으라는 건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로엔이 다시 농담조로 말했다.
“뭐, 책임을 진다는데 토를 달 이유는 없겠지. 그럼 여기에 내가 원하는 조항만 하나 더 써 넣으면 되는 건가?”
“네.”
로엔이 깃펜에 잉크를 묻혀 진에게 건넸다.
깃펜을 받아 든 진은 양피지 맨 아래에 뭔가를 써 넣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로엔이 그가 쓴 문구를 보곤 어이없다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이 문구는 로엔이 특히나 좋아하는 이국의 법이었다.
“책임을 진다고 했지만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으니, 나 역시 최소한의 보호 조치는 취해야 할 것 같아서.”
진의 말에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책임의 방법에 따라, 그의 대응 역시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네. 그렇게 하죠. 이제 서명만 하면 됩니다.”
로엔이 먼저 서명을 한 뒤, 계약서를 진에게 내밀었다.
진이 제 이름을 써 넣자, 로엔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양피지를 들어 확인했다.
“계약서까지 썼으니, 이제 우리는 한편이네요. 악수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공작님은 원하신다면 말이에요.”
“악수보다 더 좋은 게 있지.”
“그게 뭔…….”
뒷말은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다.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켜, 제 쪽으로 고갤 숙여 왔기 때문이다.
청량한 체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마에 촉촉하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
당황한 로엔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로엔은 제 이마에 닿았던 게 그의 입술이란 걸 깨달았다.
로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금 뭐 하시는…….”
“뭐긴? 악수 대신 청한 협약의 입맞춤이지.”
협약의 입…….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뛴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표정을 갈무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경험 많은 너에겐 별것 아닐 테지? 하지만 보수적인 성격의 나에겐 커다란 용기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가 당황해 흔들리는 저를 놀리고 있다.
로엔은 당혹감을 서둘러 감추곤, 시치미를 뗐다. 그리곤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는 걸 확인하면서.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변했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나른한 빛을 품고 짙어졌다.
그의 눈빛 하나에, 두 사람을 감싼 공기 역시 팽팽하게 날이 섰다.
로엔은 그의 변화에 만족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당연히 별것 아니죠. 입맞춤이야 삼시 세끼 먹듯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당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또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잔뜩 화가 난 것 같다.
그의 불퉁한 태도에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대신 그가 뿜어내는 서늘한 냉기가 찌를 듯 얼굴에 닿았다.
로엔은 저를 쏘아보는 진의 날카로운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화내는 얼굴도 미치도록 섹시했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는 건, 분명 범죄라고 했는데.’
본인은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의 모습이 여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살짝 음영이 진 얼굴은 평소의 서늘함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저를 삼킬 듯 쏘아보는 강렬할 눈빛에 당장에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갖고 싶어. 저 눈동자에 오직 나만 담길 수 있게.’
그가 뿜어내는 날 선 눈빛에 심장이 묘하게 간질거린다.
조금 전 검은 그을음을 닦아 주느라 그의 손이 닿았던 목덜미가 뜨겁게 느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감쌌다. 어쩔 수 없는 야릇한 감각에 등줄기가 나른하게 떨렸다.
어쩌지? 벗어나야 하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간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의 시선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싶었지만, 그를 의식해 그럴 수도 없었다.
로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에게 시선을 붙잡힌 채 앉아 있었다.
똑똑.
“주인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세실의 목소리에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날 선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로엔은 그의 시선을 피해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이내 문이 열리고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세실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실이 책상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는 순간, 진이 볼일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는 다음에 마셔야겠군.”
“네? 이제 내왔는데, 드시지 않고 가시려고요?”
세실이 실망한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그러시는 게 좋겠군요. 차는 다음에 방문하시면 그때 대접하기로 하겠습니다.”
로엔이 서둘러 진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곤 세실에게 가만있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그 계약서는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다.”
로엔이 고갤 끄덕이며 양피지를 돌돌 말아 서랍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진 역시 고갤 끄덕인 후, 사무실을 나갔다.
아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세실만 애가 탈 뿐이었다.
문이 닫히자, 세실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도 한 모금 드시지 않고 돌아가시다니. 아쉽네요.”
“아쉽긴.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맞다. 공작님이 말했던 계약 얘긴 뭐예요?”
“공작새의 눈물에 관한 거야. 그 대가로 난 약을 처방해 드린다고 했고.”
로엔이 만들어 낸 변명에 세실이 묘한 눈빛을 했다.
“그런 걸로 계약서를 작성했다고요?”
“공작님은 쉽게 남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라 이런 세세한 것도 문서로 남기길 원한다고 하셨거든. 그리고 서로 필요할 때 무조건 세 번을 도와야 한다는 조항도 넣었고.”
대신 그 돕는다는 의미가 키스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귀찮아질 게 뻔했으니까.
로엔은 제발 세실이 의문을 품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믿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 것도 같고. 그나저나 내일부터 가게 앞에 레이디들이 줄을 서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사교계의 종달새로 소문난 레이디 제인이 다녀가셨거든요. 그리고 가게 앞에 서 있는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차를 보고 들어온 모양이더라고요.”
그 뒤로 무슨 얘기가 오갔을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진 로이슈덴 공작이 만물상점의 단골이란 소문까지 사교계에 쭉 퍼질 터였다.
“하필 레이디 제인이라니. 내일부터 정신없겠네.”
“입이 가볍기로 소문이 자자하다죠? 주인님, 지금 당장 묘약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단골이란 소문이 돌 테니, 레이디들이 공작님 얼굴 한번 보겠다고 하루 종일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 것 아니에요. 거기다 묘약까지 덤으로 불티나게 팔릴 것이고요.”
세실은 돈을 벌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그래. 그게 좋겠어.”
로엔이 세실을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로엔은 진이 앉아 있던 의자에 시선을 줬다.
의외였다.
은둔자의 숲에서 그가 만물상점을 방문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직접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알렉을 시켜 공작저로 오라는 서신을 보낼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이.
로엔은 손등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아직까지 입술이 닿았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뒷목에 열이 올랐다.
“주인님, 뭐 하세요? 서둘러서 묘약을 만들어야 한다니까요.”
“어, 가.”
로엔은 서둘러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마치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닫듯이.
그러나 그건 헛수고일 뿐이었다.
만물상점 전체에 남아 있는 그의 체향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아차!
그러고 보니 계약서에 명시된 입맞춤은 세 번뿐이란 말을 하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입술이 아니라, 이마라 상관없는 건가?’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깐, 다행은 뭐가 다행이란 건지!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로엔은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역시 범죄였다. 금욕적인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이마에 입을 맞추다니.
위험했다. 그와의 입맞춤에 중독이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