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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6화 (27/201)

26화

진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녹색으로 칠해진 만물상점의 문을 응시했다.

초록색의 화려한 문이 적국의 기사라도 되는 듯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다.

“여기가 만물상점이란 말이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 거둬들인 게 벌써 세 번째다.

사실 섣불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만물상점의 건물이 너무 사랑스럽고 동화적인 데 있었다.

달콤한 설탕에 푹 절여진 것 같은 건물의 외관을 보자,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길 것 같았다.

“용케도 이런 달달한 건물을 만들었군.”

영 내키지 않아 진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노크했다.

똑똑!

나무문을 두드리는 청명한 소리가 여러 번 났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없나?”

진이 유리창 너머로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봤다.

인기척은 없지만 진열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로 봐선 사람이 있는 건 분명했다.

결국 진은 손으로 나무문을 밀며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망설였던 게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딸랑, 딸랑.

녹색 문에 매달린 종이 경쾌한 소릴 내며 방문객을 알렸다.

하지만 여전히 상점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게를 비워 두고 어딜 간 거야?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간도 크게.”

진은 마땅찮은 얼굴로 서선, 상점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다행히 꿀 떨어지게 생긴 건물의 외견과는 달리 내부는 단정했다.

타란 대륙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들이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없는 게 없다니. 거짓은 아니었군.”

안을 둘러보던 진의 눈에 낡은 책 하나가 들어왔다.

값비싼 물건인 듯 손이 닿는 부분을 가죽으로 덧대어 놓기까지 했다.

진의 시선이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을 따라 움직였다.

‘라딘의 서. 번외편이라.’

기분 나쁜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 진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서고엔 200년 전 제작된 라딘의 서 초판본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부록편과 번외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문엔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절판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곳 만물상점에선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진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씻은 듯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서 있는 로엔이 눈에 들어왔다.

“어, 공작님?”

당황한 로엔은 얼굴을 닦다 말고, 얼어붙은 듯 섰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아서…….”

그래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상점 안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지하에서 묘약을 만들다 작은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에요.”

“사고라고?”

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로엔을 살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묻은 검은 그을음과 드레스의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도.

“아, 묘약을 만들다가 망쳤거든요. 큰 사고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 돼요.”

진득하게 들러붙는 진의 시선을 의식하며 로엔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진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진이 마침내 입을 뗐다.

“별일 아니라니, 다행이야. 그런데 여기. 아직 닦이지 않은 곳이 있군.”

“아, 그런가요? 어디요?”

그의 지적에 로엔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에게 엉망이 된 모습을 들키자, 괜스레 민망했다.

“그러니까, 목 근처.”

진이 손 대신 턱으로 로엔의 목을 가리켰다.

“여기요?”

거울이 없는 탓에 로엔이 수건으로 오른쪽 목 주변을 닦았다.

“아니, 반대쪽.”

“아아, 네.”

로엔이 재빨리 왼쪽 목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거기기 아니라, 좀 더 옆으로.”

“여기요?”

로엔이 다시 수건으로 옆쪽을 닦았다. 자꾸 헛손질을 하자, 이를 지켜보던 진이 답답한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수건을 빼앗아 검은 얼룩이 묻은 목덜미를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그의 움직임이 몹시도 조심스럽다.

“어…….”

갑작스러운 진의 행동에 놀라 로엔은 숨을 삼켰다.

두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제 목덜미를 닦느라, 고갤 숙이고 있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의 머리카락에서 반듯한 이목구미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제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다 되었군.”

그의 손이 목덜미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갤 드는 그의 귓불이 유난히 붉었다.

그의 숨소리 역시도 조금 전과는 달리 거친 듯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그 역시 느낀 모양이다.

“흠흠!”

진이 헛기침을 하며 수건을 로엔에게 건넸다.

“사고라더니 불장난이라도 한 모양이군. 온몸에 그을음을 묻힌 걸 보니.”

가볍게 말을 건네는 진에 의해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실험실이 지하에 있어서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않거든요.”

“실험실까지 갖추고 있는 모양이지?”

“묘약을 비롯해, 간단한 마법 재품을 만들어서 팔고 있어요.”

다행이다. 우려와는 달리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로엔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궁금한데 구경할 수 있을까?”

뜻밖의 제안에 로엔은 잠시 망설였다.

“그게 조금 전, 작은 사고가 있어서 바닥이 엉망이라. 다음에 오시면 구경시켜 드릴게요.”

얼떨결에 다음 약속을 잡게 된 로엔이 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내를 유혹하는 게 아주 고단수군.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까지 기약하는 걸 보니.”

“싫으면 거절하셔도 되고요. 전 공작님이 꼭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제안한 것뿐이라.”

로엔이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진의 시선이 묘하게 차갑게 변했다. 제 말속에 그의 심기를 건드린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한 적 있나?”

다른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아니요. 아직까진 없었어요. 공작님이 실험실을 구경하신다면 최초가 되겠네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조금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뭐야? 이번엔 뭐가 그의 기분을 좋게 한 거지?

로엔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꼭 한 번 보고 싶군. 그 실험실이란 곳.”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열기를 품고 짙어져 있다.

금욕적인 분위기에 깃든 색기에 로엔의 뺨이 붉어졌다. 아랫배가 아릿하게 열을 품었다.

로엔은 낯선 감각에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평소보다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 환영이니 꼭 방문해 주세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이제야 그의 방문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계약서를 쓰러 왔다.”

“계약? 아아, 은둔자의 숲에서 얘기했던 그 계약 말이군요.”

로엔이 그제야 생각나는 듯 고갤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로엔이 진을 상점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때, 지하에서 청소를 다 끝낸 세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주인님, 다 치웠어요. 손님이 오신 모양이죠?”

“응. 세실, 차를 좀 준비해 주겠어?”

“네, 그럴게요. 그런데 누구……?”

세실이 걸레와 청소 도구를 내려놓으며 그제야 진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어, 로이슈덴 공작님?”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세실이 로엔과 진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얼굴이다.

“맞아. 그러니, 어서 가서 차를 준비해 와.”

세실이 진을 보곤 헛소리를 할 것 같아 재빨리 다과실로 등을 떠밀었다.

“아, 네. 얼른 준비할 게요.”

그러나 다과실의 문이 닫힐 때까지 세실은 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공작님. 버릇없는 아이는 아닌데,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아서. 아마 아침부터 쓸데없이 색기를 폴폴 뿌리고 계시는 공작님을 보곤 놀란 모양이에요.”

로엔이 가볍게 말하며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뭐가요?”

진의 물음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던 로엔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내가…… 그런 건가 해서.”

대체 뭘 묻고 싶은 건지.

잠깐, 설마…….

그제야 진이 묻는 말의 요점을 파악한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정말 순진하잖아? 색기라는 단어를 말하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평소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의 성격으로 봤을 때,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귀엽기까지 했다.

“아, 제가 공작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맞아.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지? 그냥 특별한 뜻은 없고. 호기심이라고 해 두지.”

진이 그 질문 하나 하는데 당황해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변명까지 덧붙이는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다.

로엔은 그의 시선을 피해 슬쩍 입가를 감쳐물었다.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다.

흠흠!

서둘러 목을 가다듬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훌륭한 외모라고 생각해요. 모르긴 해도 거리의 악사들에 의해 공작님의 외모를 찬양하는 시까지 지어진 걸로 알고 있거든요.”

“악사들이 나에 관한 노랠 만들어 부른다는 건가?”

“모르셨어요? 아, 모르셨겠네요. 공작님은 사교계 모임엔 참석하지 않으시니까요. 이제 전쟁터에서 돌아오셨으니 파티에 참석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곳에서 운명처럼 아름다운 레이디를 만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로엔이 앞에 놓인 의자를 진에게 권했다.

“게다가 아깝기도 하고요.”

“뭐가?”

“모처럼 신이 선물한 것 같은 조각 같은 얼굴을 썩히는 게요. 저택에만 계셔서 자주 뵐 수도 없고.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너도 내 얼굴이 자주 보고 싶은 모양이지?”

“당연하죠. 아름다운 건 자주 봐도 질리지 않거든요. 빼어난 예술작품처럼 곁에 두고 보고 싶을 정도라고요.”

로엔은 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진을 뒤로하고, 서랍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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