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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5화 (26/201)

25화

“좋아. 계약서를 작성해야겠군.”

진이 수긍한 듯 대답하곤,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이건 새로운 계약에 대한 내 호의다. 가져가.”

달빛이 투과된 유리병엔 보라색의 영롱한 구슬이 들어 있었다.

“공작새의 눈물이군요.”

“이것이 필요해서 온 것 아니었나?”

“네. 그랬죠.”

로엔은 진이 내민 유리병을 받아 들곤 달빛에 비춰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진이 입을 열었다.

“공작새의 눈물이 네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정화하는 데 효과가 있는 모양이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로엔이 고갤 끄덕이며 유리병을 소중하게 손에 쥐었다.

그리곤 진을 향해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시간이 늦어 이번에도 구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아주 잠깐 진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로엔이 이상해 그를 불렀다.

“공작님?”

로엔이 부르는 목소리에 진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입구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한 모양이군.”

“네. 혹시 지금이라도 약속 장소에 나가실 생각은 없으시겠죠?”

“없다. 그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그를 아르구스 절벽 아래서 만났을 때부터 품고 있던 질문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럼 왜 은둔자의 숲에 온 건지 물어도 될까요?”

로엔의 물음에 진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왜겠어? 너와 같은 이유지. 나도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확인할 것도 있고.”

“확인이라면…… 아.”

로엔의 뺨이 붉어졌다.

그 역시 랑케에서의 키스 이후 제 몸의 변화에 대해 느꼈을 테니 당연히 궁금했을 터다.

그 궁금증은 앞으로 하게 될 세 번의 키스 계약으로 풀렸을 테고.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입구에서 세실이 기다려서.”

로엔이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늦게까지 일하는군. 위험하지 않나?”

“아니요. 사실 평소엔 이렇게 외딴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하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이번만 예외적인 경우라.”

“그렇다니 다행이군.”

로엔이 그를 보았다. 마치 그가 저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럴 리 없지.’

어느새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숲의 입구를 향해 걷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려는 건가?

로엔은 그와 함께 걸으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저와 함께 돌아가는 것에 크게 괘념치 않은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은둔자의 숲 입구에 다다랐다.

“주인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입구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던 세실이 로엔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러다 뒤따라오던 진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누구……? 어, 혹시 로이슈덴 공작님? 입구가 아니라, 숲에 계셨던 건가요?”

세실이 놀라 묻자, 로엔이 어색하게 말했다.

“어, 그게…… 아르구스 절벽에서 만났어.”

“세상에나! 그럼 루시 님이 아니라 주인님을 만나러 숲에 오셨던 거군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로엔이 난처한 표정으로 진을 돌아보았다. 정작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몹시도 재미있는 눈치였다.

“공작님도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해서 오셨다고 했어. 그렇죠?”

로엔이 대답을 재촉하듯 진을 보자, 그가 고갤 끄덕였다.

“맞아.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해서 온 것뿐이다.”

“아, 아. 그랬군요. 우연이네요. 똑같은 게 필요했었다니.”

우연이라고 말하며 고갤 끄덕이고 있었지만, 진을 보는 세실의 표정은 전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 모습에 민망해진 건 오히려 로엔이었다.

“공작님, 저흰 그만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로엔이 진에게 인사를 건네곤, 세실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요? 같이 가는 것 아니었어요?”

“같이 가긴! 너 미쳤어?”

마지막 말은 세실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세실이 서둘러 진에게 허릴 숙였다.

“공작님,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집은 각자, 따로따로 가는 법이니까요.”

눈에 띌 정도로 세실의 표정이며 말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는 곳을 들키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이는 태도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로엔이 고갤 들자, 그가 픽 하고 웃는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심장함에 로엔은 괜스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만물상점이라고 했던가?”

“네.”

“조만간 들르도록 하지. 계약서를 새로 써야 하니까. 그럼.”

진이 먼저 자릴 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진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로엔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도 가자.”

그가 사라지자 급 피로가 몰려왔다. 로엔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세실은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인 표정을 하곤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말린 두꺼비 뒷다리 열 개, 사향 고양이의 수염 다섯 개를 마저 넣고.”

로엔은 필요한 재료를 끓고 있는 무쇠 냄비 안에 넣고 능숙하게 저었다.

“이제 공작새의 눈물만 넣으면 완성이네요. 공작새의 눈물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져올게요.”

옆에서 일을 돕던 세실의 말에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것 좀 보고 있어. 내가 얼른 가서 가져올게. 아마 찾기 힘들 거야.”

로엔이 들고 있던 유리 막대를 세실이게 건네며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심해.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걱정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눈 감고도 묘약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니까요.”

세실이 평소와 달리 유난스러울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경험상 이럴 때, 세실은 큰 사고를 쳤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조심해. 얼른 갔다 올 테니까.”

“다녀오세요. 대신 묘약을 다 만들고 나면 은둔자의 숲에서 공작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셔야 해요.”

“일은 무슨?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공작새의 눈물을 주신 게 다야.”

“네? 공작새의 눈물을 공작님이 주셨다고요? 주인님이 직접 받아 오신 것 아니셨어요?”

순간 아차 싶어,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이후, 꼬치꼬치 캐묻는 세실이 귀찮아 얼버무렸던 게 기억이 나서다.

“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냥 그렇게 됐어. 입구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좀 늦었거든.”

“그러니까, 공작님이 주인님을 대신해 공작새의 눈물을 받아 두었다가 주셨다는 말씀이신 거죠?”

“어, 그냥 우연히…….”

“공작님은 그날 루시 님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은둔자의 숲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공작새의 눈물까지 받아서 주인님에게 건넸죠. 그게 과연 우연일까요?”

세실이 속일 생각 말라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작님도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러니 받는 김에 내 것도 받아 주신 거지.”

“공작님이 그렇게 관대하신 분인 줄 몰랐네요. 그런데 지난번부터 궁금했는데. 공작님요, 다치시기라도 한 건가요?”

그러고 보니, 세실에겐 드래건의 심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

“전쟁터에서 5년이나 계셨잖아. 아직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가 있는 것 같았어. 두 달 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절벽 아래 폭포수에서 몸을 치료하던 중이었고.”

“그랬다면 납득이 되네요. 걱정이네요. 공작새의 눈물까지 드셔야 할 정도로 아프시다니. 얼른 회복되셔야 할 텐데.”

“그러게.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네.”

로엔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다행이다. 제 말을 믿는 눈치라서.

“아참,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주인님이 공작님에게 약을 만들어 주시는 건 어때요?”

“뭐, 약을?”

“네. 호감을 사는 데 이것만큼 좋은 기회도 없잖아요.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 좋은 생각인 것 같……. 어엇, 세실! 엎드려.”

로엔의 다급한 명령에 세실이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와 동시에 증류기 사이로 뜨거운 김이 새기 시작하더니, 끓고 있던 무쇠 솥의 뚜껑이 펑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엄마야!”

“이런 제길!”

순식간에 끓고 있던 재료들이 바닥으로 튀며 엉망이 되었다.

다행인 건 재료를 끓이기 전 주변에 설치해 놓은 보호 마법으로 인해 세실과 로엔은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콜록, 콜록!”

메케한 연기를 손으로 휘적휘적 저으며, 세실이 로엔에게 다가왔다.

“콜록, 콜록!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제대로 지켜봤어야 했는데.”

“괜찮아. 다치진 않았지?”

“보호막 때문에 살았어요. 하지만 바닥은 엉망이 되었네요. 귀한 재료들도 날아갔고요.”

“치우면 돼. 우선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야겠어.”

“제가 할게요. 주인님은 올라가셔서 세수라도 하세요. 얼굴과 옷이 엉망이에요. 이럴 때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큰일이잖아요.”

“알았어. 얼른 치우고 올라와. 묘약은 다음에 만들어야겠다.”

로엔이 더러워진 앞치마를 벗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직접 거울을 보지 않아도 검은 그을음이 얼굴에 잔뜩 묻어 있을 터다.

“얼굴부터 씻어야겠어.”

로엔은 상점 옆에 딸린 세면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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