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건 네가 그런 쪽으로 경험이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진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 공작님보단 많지 않겠어요? 이래 봬도 전 공작님보단 사교의 폭이 훨씬 넓거든요. 그리고 평민에겐 연애가 굉장히 개방적이기도 하고요.”
로엔이 그의 말에 수긍하듯 웃었다.
아마 그 역시 납득할 것이다.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로 그를 만나, 그를 유혹한다는 의미로 부채를 건네기까지 했으니까.
거기다 먼저 그에게 키스까지 했다.
진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저를 쏘아보았다. 뭔가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이상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잔혹한 사내가 제 앞에서는 순진하게 반응을 하는 게.
당황한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자, 묘한 정복욕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마치 제가 팜므파탈이라도 된 기분이다.
싫지 않아.
아니, 오히려 희열까지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더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를 뒤흔들고 싶다.
그와 뭔가 하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도권을 쥐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았을 타란 대륙의 최고의 기사이자, 아드리안의 부러지지 않는 검의 현신인 진 로이슈덴 공작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주물러 대고도 싶다.
‘내 발아래 무릎을 꿇으면 좋겠어. 내 것이 되었으면…….’
강한 열망이 또다시 그녀를 뒤흔들었다.
로엔은 조만간 에스터에게 연락해 저택으로 페이라스모스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 없이 세실에게 했던 약속이 지켜질 듯했다.
사내를 유혹하는 방법.
그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할 생각이다.
‘경험이 많다니……. 대체 몇 명이나 홀렸기에.’
진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몸을 떨며 달빛 아래 서 있는 시모네타를 응시했다.
시모네타가 말했던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내내 고민했다.
연서를 보냈다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레이디 따위, 처음부터 만날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어둡고 한적한 숲에서 저를 기다릴 누군가가 걱정이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진은 이미 은둔자의 숲에 있었다.
약속 장소인 숲의 입구가 아닌, 아르구스 절벽에 있던 건 최소한으로 남은 이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기다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하지만 그는 그믐밤, 자정에만 받을 수 있는 공작새의 눈물까지 알뜰히 챙겼다.
한 달 전 시모네타가 이곳에 공작새의 눈물을 받으러 왔던 게 생각이 나서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시모네타는 저를 보고 발칙한 말을 뱉어 낸다.
까졌다느니, 그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범죄라니.
그런데 미치고 팔딱 뛸 일은, 그 말이 결코 불쾌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시모네타는 랑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걸 감추기 위해 제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묘하게 흥미가 돋았다.
키스에 대해 그녀가 먼저 언급했다면 실망했을 테지만, 오히려 센 척하는 게 의외였다.
그래서 한번 지켜보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날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군.”
불쾌한 듯 낮게 으르렁거리자, 시모네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귀엽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다가도 상대의 눈치를 보며, 상황 파악을 하는 게.
맹수인 척하려 하고 있지만, 도도한 고양이 같다.
더 놀리고 싶어 얼굴을 시모네타가 있는 쪽으로 확 기울였다.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며.
“흡!”
시모네타가 놀라 눈을 홉떴다.
순식간에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눈앞에 다가오자 조금 놀란 듯했다.
청량하고 서늘한 숨결이 뺨에 닿았다.
두근!
예상치도 못한 심장이 뛴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그를 밀어내기 위해 시모네타가 재빨리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진의 입술 사이에 벽을 세웠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는 듯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손바닥에 그의 입술이 닿았던 것이다.
온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뭐 하려는 거죠?”
“뭘 하려는 걸로 보이지?”
“그야, 그러니까…….”
키스라는 말을 뱉기가 왜 이렇게 어색한 건지.
로엔은 머뭇거리다 다짜고짜 의문을 제기했다.
“공작님, 원래 여인에게 무심한 분 아니셨나요? 키스엔 관심도 없을 정도로 금욕적이라고 들었는데. 헛소문인 모양이네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로엔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쏘아보자, 진이 마땅찮은 얼굴로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네 말처럼 키스랑 상관도 없는 금욕적인 나를 충동질한 건 너였으니까. 이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첫 입맞춤을 가져갔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말 들어 보니, 굉장히 경험도 많은 것 같고. 개방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너와는 달리 난, 무지막지하게 보수적인 사람이거든.”
그의 비아냥거림에 로엔이 입술만 달싹였다.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건가?
아님, 놀리는 게 분명했다.
로엔은 조금 전 제가 겁도 없이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책임이라니, 무슨 책임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날, 공작님도 밀어내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지라는 거야. 싫었으면, 넌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거든.”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설마 잘못들은 건 아닐 테지?
로엔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진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시선을 맞받았다.
마음에 들었으니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잠깐,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당연히 그를 유혹해 손에 쥘 계획이긴 했다.
그런데 너무도 쉽게 그가 그녀의 손에 굴러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괜스레 꺼림칙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거야. 날 골탕 먹인다거나, 아니면…….’
로엔의 머릿속은 갑작스레 벌어진 전개로 복잡했다.
“의심할 것 없다. 다른 의도는 없으니까.”
“어떻게 믿죠? 두 번이나 제 목을 조르려고 했던 분을.”
로엔의 지적에 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아졌거든. 넌 아닌가?”
“어디가 아팠는데요? 정확히 말씀해 주셔야 알죠.”
“여기.”
진이 제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거긴 분명 드래건의 비늘이…….”
“맞아.”
대답과 함께 진의 손이 느릿느릿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새하얀 셔츠가 벌어지며,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순간 로엔의 뺨이 붉어졌다.
끌로 정교하게 다듬은 듯 아름다운 근육 위에 검은색의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다섯 개.
푸른빛이 도는 검은 비늘이 넷. 그리고 그중 하나는 색이 옅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처럼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피가 멈췄다. 다 돋아날 때까지 극심한 고통에 미쳐 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란 뜻 같다.
그 순간 로엔은 진이 하려는 말의 의도를 깨달았다.
“혹시 키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꼭 키스 때문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전부터 새 비늘이 돋아난 자리가 간질거렸으니까.
아마, 그녀를 이곳 아르구스 절벽에서 처음 본 날인 듯하다.
그날, 새 비늘이 돋아났다.
고통을 잊기 위해 폭포수 아래 몸을 맡겼다. 까마득한 고통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혼미한 의식 속에 또렷하게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비늘이 돋아나는 자리가 간질거렸다.
달랐다.
지금껏 드래건의 비늘이 돋아날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지독한 절망과 어둠뿐이던 머리가 맑았다. 턱 막혀 있던 숨통이, 아주 순간이었지만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건 사흘 전 랑케에서 그녀와 입을 맞춘 후로 고통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점이다.
“아프지 않거든. 그리고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너와 키스했다는 것뿐이니까.”
“아…….”
로엔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를 아는 모양이군.”
“당연히 알고 있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공작님의 저주에 대해 제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진 역시 기억했다.
“알고 있는 걸 말해 봐.”
“대가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가진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
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원하는 걸 줄 테니 대답부터 해.”
조급한 진의 목소리에 로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사람의 체액은 혈독화의 독을 정화시켜요. 그리고 그 반대로 혈독화를 품은 사람의 체액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고요.”
체액이라면…… 키스를 통해 얽혀 들었던 타액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효과가 있었다. 랑케에서 했던 그 키스가.
“우리가 서로의 독과 힘을 정화하고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뜻이군.”
‘우리’라는 말이 두 사람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놓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대감이 생겼다.
목을 조르고, 거래를 제안하던 타인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우리’라고 인정한 것이다.
“네. 맞아요.”
“이제 원하는 대가가 뭔지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제가 원하는 대가는 우리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 조건 없이 서로를 돕는 것이에요.”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외라는 듯이.
“네 말은 서로가 위험에 빠져 필요한 순간이 되었을 때, 입을 맞추자는 건가?”
“맞긴 한데, 매번 키스를 하자는 의미는 아니에요. 딱 세 번이면 되지 않을까요?”
필요할 때라는 조건은 너무도 애매했다.
또한 그와 제가 우리라는 테두리에 묶이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를 이용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를 너무 가까이 대해선 안 된다.
딱 세 번.
위험한 순간에 서로를 돕는 관계가 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