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달빛 한 점 없이 어둠에 잠식된 그믐의 밤이다.
로엔은 은둔자의 숲 입구에서 그린스버그 백작가의 영애인 루시가 오길 기다렸다.
조금 늦는 모양이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주인님, 그러지 말고 얼른 가 보세요. 공작새의 눈물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딱 자정까지라면서요. 늦으면 어떡해요.”
초조한 듯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로엔을 보며, 세실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절 뭘로 보시고. 당연히 괜찮죠. 그리고 곧 루시 님이 오실 거잖아요.”
세실의 말에 로엔이 어둠 속을 응시했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니겠지?
아님, 약속을 해 놓고 오지 않을 생각인 건가?
로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뢰인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다니,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만약 루시 님이 오지 않으면, 여기서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전 솔직히 루시 님이 나오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만에 하나 공작님이 나오시기라도 하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그리고 루시 님이 오면 넌 저기 바위 뒤에 숨어 있어. 네 말처럼 공작님이 나오셨을 때 방해하면 안 되니까.”
“걱정 마시라니까요. 얼른 가기나 하세요.”
로엔이 회중시계를 한 번 보곤, 세실에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은둔자의 숲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아르구스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시 님? 이제 오시는 건가요?”
세실의 목소리에 로엔이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루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해요. 외출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오셔서. 잠드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요.”
그리곤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루시가 뭘 찾는지 알아차린 세실이 재빨리 대답했다.
루시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약속 장소로 오는 내내 기대한 모양이다.
“약속 시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걸요. 자정까진 기다려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엔이 위로하듯 말하자, 루시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로엔은 마음은 무거워졌다.
뻔히 진이 오지 않을 걸 알고 있는데도, 루시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 같아서다.
“그래요, 루시 님. 자정까진 기다려 보셔야죠. 이렇게 나오셨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공작님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늦어지시는지도.”
세실의 말에 루시가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네. 그리고 주인님은 얼른 가 보세요. 더 늦기 전에.”
“어딜 가시는 건데요? 함께 기다려 주시는 것 아니셨나요?”
루시가 조금 불안한 듯 로엔을 본다. 붙잡고 싶은 눈치였다.
“아르구스의 절벽에 볼일이 있답니다. 그곳에 묘약을 만들 재료가 있기도 하고.”
“아, 그렇군요.”
“루시 님, 걱정 마세요. 자정까지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눈치 빠르게 세실이 덧붙이자, 루시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전…….”
로엔이 돌아서 가려 했지만, 누군가 발을 붙잡은 듯 멈춰 섰다.
그리곤 목에 두른 숄을 풀어 루시의 목에 감쌌다.
“어,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숲의 공기가 찹니다. 자정까지만 기다리세요, 루시 님. 오늘이 아니라도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루시의 갈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로엔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게 되었다.
루시 역시 진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단지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이 실망보다 더 커서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로엔은 평소와 달리 마음이 무겁다.
지금껏 연서를 전달한 후 연서를 받은 상대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이번처럼 저택을 방문했을 때, 연서를 받은 상대자가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왔다.
그러니 오늘 역시 유난스러운 날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언제나 상대에게 오롯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로엔은 자꾸만 누군가 발을 잡아끌 듯 걸음을 떼는 게 힘들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모네타 님. 이미 알고 왔고, 후회 하지 않아요. 기약 없는 기다림 역시 제 기쁨이니까요.”
루시는 의외로 강했다.
어쩌면 진을 이용하려는 자신보다 훨씬 그에게 어울리는 레이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을 수가 없다.
이기적이게도.
로엔에게도 그는 절박하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로엔은 루시를 향해 목례를 한 후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1시 30분.
로엔은 풀숲을 지나며, 로이슈덴 공작가의 응접실의 전경을 떠올렸다.
유리창에 비쳐 든 햇살 아래,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연서를 읽는 동안 그의 은청색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연서를 읽는 내내, 루시가 아니라 제가 그 편지를 보낸 당사자인 양 감정이 고양되기까지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갈 생각 없다고 말하던 그의 차가움에 안도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자, 들끓던 불안이 서서히 사라진다.
‘상인으로선 실격이네. 의뢰인을 먼저 생각하지 않다니.’
로엔은 다리에 들러붙는 죄책감을 밀어냈다. 그리곤 어둠 속을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집착하고 질척거리는 성격이었다니.”
그에 대한 급작스러운 소유욕 역시 지나쳤다.
사실 그녀의 것이 아닌 상황에서도 벌써 그를 제 것인 양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를 유혹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는데도 수줍게 웃던 루시를 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차피 그도 나올 생각 없다고 했어. 그러니 내가 이럴 필욘 없는 거야.”
로엔은 단호하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무엇보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은 제 저주 앞에선 사치다.
쐐기풀에 엉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던 무거운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졌다.
로엔은 서둘러 아르구스 절벽으로 향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절벽에 가까워지자 로엔은 숨을 죽였다.
적막과도 같은 고요가 찾아든 은둔자의 숲은 언제나 그렇듯 폭포수가 달빛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로엔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이런…….’
늦었다. 이미 회중시계의 바늘은 자정을 지나 있었다.
루시를 기다리느라 숲의 입구에서 너무 지체한 모양이다.
“왔군. 처음 본 날도 그러더니, 혹시 날 만나러 온 건 아니겠지?”
갑자기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로엔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젠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진 로이슈덴 공작이었다.
심장이 묘하게 소란스럽다.
그가 은둔자의 숲에 있다. 그것도 그들이 처음 만난 아르구스 절벽 아래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느낀 순간부터 입안이 바짝 말랐다.
긴장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른 후, 로엔은 천천히 고갤 들었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곧바로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로엔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착각은 자유라더니. 딱 공작님을 두고 한 말인가 보네요.”
다행이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로엔은 턱을 치켜들곤, 조금은 거만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작님이 여기 계시는지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오히려 공작님이 제가 이곳에 온다는 걸 알고 기다리신 게 아니라면 모를까.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지난번에도 같은 이유였고요.”
사실 그를 다시 본다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그리고 결론은 ‘뻔뻔해지자.’였다.
랑케에서 있었던 일 따위 그녀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것처럼 대범해질 계획이었다.
그러니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잘생겨 보이지?’
그믐달 특유의 빛바랜 빛을 받고 서 있는 그는 위험스러울 만큼 섹시했다.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차가운 미소는 심장에 나빴다.
무엇보다 그녀의 입술에 닿아 있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담고 있어서였다.
마치, 그날의 키스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의식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맞닿은 두 사람의 숨결과 부드러운 감촉만이 남았던 그 순간이.
그가 나에게 홀려 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한다.
냉혹하고 거만한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저에게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단순히 욕망뿐일지라도, 저에겐 다시없는 기회다.
놓쳐서는 안 될…….
“발랑 까져서는.”
“뭐?”
당황한 듯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뱉어 낸 말을 잘못 듣기라도 한 듯 믿기지 않은 얼굴이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로엔은 대범하게 웃었다. 그리곤 유혹하듯 나른하게 속삭였다.
“알고는 있나요? 그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범죄라는 걸.”
그러자 이번엔 그의 곧고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찌푸려졌다.
인상을 써도 잘생겼다.
긴장한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건 정말 놀라웠다. 정말 대범함을 넘어,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다는 거지?”
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주, 아주 야한 표정이요. 제가 공작님을 홀랑 잡아먹고 싶게 만드는 그런.”
로엔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고갤 들자,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곧바로 제 행동을 깨닫곤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입가에 냉소가 떠오르더니, 자존심이 상한 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주제에 내게 까졌다느니, 야하다느니…….”
“잠깐,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설마 절 어리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 테죠? 사교계엔 얼굴도 내밀지 않으시고, 전쟁터에서 5년이나 계셨던 분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네요.”
로엔이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진의 말을 잘랐다.
로엔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나른하게 뜬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색기가 어렸다.
그리곤 작정이라도 한 듯 붉은 혀를 내밀어, 유혹하듯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제길…….”
진은 욕설과도 같은 낮은 신음과 함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입가를 살풋 굳혔다.
목이 타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지금 날 보고 저러는 것 맞지?’
진의 눈빛이 그녀를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
이건 명백한…… 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