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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2화 (23/201)

22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그와 입술을 맞대며 괜찮다고 다독이던 로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순간의 제 행동을 미친 듯이 후회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타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제 우스운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대체 왜 거기서 그에게 키스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에스터와 헤어져 대기실을 나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눌러쓴 숄을 꽉 붙든 채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 다른 사람의 인영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제 눈앞에 나타난 이들이 진과 그 일행이란 걸 알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에스터의 말처럼 그가 저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수줍게 뺨을 붉힌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촉촉이 젖은 붉은 입술과 파들거리는 속눈썹이 어두운 복도를 밝히는 등불에 색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인이 명백한 의도를 품고 진에게 부채를 건넸다.

우습게도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떼어 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진이 여인에게 뿜어내는 관심은 살기뿐이었지만, 그런 시선조차 다른 이에게 닿는 게 싫었다.

‘내 거야.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어. 내 드래건이야.’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알지 못했다.

깨닫고 난 뒤엔 이미 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달래듯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삼키고 있었다.

에스터에게 했던 말을 철회해야 할 것 같다.

누구든 로이슈덴 공작을 유혹한다면 모든 게 이익이라고 했던 말을.

“왜일까? 왜 그런 마음이…….”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소유욕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눈빛 때문이야.’

저택으로 돌아온 그에게 연서를 읽어 주는 동안, 저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그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했다.

‘그리고 그의 미소 때문이야.’

그의 미소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었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얼굴이 붉어질 만큼 뜨거웠다.

그래서 이런 낯선 감정이 든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작용한 듯하다.

그래서 집착 같은 지독한 소유욕이 생긴 것이다.

“그래, 이거야. 그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켰기 때문에 집착하는 거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거고.”

그가 있어야만 록스버그의 저주를 풀 수 있다.

그러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를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

그리고 분명히 깨달았다.

그와 거래를 하는 동업의 관계가 아니라, 오늘처럼 남녀의 관계로 얽히게 된다면 상황이 그녀에게 더 유리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엠마와 세실의 말이 맞았어.”

남자가 여인에게 빠지면 여인의 발아래 무릎을 꿇는 것은 물론, 심장마저 내줄 만큼 맹목적이 된다고 했다.

그녀들의 말처럼 진이 그녀에게 맹목적이게 되기만 한다면…….

로엔은 생각을 멈추곤 흔들리는 마차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작정 그에게 키스를 한 순간.

“당연히 내 목을 조를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진은 그러지 않았다.

은둔자의 숲에서, 로이슈덴 공작가의 서재에서.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목을 졸랐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히려 허락도 없이 그의 입술을 훔친 그녀의 뻔뻔함에 화를 내야 했지만, 그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곤 당황한 듯 등을 돌리곤 가 버렸다.

로엔은 손끝으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제 입술에 닿던 말랑하고 부드럽던 감촉이 떠올랐다. 심장이 묘하게 간질거린다.

무엇보다 키스를 통해 삼킨 그의 체액으로 지독하게 날뛰던 몸속의 맹독이 잦아들었다.

그믐이 가까워질수록 참기 힘들었던 고통이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고서에 적힌 얘기가 사실이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의 체액이 맹독을 정화하는 특효약이라던.

“그를 유혹해야 할 이유가 생긴 거잖아.”

로엔은 혼자말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마치, 명분이 필요했던 것처럼.

끝없는 어둠을 달리던 마차는 어느새 록스버그 공작가에 닿아 있었다.

* * *

“괜찮으십니까?”

굳게 닫혀 있던 랑케의 지하의 문이 열렸다.

진과 함께 검투 시합을 보기 위해 내려가던 라우렐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넸다.

“안 괜찮을 게 있나?”

“없습니다.”

“없긴 뭐가 없어? 대장이 조금 전에 여자랑 입을 맞췄는데. 거기다 죽이지도 않았잖아. 평소라면 펄펄 뛰고 검으로 목을 확!”

뒤쫓아 오던 세이지가 손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전쟁터가 아니라 참았을 뿐이야. 군인이 아닌 여인을 죽일 수도 없었고.”

“지금 장난해, 대장? 다른 여자는 죽이려 목을 조르던 대장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리고 그 상인이란 여자의 목도 졸랐다며?”

세이지의 지적에 진의 미간이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전쟁터가 아니라서, 군인이 아닌 여인이라서, 라는 말은 다 개소리였다.

진에게 있어서 거슬리는 건 치워 버릴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조금 전처럼 그에게 키스를 했는데도 살아난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예외가 생긴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순간 정신이 나가 타고난 잔혹하고 냉정한 본성을 버렸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게 왜?”

“이상하잖아. 사내든 여인이든 몸에 닿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제 몸에 닿았던 손들을 검으로 잘라 버리는 대장이잖아. 그런데 조금 전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귀신을 속이지, 저를 속일 생각은 말라는 투다.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 거슬리니까.”

진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세이지를 쏘아보았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싸늘한 냉기에 세이지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제 주인이 아무리 그의 무례함을 넘어 방종한 태도를 모르는 척 넘어가 준다 해도, 선은 꼭 지켜야 했다.

“내가 잘못 봤나 봐. 내 눈이 드디어 썩었나 봐. 그러니 한 번만 봐줘. 다신 헛소리 안 할게, 대장.”

납작 꼬릴 내리며 순종하는 세이지를 보며, 진이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서늘한 냉기가 서서히 가셨다.

뒤를 따르던 라우렐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세이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기가 죽어 있던 세이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차리곤 라우렐에게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대장이 키스를 용납하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말이야.”

라우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분명한 건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건 사실이란 점이었다.

두 사람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진은 억지로 숨을 참았다.

사실 그 역시 의문이었다.

왜, 죽이지 않은 건지.

아니, 그것보다 왜 여자의 명령에 숙맥처럼 눈을 감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드래건의 비늘이 난 자리가 간질거렸다. 지독한 고통으로 피가 배어 나오던 자리가 더는 아프지 않다.

이유가 뭘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와아아아!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진은 서둘러 검투 시합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벌써 시합이 시작되었는지 검투장엔 두 명의 용병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공작님, 바실리입니다.”

“알아. 나도 봤다.”

진은 적당한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5년 동안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던 검은 기사단의 기사였다.

“곧 건국 기념일이니 아드리안의 귀족들이 랑케로 몰려들겠군요.”

진이 고갤 끄덕였다.

기회였다. 황제에 의해 해체된 검은 기사단을 다시 모을.

“은밀히 움직이도록 해. 특히 랑케의 주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랑케의 주인이 황제의 편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걸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하니까.”

진의 시선이 벤투스에게도 향했다.

랑케의 지하에서 검투 시합이 열릴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을 때, 은밀히 검은 기사단을 모을 기회라 여겼다.

아드리안 제국의 모든 귀족가가 그러하듯 로이슈덴 공작가 역시 황실에서 진행하는 검투 시합에 무조건 참가해야 했으니까.

“라우렐, 랑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특히 벤투스 저자가 누구의 사람인지.”

“알겠습니다, 공작님.”

진은 시합을 보는 내내 시모네타를 떠올렸다.

시모네타는 칼라일에서 작은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상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로 이곳에 있었다.

‘설마……? 아니, 그녀가 페이라스모스일 리 없어.’

무희들과 함께 공연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페이라스모스는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랑케의 주인인 벤투스가 시모네타를 바라보는 눈빛을 읽었다.

그건 고용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약간의 우려가 어린 시선엔 뭔가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랑케의 주인과 만물상점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라니.

‘대체 어떤 관계인 거지?’

진의 시모네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사흘 후, 은둔자의 숲이라고 했던가?’

진은 시모네타가 연서를 읊던 목소리를 떠올랐다. 그리고 입술에 닿던 말랑하고 부드럽던 감촉도.

진은 무의식적으로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낙인이라도 찍힌 듯 입술이 뜨겁다.

정말 미쳤나 보다.

세이지의 말처럼, 이상했다. 한 번 오른 열이 사라지지 않는걸 보면.

묘한 갈증이 몸속에서 날뛴다.

전쟁터에서 종종 느꼈던 살육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휘몰아치는 강도는 같다.

‘죽일까? 아니, 죽여야겠다.’

진은 낯선 감각을 물리치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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