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로엔의 반응에 그제야 에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 마세요, 주인님. 무엇보다 공작님께서 직접 부채를 받은 분은 주인님뿐이니까요.”
에스터의 말에 로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페이라스모스에게 받은 부채는 거절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돌려주지 않는다.’ 그건 랑케의 불문율 아니었어?”
“그렇긴 하죠.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랑케에 방문하신 로이슈덴 공작님은 그런 규칙 같은 건 모르시는 눈치였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오늘 무대에서 공연한 무희들은 물론 페이라스모스들이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접근해 부채를 건넨 모양이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어?”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에스터에게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단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뿐만 아니라 아드리안 제국의 레이디들 중 대부분이 진 로이슈덴의 외모에 흠뻑 빠져 있었으니까.
기분이 별로였다.
마치 제 것을 누군가 탐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제 것이라니.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 거절당한 모양이에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그 자리에서 부채를 모두 돌려주었거든요.”
“부채를 돌려줬다고?”
“네. 중간에 옆에 계시던 신사분이 랑케의 규칙에 대해 알려 준 모양이지만, 결과는 똑같았던 것 같고요. 한마디로 공작님 손에 들린 부채는 주인님의 것만 남은 거죠.”
“아…….”
귓불이 뜨거웠다.
그가 제 것만 받았다는 말에 우습게도 불쾌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이건 분명 공작님이 주인님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뭐겠어요.”
에스터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당혹감에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로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난 그만 가 봐야겠어. 너무 늦었거든.”
“지금 가시게요? 공작님을 기다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에스터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따라 일어섰다.
“너무 늦었어. 이제 돌아가야 해.”
“하지만 아직 공작님이 부채를 돌려주러 오시지 않은걸요. 제 생각엔 기다렸다가…….”
“아니, 오늘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혹시, 이게 소위 말하는 밀고 당기는 거죠? 상대를 애가 닳게 만들려는 일종의 기술이요.”
사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갖고 진을 만나, 냉정하게 그를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다.
무엇보다 피곤하기도 했다.
로엔이 서둘러 외투를 입었다.
대기실을 나서기 전, 만에 하나 랑케를 방문한 귀족들과 마주칠 경우를 대비해 숄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다 가리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대기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돌아보았다.
“에스터, 만약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갈게.”
로엔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온 에스터의 비밀스러운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공작님이 부채를 들고 찾아오시면 잘 받아 둘게요. 다음 약속도 정해 놓을까요?”
에스터에게 제 생각을 읽힌 모양이다.
“아니, 다음 약속은 잡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 에스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 에스터를 뒤로하고 로엔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찾아든 낯선 감정이 자꾸만 심장에 들러붙어 저를 흔들었다.
* * *
“대장, 지금 갈 거지? 가자! 당장, 가자.”
잔뜩 들뜬 표정의 세이지가 진의 팔을 끌었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부채를 받았으니 당연히 돌려주러 가야지. 대장도 완전 홀딱 빠져서 대놓고 쳐다본 것 아니었어?”
세이지의 놀림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이지.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내가 부채를 받은 이유는…….”
“오해는 무슨 오해. 남자랑 여자랑 눈이 맞았고, 이걸 증표로 건넸으면 끝인 거지. 라우렐 말 들어 보니까, 랑케에선 이게 바로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초대장이던데.”
세이지의 지적에 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부채를 받는 행위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건 알지도 못했다.
“만약 그런 뜻인지 알았다면 받은 즉시 돌려줬을 거야.”
“지금 장난해? 다른 여인들이 주는 부채는 매몰차게 거절했잖아. 바닥에 던지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무안해하던지.”
세이지가 그때 일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든다.
“내 말은 그러니까……. 아무튼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정작 부채를 손에 쥔 진의 표정이 복잡했다.
어떤 의미로 시모네타가 이 부채를 건넸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초대는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일 터다.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묘하게 심장이 술렁거리는 이유를 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진이 한숨을 내쉬곤 세이지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세이지,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지만 사정이 좀…….”
“뭐야? 지금 그 페이라스모스랑 비밀이라도 생겼다는 거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진은 뭔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모네타가 제가 말한 상인이란 걸 말한다면, 그 전에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지도 말해야 했다.
그랬다간 세이지가 집요하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물어 올 게 분명했다.
“저기!”
그때, 비음 섞인 여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뒤에 서 있는 여인 쪽으로 움직였다.
본의 아니게 세 남자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된 여인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진은 여인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두운 복도의 불빛을 받고 서 있는 여인의 새하얀 어깨며 풍만한 가슴이 유혹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 역시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인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진의 차가운 목소리에 여인의 표정이 두려운 듯 살짝 굳어졌다. 입가에 어렸던 미소 역시 얼어붙었다.
“대장, 왜 또 그래? 아름다운 레이디가 무서워하잖아.”
세이지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지만, 진의 태도는 여전히 싸늘했다.
“할 말 없으면 꺼져.”
성질 더러운 것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급기야 여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는 그러니까, 공작님에게 부채를 드리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부채 따위 원한 적 없으니, 가지고 당장 사라져.”
“대장, 너무하는 것…….”
세이지가 또다시 끼어들려 하자, 라우렐이 그의 팔을 붙잡곤 옆으로 끌어당겼다.
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다.
그제야 세이지 역시 진의 살벌한 분위기를 읽은 듯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평소엔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세이지였지만, 본능적으로 빠져야 시점은 귀신같이 알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공작님, 랑케에 처음 오셔서 제가 누군지 모르시는 모양인데, 제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할지도 몰라요. 다음번엔 공작님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무슨 자신감인지 여인은 턱을 치켜들곤 거만하게 부채를 내밀었다.
여인의 건방진 태도에 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세이지와 라우렐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 여인을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다음번엔 경고조차 없을 테니까.”
진의 야멸찬 태도에 여인은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공작님은 제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귀족들이 제 부채를 받기 위해서 얼마나…… 헉!”
목을 조르는 힘에 여인이 거친 숨을 뱉어 냈다.
갑작스러운 공포와 함께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을 한 여인이 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말했을 텐데. 두 번의 경고는 없다고.”
가느다란 목을 꺾어 버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우렐과 세이지는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난처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진이 뿜어내는 서늘한 냉기와 짙은 살기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또 죽일 작정인가요?”
그때, 어두운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여인의 목을 쥐고 있는 진의 손을 로엔이 붙잡았다.
당황한 진은 로엔을 돌아보았다.
머리에 쓴 숄 사이로 화장기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
“날 보러 오던 것 아니었나요? 그럼 이분은 놓아줘요. 살인은 근본적으로 싫어하거든요.”
로엔이 여인의 목에서 진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진의 손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털썩하고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로엔은 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부채를 들고 왔으니 보상을 해야겠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엔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발끝을 들어 놀라 벌어진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서로의 숨결이 진하게 엉겨 붙었다.
입술이 닿자, 당황한 듯 얼어붙어 있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 좀 감아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타박하는 목소리에 놀란 듯 로엔을 내려다보고 있던 진의 눈꺼풀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의외로 말을 잘 듣네. 당연히 내 목을 조를 줄 알았는데…….’
로엔은 눈을 감은 진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제 심장에 들러붙던 불쾌한 감정이 사라진다.
그리고 제 말에 순종하는 그의 모습에 묘하게 만족감을 느꼈다.
로엔은 다시 입술을 겹치곤 그의 숨결을 삼켰다.
미쳤다.
절대 저질러선 안 될 일을 스스로 벌이다니. 후회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하지만…….
‘될 대로 되라지.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입술을 삼킨 온기가 뜨겁다,
손에 닿는 그의 심장이 무거운 속도로 뛴다.
살아 있다는 증거.
거부하지 않는 몸짓.
그게 이렇게 위로가 되다니. 기쁘다니.
그동안 온기가 그리웠나 보다, 하고 로엔은 생각했다.
괜찮지 않을까? 아주 잠깐,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는 거니까.
이 순간이 지나면 지독한 운명에 삼켜질 테니 지금은 이렇게 있고 싶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로엔은 망설이며 팔랑이던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망막에 맺혔던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다.
다행이다. 두려운 어둠뿐일 줄 알았는데, 콧속으로 진의 청량하고 기분 좋은 따뜻함이 스민다.
그렇게 어두운 랑케의 복도에서 로엔은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에게 키스를 했다.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