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로엔은 대담한 표정으로 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곤 유혹하듯 치맛자락을 들어 가느다란 발목을 드러냈다.
레이스 속옷 사이로 드러난 발목이 무척이나 선정적이었다.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로엔은 그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진에게 쏠려 있었다.
함께 공연하는 무희들처럼 로엔의 춤은 노골적이진 않았다.
타고난 우아함과 오랜 교육을 통한 절제된 몸짓은 오히려 남자들의 정복욕을 건드렸다.
그래서 더 관능적이었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퇴폐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로엔은 심각했다.
‘왜 반응이 없지? 좀 더 노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건가? 아님,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건가?’
그녀를 바라보는 진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표정 역시 무감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음악과 춤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지만 진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
이제 공연히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낼 순 없다.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걸어야 했다.
로엔이 우아한 몸짓으로 대범하게 천천히 무대를 내려왔다.
함께 공연을 하던 무희들은 로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능숙하게 그녀를 따라 무대를 내려왔다.
다행이었다. 로엔은 공연을 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의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얽혀 들었다.
로엔은 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들고 있던 부채로 나른하게 바람을 일으켰다.
투명하리만치 얇고 매끄러운 천이 흔들리며 그를 유혹했다.
로엔에게서 나는 달콤한 체향이 마법처럼 진을 감쌌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에 오히려 라우렐과 세이지가 얼굴을 붉히곤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로엔의 시선이 끈적끈적한 감정을 담고 진의 얼굴과 탄탄한 몸을 훑어 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성적 긴장감이 정점에 도달한 순간, 툭! 소리와 함께 로엔은 들고 있던 부채를 진의 손에 떨어뜨렸다.
귀족들의 입이서 나른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랑케에 있는 귀족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페이라스모스가 밤을 보내길 원하는 상대를 선택했다는 걸.
안타까움과 부러움이 혼재된 시선이 진에게 향했다.
진은 손에 놓인 부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른 채, 앞에 서 있는 로엔을 바라보았다.
가면 아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입술과 달콤한 체향이 싫지 않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끈적하게 들러붙던 여인들의 시선에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의 노골적인 눈빛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정 난 짐승들처럼 그녀의 드러난 가녀린 목덜미와 얼굴을 핥는 귀족들의 시선에 화가 났다.
“왜……?”
뭔가 말하려는 순간, 음악이 끝났다.
그리고 마법이 끝나기라도 한 듯 눈앞에 서 있던 로엔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곤 멀어져 갔다.
은은하게 비추는 샹들리에 불빛에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너울거렸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절제된 몸짓에 진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저를 보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미쳤군. 미쳤어!’
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시모네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손에 쥐어진 부채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 * *
똑똑!
“벤투스입니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떨어지자, 벤투스가 문을 열고 랑케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희 옷을 벗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로엔이 에스터를 향해 고갤 끄덕이자 에스터는 익숙한 일은 듯 옆으로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벤투스의 조급한 물음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평소의 여유로움을 잃은 벤투스는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조금 전 공연에서 보였던 제 돌발 행위를 두고 걱정이 앞서는 모앙이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럴 것 없어, 벤투스. 무희로 무대에 섰을 때부터 계획하고 움직인 것이니까.”
다 거짓은 아니었다.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와 함께 무대에 섰을 때만 해도 진을 유혹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더욱이 부채를 건넬 생각도.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망설이던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충동적인 결정은 맞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로엔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벤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그리곤 물끄러미 눈앞에 앉아 있는 로엔을 응시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경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뭔가 낯선 깨달음에 멍한 눈빛인 것 같기도 했다.
“넌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군.”
“아닙니다. 제가 우려하는 건 로이슈덴 공작입니다. 들리는 소문으론 황제께서 그를 탐탁잖게 여기는 듯해서.”
벤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열 살의 어린 나이로 랑케의 주인이 된 그녀였다.
처음엔 얼굴과 몸에 흉터로 가득했었다.
혈독화로 인해 몸의 상처는 사라졌지만, 평생 괴물이란 소문을 품고 살아가야 했다.
슬픔과 가문의 저주를 등에 업고 묵묵히 앉아 있는 제 어린 주인을 벤투스는 동정했다.
200년 가까이 록스버그 공작가를 모셔 온 가신이었기에 로엔에게 복종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벤투스는 로엔이 역대 록스버그 공작가의 주인들 중 가장 현명하고 이성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 덕분에 랑케는 지금껏 건제할 수 있었다.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주인이지만, 만약 사랑에 눈이 멀게 된다면…….’
그래도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혹시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제가 움직여 볼까요?”
벤투스가 로엔의 의중을 떠보려는 듯 평소엔 하지도 않을 질문을 했다.
분명 제 의도를 알았을 텐데 로엔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내 어떤 행동이 그대에게 오해를 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부채를 준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오해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아 무례를 범했습니다.”
“벤투스, 아직 그대에게 말하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있어. 때가 되면 말하겠지만 지금은 날 믿고 기다려 줘.”
벤투스가 고갤 들어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로엔이 무대를 내려와 진 로이슈덴 공작과 마주했을 때의 광경으로 가득했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로이슈덴 공작은 위험한 자입니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주인님도 위험해질 수 있고요.”
로엔 역시 벤투스의 생각에 동의했다.
특히 진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는 반역자로 몰려 처형될 터였다.
“내게 생각이 있어. 대신 최근 들어 황제와 접촉하기 시작한 귀족들이 있는지 알아봐.”
“제가 좀 더 중점적으로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오늘 랑케에서 열릴 검투 시합에 참가한 용병들이 어떤 가문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빠짐없이 조사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검투 시합에 참가하는 용병들의 명단 역시 세세하게 작성해 놓고.”
“혹시 주인님은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혹시…….”
반역.
“제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가능성은 항상 열어 두고 있는 편이지. 거기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내 암살 시도의 뒷배 역시 꼭 알아내야 해.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거든.”
벤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제 주인이 걱정하는 것이 정말 반역이라면, 사안이 너무도 심각했다.
“그러니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할 거야.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라이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주인님이 명하신 일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는 모양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돌아와서 직접 보고한다고 했고요.”
“언제 돌아오지?”
“지금 게르피온에 있으니, 적어도 2주 후엔 도착할 겁니다.”
“라이칸이 돌아오는 즉시 바로 연락해 줘.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알겠습니다.”
벤투스가 대기실을 나가자, 물건을 정리 중이던 에스터가 다가왔다.
“이제 눈 감으세요. 화장을 지워 드릴게요.”
로엔이 눈을 감고는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화장 솜이 얼굴에 닿았다. 솜에 아로마 향을 섞었는지 팽팽하게 날이 섰던 신경이 점차 누그러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뺨에 닿는 에스터의 시선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재고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 가요? 함께 공연을 했던 무희들 말론, 주인님과 공작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고 들었거든요.”
에스터의 물음에 로엔은 조금 전과는 다른 반응을 했다.
“사실 생각 중이야. 그와 어떻게 할지. 에스터, 만약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날 도와줄 수 있겠어?”
“걱정 마세요. 사내를 유혹하는 방법을 저만큼 많이 아는 이는 없을 테니까요.”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은 아니야. 뭔가 확실히 결정이 되면 말할게.”
“네. 언제든 제가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하지만 그전에 페이라스모스들에게 분명히 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뭘?”
“사실 페이라스모스들 중에서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홀딱 빠진 애들이 좀 있거든요.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공작님에게 접근하는 애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상관없어. 능력껏 유혹해도 좋다고 해. 누구든 로이슈덴 공작을 손에 넣는다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니까.”
“진심이세요?”
되묻는 에스터의 표정에 로엔의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괜찮지. 말했잖아. 누구든 그에게 정보를…….”
“불쾌하지 않으세요? 소유욕 같은 게 생기지도 않고요?”
‘누구에게?’라고 물으려다, 로엔은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에스터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묻는 순간, 불쾌감과 낯선 소유욕이 치밀어 올라서다.
당혹스러웠다. 갑작스레 밀려든 감정에 어이가 없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감정이 내 안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가?
당장 아니라고, 그런 감정을 내가 느낄 리 있겠냐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