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9화 (20/201)

19화

“불쾌하군.”

씹어 삼키듯 저를 향해 날아드는 끈적끈적한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대장, 진심이야? 여기가 근질근질한다거나, 온몸이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정말 싫은 거냐고.”

세이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뱀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기분 나빠.”

진의 단호한 말투에 세이지뿐만 아니라, 라우렐 역시 조금 놀란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 봐, 대장. 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인들이 대장을 쳐다보면 다 그런 느낌만 들었어?”

세이지의 물음에 진이 심각한 표정을 했다.

특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변명하자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살아남은 후로 그 비밀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으니까.

간혹 제 외모에 넋이 나가 홀린 듯 바라보는 레이디들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들끓게 하는 건 짙은 피 냄새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지독한 살인 욕구였다.

“딱히 없는 것 같군.”

“진짜?”

“그게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할 만큼 이상한 일인가?”

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당연히 심각한 일이지. 사내가 여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다니. 정말 남자긴 한 거야?”

세이지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정말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대장,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정말 눈곱만큼도 관심이 가는 여인이 없어? 웃는 게 생각이 난다거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여기가 간지럽다거나. 그런 것 있잖아.”

세이지가 제 심장을 손으로 문지르며 잘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웃는 모습이 생각이 난다라?

그러자 그를 쏘아보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두려움에 떨며 턱을 치켜들던 당돌한 표정도.

“웃는 건 아닌데, 날 보며 화를 낸 사람은 있었던 것 같군.”

진이 평소와 달리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라우렐과 세이지의 시선이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누군데? 왜 대장한테 화를 냈는데?”

“내가 목을 졸랐거든.”

“뭐? 지금 잘해 준 것도 아니고, 여자 목을 졸랐다는 거야?”

세이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릴 질렀다.

순간 세이지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위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향했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라우렐의 경고에 세이지가 고갤 끄덕이며, 몸을 진 쪽으로 바짝 수그렸다.

“미쳤어? 왜 여자 목을 조른 건데? 전쟁터도 아니고. 그러면 여자들이 싫어한다고. 쯧쯧, 이제 결혼은커녕 연애도 글렀군. 끝났다고.”

“결혼도 연애도 관심 없어.”

“관심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대장한테 누가 신문으로 공개 구혼도 했다며.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그 레이디를 붙잡는 건 어때? 결혼해! 집안도 좋고 돈도 많다던데. 망설일 이유가 뭐 있어? 얼른 잡아야지.”

세이지는 두 번 고민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라우렐이 그런 세이지를 보며,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개 구혼을 한 록스버그 공작에 대해 잘 모르는 세이지에겐 정말 속 편한 소리였다.

“아니면 자꾸 생각난다는 그 레이디에 대해 말해 보든가. 이름은 알아? 목을 졸랐는데도 대장이 좋대? 그만 뜸들이고 얼른 얘기 좀 해 봐. 그래야 내가 조언이라도 해 줄 것 아냐.”

세이지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조언이라니. 마치 진이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 진은 짜증이 났다.

왜 세이지와 라우렐에게 이런 얘길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냉정하게 내치지 못했다.

저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모네타를 본 순간 느껴지던 안도감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연서를 읊던 달콤한 목소리며, 살짝 붉어진 뺨. 그리고 편지를 달라고 했을 때, 찻물을 편지에 부어 버리던 행동까지.

묘하게 그녀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심장을 간질였다.

진은 한숨을 내쉬며,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시모네타. 이름은 시모네타라고 했어.”

그게 정확한 이름인지 확실할 순 없다. 신분을 숨기고 있으니, 분명 또 다른 이름이 있을 터다.

문득 그 사실이 화가 났다.

생각해 보니, 시모네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몸에 맹독이 흐르는 금기마법의 저주를 가졌다는 것과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귀족이야? 어느 가문의 레이디인데?”

“상인이야.”

“상인? 그럼 평민인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

세이지가 진이 아니라 라우렐 쪽으로 고갤 돌렸다.

무지한 세이지조차도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다.

“어, 그게. 그렇지.”

라우렐은 세이지가 묻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진의 눈치를 살피며 얼버무렸다.

“누가 결혼한대? 그냥 네가 물으니까 생각나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을 뱉어 내던 진이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곤 홀린 듯 무대 쪽으로 고갤 돌리더니, 못 박힌 듯 무대에 서 있는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우렐과 세이지 역시 무대로 고갤 돌렸다.

“뭐야? 또 공연을 하려는 모양이네.”

무대 위엔 세 명의 무희가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화려한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야. 대장 취향이 저런 쪽이었어?”

조금 전의 무미건조했던 눈빛과는 달리,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진을 보며 세이지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진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누가? 누가 있는데?”

진은 세이지의 질문을 무시했다.

목이 탔다. 진은 서둘러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가면 사이로 보이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머릿속에 각인된 듯 사라지지 않는다.

알코올 때문인지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달뜨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누군가 술에 약이라도 탄 모양이다.

진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갈증을 달래기 위해 연거푸 술을 마셨다.

* * *

로엔은 긴장으로 바짝 얼어 있었다.

랑케의 주인인 벤투스가 무대 아래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로엔은 그나마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화려하게 화장을 해 얼굴을 감추긴 했지만 그것으론 완벽하지 않았다.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에 온 적이 있는 귀족이라면 분명 그녀를 알아볼 터였다.

‘너무 무모했나?’

로엔은 벤투스가 알려 준 대로 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줬다.

그와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얘길 나누는 자들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라우렐과 부단장 세이지였다.

검은 기사단이기도 했던.

‘반역을 일으키려는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심각해?’

무대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진의 시선을 어떻게 사로잡을까 고민이 됐다. 초조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로엔은 음악에 맞춰 무희들과 몸을 움직였다.

사실 랑케에 페이라스모스를 만든 건 로엔의 생각이었다.

남성 전용 사교 클럽의 특성상 술과 여인은 필수불가결했다.

무엇보다 정보를 사고파는 랑케에서 페이라스모스는 무희나 고급 창부가 아니라, 유용한 정보원이었다.

페이라스모스들은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에 비해 쉽게 정보를 얻었다.

거기다 원치 않으면 손님을 거부할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해 주자, 페이라스모스들은 랑케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로엔은 작게나마 하찮다고 여겨지는 그들의 삶이 평온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대부분 이뤄졌다.

로엔은 나른한 선율에 맞춰 춤을 추며 귀족들을 꼼꼼히 살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경계심을 한껏 낮춘 채 그들을 관찰하는 방법엔 이만한 게 없단 생각이 들었다.

‘에스터에게 춤을 배워 두길 잘했어.’

에스터는 벤투스의 여동생이자, 페이라스모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랑케에 들어오는 페이라스모스들에게 정보원으로서 훈련을 시키는 것 역시 에스터의 몫이었다.

‘이게 잘한 건지 모르겠네.’

로엔이 페이라스모스들 사이에 껴 공연을 하겠다는 충동적인 결정을 한 이유는 바로, 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자 제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로엔은 가면 너머, 진을 응시했다.

무대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얘길 나누던 진이,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고갤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 사람이 시선이 맞닿았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가 나란 걸 알았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지더니, 이내 가늘어졌다.

어떻게 안 걸까?

짙은 화장에 가면까지 쓴 상태로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무희와 만물상점의 주인을 동일인물로 연결하긴 쉽지 않다.

그런데 진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이다.

“너무 허술했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에스터나 벤투스가 절대 알아볼 리 없다고 확신했으니까.

그가 예리한 것뿐이었다.

로엔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진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치 그녀에게 홀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내가 뭔가 말을 건네는 게 보였지만, 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묘하게 긴장이 됐다.

페이라스모스의 춤은 남자를 유혹하는 게 목적이라 굉장히 관능적이었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까지 노골적일 만큼 선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로엔은 한 번도 그걸 의식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진의 시선이 닿자, 모든 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의 입꼬리가 냉소로 비틀리는 게 보였다.

순간 당혹스러운 감정을 헤집고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질 수 없다. 그녀를 비웃으며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바라보는 그의 도발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잘만 하면 그를 유혹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만 되면 그를 뒤흔들 유일한 기회가 될 테고.’

로엔은 천천히 부채를 내리며,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망설이며 물러설 것 같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