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드윈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전쟁도 끝난 마당에 용병들을 불러들여서 뭘 하려는 건지.’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로이슈덴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반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지하 세계의 파수꾼처럼 문 앞을 지키던 자가 옆으로 물러섰다.
이내 문이 열리고 랑케의 화려한 외관이 속살을 드러냈다.
“세상에나!”
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세이지가 홀린 듯 랑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입 좀 다물어. 그러다 벌레 들어가겠다.”
라우렐의 지적에 세이지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지하로 갈까요?”
“아니, 우선은 이곳에 머무는 게 좋겠다. 시합이 시작되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기도 하고.”
진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갤 끄덕였다.
적당한 자릴 찾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그들 앞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랑케의 주인 벤투스입니다. 로이슈덴 공작님을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벤투스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를 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가 알은체를 하자, 경계심부터 들었다.
“공작님께선 저를 알지 못하시겠지만, 반대로 아드리안 제국에선 공작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일개 상인이 저도 굉장히 만나 뵙고 싶었을 정도니까요.”
벤투스가 그를 반기는 이유가 비단 진이 정복전쟁을 승리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진이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랑케 안의 귀족들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분명 사교계를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랑케에 나타났으니, 그 진위 여부가 궁금한 듯했다.
“이미 전쟁은 끝났지. 내 손엔 검이 없고.”
아무리 원치 않은 스캔들 상대라도 검을 들어 그 가문을 멸문하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행히 벤투스는 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은 듯 허릴 굽혔다.
“그렇죠. 고귀한 레이디의 구혼에 피로 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공작님, 오늘은 제가 공작님을 모시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것보다 내가 뭘 원하는지, 그대가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진의 차가운 물음에 벤투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랑케를 둘러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지하의 문은 은어로 검투 시합의 시작을 의미했다.
진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진은 벤투스의 제안에 고갤 끄덕였다.
그 후 벤투스는 랑케의 구석구석을 진에게 안내했다.
귀족들이 즐겨 찾는 카드 룸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보원을 만날 수 있는 밀실에 이르기까지.
주인의 안내가 아니면 살펴볼 수 없는 은밀한 곳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지하의 문은 자정에 열릴 겁니다. 그 전까지 이곳에서 느긋하게 공연을 즐기시면 됩니다. 간단한 음료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진 일행을 랑케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테이블로 안내한 뒤 벤투스가 자릴 뜨려 했다.
“벤투스, 물어볼 게 있다.”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내게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진의 서늘한 눈빛에 벤투스는 고민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음을 정한 모양인지 솔직하게 대답했다.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 호의에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부탁을 한 사람이 누군지 말해 주진 않겠군.”
“랑케의 후원자 중 한 분이란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공작님.”
벤투스가 다시 허릴 숙여 인사를 한 후, 자릴 떴다.
“누군지 짐작되는 분은 없으십니까?”
“없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분도 없으시고요?”
“5년 동안 전쟁터에 있었다. 돌아오고도 사교계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고. 그런 내게 개인적 친분이 있을 리 없잖아.”
“그렇긴 하죠.”
“잠깐, 그러니까 한마디로 대장은 친구도 없다는 거야?”
진과 라우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지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는 넌 있고?”
라우렐의 지적에 세이지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나야 당연히 없지. 내 성격이 워낙에 지랄 맞아서 친구가 있으면 이상한 거고. 하지만 대장은 귀족이잖아. 그것도 아드리안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굉장한. 아냐?”
“친구 따위 필요 없다. 혼자가 편해. 거치적거리는 건 딱 질색이기도 하고.”
“역시 대장은 한 마리 고독한 맹수라니까.”
세이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다.
진은 말없이 시선을 들어 랑케 안을 살폈다.
이곳에 들어온 후 끈질기게 따라붙는 귀족들의 시선이 짜증이 났다.
‘질릴 정도로 쳐다보는군.’
진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어렸을 땐 제가 품은 비밀을 들킬까 사람들을 멀리했지만, 지금은 다 귀찮았다.
무엇보다 귀족들과 정치적 알력으로 얽히는 게 가장 싫었다.
하지만 그의 계승 서열이 황제 다음인 이상,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쏟아지는 여러 의미의 경계와 시기의 눈빛은 계속될 터였다.
“어, 뭐야? 불이 왜 꺼지는 거지? 정전인가?”
세이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랑케의 실내를 환하게 비추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곤 음악과 함께 중앙에 쳐져 있던 커튼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매혹적인 자태의 무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연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라우렐의 말에 세이지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랑케의 자랑이랍니다. 공연을 보시고, 마음에 드는 페이라스모스가 있다면 귀띔해 주시면 됩니다.”
언제 왔는지 벤투스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술은 여기에 놓으면 된다.”
벤투스의 명령에 뒤따라온 여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진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자릴 떴다.
그 모습에 세이지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 한결같다니까. 여인들이 우리 대장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정작 우리 대장은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보다 더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 입 다물어, 세이지.”
진이 낮게 경고하자, 세이지가 씨익 웃어 보였다.
“무희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공작님. 랑케의 페이라스모스는 타란 대륙의 자랑이거든요.”
무대에서 공연 중인 무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벤투스가 슬쩍 덧붙였다.
“그럴 필요 없다, 벤투스.”
진의 차가운 서슬에 벤투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벤투스가 재빨리 자릴 뜨자, 진은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시원하고 알싸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진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별일 없다는 듯 어깰 으쓱해 보였다.
라우렐은 황제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황제께서 공개 구혼에 대해 물으시더군. 난 금시초문이라고 답했고.”
그게 다라는 투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라우렐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진이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별일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기사단의 동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칼라일로 오는 중입니다. 오늘 시합에도 나올 겁니다.”
진이 고갤 끄덕였다.
황제 에드윈의 명령으로 로이슈덴 공작가 소속의 검은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200년 동안 로이슈덴 공작가를 섬겨 온 검은 기사단은 타란 대륙 곳곳으로 흩어져 숨어 있을 뿐, 언제든 제 주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한 라우렐이 황실 근위대에 들어간 것 역시 황제의 동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피기 위해서였다.
“정말 번거롭다니까. 욕심 많은 황제 때문에 이게 뭐야.”
무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세이지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입조심해. 여긴 보는 눈이 많은 곳이니까.”
“쳇!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터가 좋았어. 그곳에선 아무 생각 없이 적만 죽이면 됐으니까. 여긴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눈치 볼 것도 많은지.”
사실 세이지의 가장 큰 불만은 랑케에서 열리는 검투 시합에 나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세이지, 제발 그 입 좀…….”
라우렐이 주위를 살피며 경고하려는 순간, 실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무대에서 춤을 추던 무희들이 느른한 음악에 맞춰 손님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이게 바로 소문으로 듣던 그 페이라스모스인 거지?”
세이지가 잔뜩 들뜬 표정을 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희들은 불빛이 만들어 낸 마법으로 무척이나 관능적으로 보였다.
사내들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전설의 세이렌처럼.
“페이라스모스, 그게 뭔데 이 난리인지 모르겠군.”
진은 유독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노골적인 시선을 주는 무희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 유명한 페이라스모스를 모르다니. 이건 순전히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대장 혹시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건…… 헉!”
유들유들 말을 건네던 세이지가 갑작스럽게 허릴 구부리며 숨을 삼켰다.
“그 입 좀 다물라고 했지, 세이지. 죄송합니다, 공작님.”
라우렐이 더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세이지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리곤 서둘러 진에게 고갤 숙였다.
진은 세이지의 저런 건방진 태도가 어디 하루 이틀이냐는 표정으로 라우렐을 보았다.
“라우렐, 그러지 말고 페이라스모스가 뭔지 말해 봐.”
제 주인의 요구에 라우렐이 제가 아는 정보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랑케의 무희와 고급 창부들을 페이라스모스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게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유라도 되나? 다른 사교 클럽에도 다 있는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만, 이곳의 페이라스모스들은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손님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는 점에서요. 한마디로 아무리 잘난 귀족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것이 이곳 랑케에 있는 페이라스모스들의 자부심이고, 귀족들은 그녀들에게 선택받았다는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입니다.”
“하룻밤의 탐욕을 거창하게도 포장하는군.”
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차갑게 말했다.
페이라스모스는 귀족들의 허영과 가식적인 면모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명분을 원하잖아. 여인을 안는 것에도 그런 미친 규칙을 만들 만큼.”
세이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대장. 어쩔 거야? 여기에 있는 여인들이 다 대장을 노리는 것 같은데. 혹시 오늘 밤 대장의 순결이 위험한 것 아냐?”
세이지가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었다.
“미친!”
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그리곤 무희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세이지의 말처럼 유혹적인 몸짓으로 귀족들을 희롱하는 무희들의 시선이 탐욕스럽게 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