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메리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공작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다행이었다.
로엔이 안도하며 서 있는 동안, 트레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온 메리언이 테이블에 새로운 찻잔과 간단한 디저트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로엔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 메리언이 찻물이 든 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메리언, 차는 제가 따를게요.”
로엔이 메리언에게 슬쩍 다가섰다.
그러자 메리언의 차분한 갈색 눈동자가 로엔에게 향하더니, 이내 고갤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모네타 님.”
메리언이 진에게 허릴 숙여 예를 갖춘 후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로엔이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실수인 척 옆에 슬쩍 내려놓았던 봉투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어, 이런. 어쩌지?”
“무슨 일이십니까, 시모네타 님?”
문 쪽으로 걸어가던 메리언이 재빨리 로엔에게 다가왔다.
메리언은 테이블을 흥건히 적신 물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다치시진 않으셨고요?”
“어, 손에 물이 튀긴 했는데…….”
“어쩜 좋아요. 어서 손을 내밀어 보세요.”
메리언이 로엔의 손을 붙잡곤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몇 방울 튄 게 다였지만, 크게 덴 것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기다리시면 제가 가져올 게요. 아님, 저와 함께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엔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 손을 살피는 메리언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사실 아프지 않았다. 워낙 손이 새하얀 탓에 유독 붉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괜찮아요, 메리언. 돌아가서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로엔이 슬쩍 손을 빼며 메리언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진의 은청색 눈동자와 마주친 건.
순간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괜찮아. 알았다고 해도 어쩌겠어? 심증만 있고, 이미 물증은 뜨거운 찻물에 번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텐데.’
물에 젖은 연서는 글씨를 알아볼 없게 번져서 얼룩져 있을 게 분명했다.
로엔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진을 마주 보았다.
픽 하고 웃는 그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호를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두근.
뭐, 뭐지?
냉기가 뚝뚝 떨어져, 서늘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심장이 간질거릴 만큼 매혹적인 미소에 로엔은 멍해졌다.
‘웃으면 저런 얼굴이 되다니.’
홀린 듯 그를 바라보자, 진이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깨닫곤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젠 쓸모없게 됐군. 메리언, 넝마가 된 저 종이쪼가리는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해.”
진의 명령에 메리언이 로엔을 보았다. 의중을 묻는 눈치였다.
“부탁드릴게요, 메리언.”
메리언이 물에 젖은 봉투를 가지고 응접실을 나가는 걸 보며, 로엔은 안도했다.
사실 의뢰인의 편지를 다시 가지고 돌아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어찌 되었건 연서의 내용은 진에게 전했고, 편지 역시 쓰레기통행이긴 했지만 저택에 남게 되었으니 제 의무는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아,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뜨거운 물에 장렬히 사망하던 연서를 떠올리며, 로엔은 제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그냥 차갑기 짝이 없던 그의 표정이 무너지는 게 보고 싶었다.
타인의 마음을 쓰레기로 치부하며 시궁창 냄새가 난다던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끝났을 때, 미묘하게 변하던 은청색의 눈동자를 본 순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만족감을 느낀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곧바로 후회했으니까.
“전 이제 돌아가야겠네요. 공작님의 귀중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로엔이 벗어 두었던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진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
로엔은 날카롭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에 바짝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의 눈빛은 굉장히 집요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어서.
초조함에 옷을 입는 행위가 더뎠다. 마치 온몸의 근육이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느껴질 정도다.
“너도 오나?”
“……”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코트의 단추를 채우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진이 평소와 달리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은둔자의 숲에 너도 오냐고 물었다.”
“저는 그러니까, 의뢰인 원하시면 함께 동행할 때도 있긴 하지만…….”
“온다는 뜻이군.”
“뭐, 그렇죠.”
“나오지 마. 네 의뢰인 역시 못 나오게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뭐, 그거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까칠하고 무례한 로이슈덴 공작이 연서 하나 받았다고 약속 장소에 나가 친절하게 거절하는 상냥함을 내보일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외긴 했다. 나오지 말라고 직접 얘기해 주다니.
지금까지 로엔이 파악한 그의 성격과는 조금은 달랐기 때문이다.
“공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로엔은 인사를 건넨 뒤, 문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등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간, 그에게 뒷덜미를 잡혀 목을 물어뜯길 것 같아서였다.
급히 응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집사인 알렉이 서 있었다.
“알렉, 오늘 고마웠어요. 메리언과 요리사에게도 즐거웠다고 전해 주세요.”
“또 뵙겠습니다, 시모네타 님. 현관에 마차를 준비시켜 두었으니, 타고 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로엔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후,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공작님, 랑케까지 타고 가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시는 대로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응접실 문이 닫히기 전, 알렉의 목소리에 로엔이 귀를 쫑긋 세웠다.
“랑케라고?”
알렉의 말을 근거로 유추해 보건대, 오늘 진은 남성 전용 사교 클럽인 랑케에 갈 모양이다.
‘랑케란 말이지.’
로엔은 사교계엔 관심도 없는 진이 왜 랑케에 가는지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여자가 필요한 건가? 대부분의 귀족들이 사교 클럽을 찾는 이유가 그것이니까.’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랑케엔 아름답고 매혹적인 ‘페이라스모스(랑케에서 일하는 무희와 고급 창부를 일컫는 말)’가 있다.
순간 불쾌감이 치밀어 올라, 로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여인이나, 성적인 욕망엔 관심도 없는 척 금욕적으로 굴더니.
공작 역시 남자였던 모양이다.
현관을 나서자, 알렉이 준비해 둔 마차가 보였다.
마차를 탄 로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랑케에 간다고? 당장 벤투스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이내 로엔을 실은 마차가 움직이며 로이슈덴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 * *
사교 클럽 ‘랑케’의 시작은 어두운 밤과 함께였다.
환락과 쾌락. 그리고 비밀스러운 거래와 음모. 거기다 귀족들의 자존심을 건 결투와 살인에 이르기까지.
랑케는 타란 대륙을 움직이는 위험한 정보들과 돈으로 넘쳐나는 환락가의 정점 같은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드리안의 귀족들은 물론, 타란 대륙의 내로라하는 대상인들이 거액의 회비를 내고 랑케로 몰려들었다.
특히 정복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이젠 쓸모가 다한 용병들을 상대로 검투 시합을 개최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랑케의 입지는 전보다 더 단단해지는 데 성공했다.
랑케가 전쟁이 끝나 조용하다 못해 시시해진 타란 대륙을 다시 검투사라는 위험스러운 도박에 열광하게 만든 것이다.
특히 한 달 후 건국 기념일에 맞춰 열리는 검투 시합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 열기는 더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 제국의 귀족들은 건국 기념일의 검투 시합에서 승리를 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아마 200년 동안 내려온 전통이라 더더욱 그것에 연연하는 것일 테다.
한마디로 랑케는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거기다 랑케엔 최고급 품질의 술과 아름다운 무희, 그리고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들이 있었다.
랑케의 무희와 여인들은 고대어로 ‘유혹’, ‘악마의 시험에 들다.’란 뜻을 담은 ‘페이라스모스’로 불리며, 일반적인 거리의 여인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페이라스모스’가 갖는 가장 큰 특권은 원하는 손님을 그녀들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굉장한 권력을 쥔 자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사내들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귀족들은 더 몸이 달았고,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덕분에 랑케의 명성과 문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대장! 여기.”
진이 마차에서 내려 랑케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세이지가 그를 반겼다.
그 옆에 서 있던 라우렐이 예를 갖췄다.
“왜 이렇게 늦어요?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그 입 좀 다물어, 세이지.”
라우렐이 세이지의 경박스러운 행동을 나무랐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대장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잖아. 쳇, 얼마나 대단한 곳이라고 문 앞부터 통제를 하는 통에 꼼짝 없이 기다려야 했다니까. 호리우스의 눈을 묻어 놓은 것도 아니면서.”
세이지가 한숨까지 내쉬며 투덜거렸다.
“랑케잖아. 1년 회비만 어마어마하게 내야 하는 회원제 사교 클럽. 너나 나나, 공작님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곳이니 얌전히 굴어.”
라우렐이 불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세이지에게 다시 한 번 단단히 경고했다.
“그런데 소문에 여기 여자들이 그렇게 예쁘다며? 대장도 봤어?”
“아니. 나도 이곳은 처음이다.”
“그래? 그럼 대장은 여기 회원이 아닌 거야?”
세이지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진만 믿고 기다렸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날까 봐 걱정인 모양이다.
“걱정 마. 로이슈덴 가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이곳 회원이니까.”
랑케라는 정보 집단의 뿌리는 200년 전 아드리안 제국의 시작과 함께였다.
처음엔 제국에 반기를 든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만든 집단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활동 장소가 타란 대륙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랑케의 소유주 역시 아드리안 제국을 세운 다섯 가문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황실인 존더부르크일 확률이 가장 높은 건가?’
진은 랑케의 실질적인 주인이 황제인 에드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랑케가 타란 대륙의 정보를 쥐락펴락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흩어진 용병들까지 랑케로 불러들이며, 검투 시합을 연 걸 보면 더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