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진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을 기다렸다고?”
적당히 뭉개다 돌아갈 것이지, 눈치 없이 지금껏 기다렸다고 타박하는 투다.
‘그나저나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지? 꼭 잡아먹힐 것 같네.’
응접실로 들어온 후, 진은 맹수가 사냥하기 직전 먹잇감을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로엔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긴장으로 입안이 바짝 말랐다.
“흠흠. 의뢰인과의 약속이라 실례인 걸 알면서도 돌아갈 수 없었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헛기침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자,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하지 마.”
“네?”
뭘 하지 말라는 거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로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인상을 팍 쓰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고양이처럼 혀로 입술 핥는 것 좀 하지 마. 거슬려.”
이건 또 무슨 소리?
하다 하다, 이젠 내가 혀로 내 입술을 축이는 것까지 시비를 걸려는 모양이다.
로엔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황당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앞으론 짐승처럼 혀로 입술을 핥는 저속한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젠 됐나요?’ 하는 표정으로 진을 보자,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구긴다.
대체 어떡하라는 거야?
로엔은 속으로 짜증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그에게 하나하나 감정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네가 시간까지 죽여 가며, 날 기다릴 만큼 중요한 그 의뢰인과의 약속이란 것 말이야.”
다행히 대화할 마음이 든 것인지, 진이 말할 기회를 주었다.
“여기. 그린스버그 백작의 영애께서 보내신 연서입니다.”
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 제가 들은 말이 믿기지 않은 듯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연서라고? 설마 나에게?”
“네. 여기.”
로엔이 서둘러 핑크색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장미꽃과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봉투는 누가 봐도 연서라는 걸 알 정도로 낯간지러운 핑크빛이었다.
진은 마치 벌레라도 본 양 미간을 찌푸린 채 핑크색 봉투를 쏘아보았다.
“믿을 수가 없군. 다른 여인이 쓴 연서를 들고 날 찾아올 생각을 하다니.”
그의 말투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뭔가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로엔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의뢰가 들어온 일이라…….”
그녀의 변명에 그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뭐야?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지?
로엔은 저를 쏘아보는 진의 눈초리에 놀라 말끝을 흐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본능이 더 이상 말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벌써 포기한 건가? 날 록스버그 공작의 남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생각해 보니 힘들 것 같나 보지?”
진이 불쾌한 듯 손끝으로 테이블에 놓여 있던 편지를 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 어어?”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허릴 숙여 봉투를 주웠다. 그리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뾰족하게 말했다.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요? 싫다고 결투장을 보낸 것도 아니고, 공작님을 좋아한다고 연서를 보낸 건데. 이렇게 함부로…….”
“누가 필요하대? 차라리 결투장이 났겠군.”
“네? 그걸 말이라고.”
“필요 없다고. 결투장이든 연서든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거든. 제멋대로 내게 환상을 품고 만들어 낸 감정에 내가 일일이 반응해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시궁창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끔찍하군. 그러니 제발 치워 주겠어?”
봉투를 든 로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지?
순간, 아차 싶었다.
평소와 달리 왜 그렇게 예민하게 화를 내는가 싶었는데, 봉투에 한 방울 떨어뜨린 향수가 그의 신경을 거슬린 모양이다.
“죄송해요. 봉투에 향수를 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향수를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아무리 닦아도 없어지는 게 아니란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로엔은 향수를 뿌렸던 곳을 소매로 닦아 냈다.
“누가 향수가 싫다고 했지? 내가 견딜 수 없이 짜증이 나는 건…….”
진이 말끝을 흐리며, 로엔을 쏘아보았다.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불쾌한 듯 날카로워졌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참는 눈치였다.
아니, 참는 것보단 그 스스로도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려워.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야.’
로엔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의도를 짐작하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저 말씀을…….”
“묻지 마! 거슬리니까.”
이젠 버럭 소릴 지르는 그를 보며 로엔은 황당했다.
‘기분이 개차반인 걸 보니, 외출했던 일이 잘못된 모양이야. 아마 황제를 만나고 온 건지도 몰라.’
로엔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냉정한 눈빛으로 진을 보았다.
에드윈을 만났다면, 록스버그 공작의 공개 구혼에 대해 물었을 터다.
그럼 이렇게 바짝 약이 오른 맹수처럼 구는 것 역시 이해가 됐다.
그래, 화를 내며 그와 싸우는 것보단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의뢰인을 대신해 그 앞에 있었다.
‘쳇.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내 신조인데.’
복수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공작님의 반응이 지금까지 만났던 분들과 너무도 달라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로엔이 바로 사과했다.
“이런 의뢰가 많았던 모양이지?”
“저에 대해 미리 조사하셨으니 아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성공률도 꽤 돼서 인기가 높기도 하고요.”
“다른 귀족들이 어땠는지 몰라도 난 귀찮아. 그러니 다신 이런 일로 내 저택을 방문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진이 두 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다행히 조금 전과는 달리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로엔은 뭔가 결심을 한 듯 크게 숨을 고른 뒤, 손에 들려 있는 봉투를 힘 있게 쥐었다.
“다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의뢰를 받았고, 내용을 공작님에게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 일을 좀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흠흠!”
로엔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공작 각하께.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아시나요? 아침에 눈을 떠, 태양이 이슬을 머금은 꽃잎을 비출 때의 충만함을 공작님도 느끼시나요?”
“지금 뭐 하는…….”
시를 낭송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간질거리는 말들을 뱉어 내는 로엔을 보며,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쉿! 금방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흠흠!”
로엔이 다시 헛기침을 하곤, 조금 전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어 나갔다.
“유리엘라 광장에서 처음 본 순간, 저는 제게 두 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께 감사했습니다. 입술로 공작님의 이름을 속삭일 수 있음에 행복했고, 제 손으로 공작님의 앞길에 꽃을 뿌릴 수 있어 기뻤습니다.”
로엔은 편지를 낭송하며, 유리엘라 광장에서 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눈이 멀 것 같던, 그 순간이 떠오르자 심장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마치 연서를 쓴 게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귓불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대필이라지만…….’
당혹감에 입술을 축이며 고갤 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보고 있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 그러니까…….”
“이제 끝난 건가?”
“아니요. 아직입니다.”
로엔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연서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은빛 폭포수가 은하수처럼 떨어지는 은둔자의 숲에서 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가장 짙고 어두운 밤, 그림자조차 숨을 죽이며 모습을 감추는 그믐의 밤. 그곳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순백의 꽃잎이 공작님의 숨결에 닿아 붉게 물드는 비밀스러운 시간을 공작님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로엔이 다 끝난 뒤, 슬쩍 진을 곁눈질했다.
어느새 그녀를 쏘아보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제 손을 보고 있었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손에 쥔 봉투를 뒤로 감췄다.
“어, 연서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줘.”
“네?”
바보처럼 또 되묻자, 진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아, 연서 말인가요? 갑자기 그건 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졌거든. 네가 읊었던 내용과 같은지 확인도 할 겸.”
정말 확인해 볼 생각인지, 진이 손을 내밀었다.
로엔은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연서를 꽉 움켜쥐었다.
사실 로엔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순백의 꽃잎에 대한 얘긴 그가 연서를 확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즉흥적으로 덧붙인 말이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내가 그를 놀렸다는 걸?’
사교계에선 연서를 보낼 때, 여인의 입술과 순결을 순백의 꽃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곳에 공작의 더운 숨결이 닿는다는 건 키스는 물론 더한 행위를 하자고 유혹하는 뜻이었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내포하는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터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로엔이 연서를 빼앗길세라 손으로 꽉 움켜쥐며, 고갤 가로저었다.
그 태도에 진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
“그 연서, 나에게 주기 위해 가져왔던 것 아니었나? 그런데 주지 않겠다니. 설마, 내용이 다른 건 아니겠지?”
“아니요, 아닙니다. 하지만 공작님이 연서를 거절하신 순간 이건 더 이상 공작님의 것이 아니게 됐거든요. 그리고 제가 그 내용을 읊어 드렸으니, 더는 확인할 필요도 없으시고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제발 통하기를 빌며 로엔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어떻게 이 연서를 처리할지에 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