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다시 만들지 그래? 대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드리안 제국뿐만 아니라 타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이 대장 밑으로 들어가려고 몰려들걸?”
세이지의 말에 라우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헛소리 그만해, 세이지. 너도 그럴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잖아.”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화가 나 미칠 것 같아서.”
세이지가 금방이라도 미쳐 날뛸 듯이 발을 세게 굴렀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 모양이다.
“세이지, 심심한 모양이군. 너 같은 미친놈은 전쟁터에서 더 썩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진의 지적에 세이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곤 강아지처럼 고갤 끄덕이며, 당장에라도 전쟁터로 나가고 싶은 듯 말했다.
“대장, 그럴까? 우리가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일으키면 되잖아.”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전쟁을 일으키자는 세이지를 보며, 라우렐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정복전쟁은 끝났고 타란 대륙은 아드리안 제국의 소유였다.
무엇보다 5년 동안 정복전쟁의 선두에 서서 싸웠던 로이슈덴 공작가의 검은 기사단의 명성이 이미 타란 대륙에 파다하게 퍼진 터라 당분간은 아드리안 제국에 맞서 싸우려는 나라도 없었다.
“미친놈! 당장 가서 훈련하는 기사들이나 감시해.”
그냥 놔뒀다간 반역이라도 일으키자고 할 판이라, 라우렐이 재빨리 세이지의 입을 막으며 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세이지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만스러운 듯 걸음을 옮겼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공작님. 저놈이 요즘 몸이 근질근질한지 미쳐 날뛰는 중이거든요.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부르셨다.”
“폐하께서요? 혹시 황실 기사단을 맡기시려는 것 아닐까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전쟁터에서처럼 진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럼 이 지겨운 기사단 생활이 훨씬 즐거울 테지.
“그건 아닐 거야.”
진의 단호한 태도에 라우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머리 회전이 빠른 라우렐은 황제가 진을 황궁으로 부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칼라일은 물론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서일 터다.
“혹시 그 소문이…….”
“터무니없는 소문이야.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그제야 안심한 듯 라우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세이지야 사교계에 관심도 없어서 여공작인 록스버그 공작과 진이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좋아했지만, 라우렐은 반대였다.
록스버그 공작이 얼굴과 몸 전체가 흉터로 가득한 괴물이란 소문도 신경이 쓰였지만, 그것보다 더 걱정인 건 두 귀족가가 결혼으로 동맹을 맺게 되었을 때 황제에게 받을 견제였다.
‘황제가 절대 환영할 리 없지. 공작이 무서워 검은 기사단까지 빼앗는 겁쟁이니까.’
라우렐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결혼 따윈 없을 테니까. 그럼 이만 가 봐야겠다.”
“조만간 공작저로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랑케에서 뵙겠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거든요.”
“랑케라. 간만에 몸을 푸는 것도 좋겠군.”
진이 고갤 끄덕이곤 서둘러 연무장을 나섰다.
라우렐의 명령으로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세이지가 크게 팔을 휘저으며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진은 그런 세이지에게 시선을 준 다음 황제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공작님이 늦으시는 것 같은데, 차를 좀 더 내와야겠네요.”
로엔의 옆에서 얘길 나누던 하녀장 메리언이 도자기로 만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주인의 귀가가 늦어지자, 기약 없이 기다리는 로엔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의외야. 차가운 성품의 주인과는 달리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걸 보면.’
로엔은 메리언에게 웃으며 말했다.
“메리언, 내가 신경 쓰여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요. 어차피 약속도 정하지 않고 방문한 건 나잖아요. 그러니 메리언이 마음 쓸 것 없다는 뜻이에요.”
순간 메리언의 미소가 깊어졌다.
“마음이 쓰이는 것도 맞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빨리 보내고 싶지 않아서랍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른 다녀올 테니까요. 혹시 더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간만에 요리사인 제레미가 실력 발휘 중이거든요.”
“요 근래 공작저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네요.”
“주인님이 방문객을 싫어하시거든요.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신 후론 이렇다 할 방문객도 없었고, 최근 5년 동안은 전쟁터에 계시느라 집을 비우셨으니 말 다 했죠.”
“이제라도 저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특히 요리사의 실력을 썩히는 건 너무 아까운 것 같으니까요.”
로엔이 스콘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메리언은 조금 안도했다.
사실 로엔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집사인 알렉이 주인도 없는 상태에서 손님이 왔다며 차와 스콘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녀와 마주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낯선 방문객에게 흠뻑 빠진 것이다.
“자주 놀러 오세요. 아 참, 상점이 어디에 있다고 하셨죠?”
“칼라일의 중심 시가지에 있어요. 메리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꼭 놀러 와요.”
메리언이 고갤 끄덕이곤 응접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로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마침 진이 돌아오는지 집사인 알렉이 현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내 정원을 가로지른 마차가 현관 앞에 멈춰 서더니 검은 외투를 입은 진이 내렸다.
그에게 다가간 알렉이 뭔가 말하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곤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로엔에게 날아들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온몸에 한기가 인 듯 가볍게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저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갤 숙여 보였다.
저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고, 이내 알렉과 함께 현관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낼 건 뭐야.”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로엔은 조금 전 그의 시선에 죽은 목숨이었을 터다.
순간 세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실은 사내란 아무리 냉정하고 잔혹한 맹수라도 제 여인에게는 다른 법이라고 했었다.
“정말 그럴까? 그 역시도 제 여인에겐…….”
기적이 일어나 만에 하나,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로엔은 결심이 선 듯 단호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진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지금부터 맹수를 길들일 시간이었다.
* * *
“별일 없었겠지?”
“네. 록스버그 공작저에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진이 고갤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알렉이 재빨리 덧붙이듯 말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걸음을 멈춘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식 방문 요청이 있었던가?”
“그건 아닙니다.”
“돌려보내. 설마 5년 동안 저택을 떠나 있었다고 해서 잊은 건 아니겠지?”
“그 어떤 경우라도 방문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잊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불청객을 저택에 들이다니.
유능하고 눈치 빠른 알렉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그의 관점에서 원칙을 깰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란 뜻이다.
대체 누구기에.
진의 시선이 응접실의 유리창으로 향했다.
시모네타였다.
유리창 사이로 햇빛을 받고 서 있는 시모네타의 아름다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다.
묘한 안도감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게 짓눌렸던 마음 역시 한결 가벼워졌다.
진은 밀려드는 낯선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도 없는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이니 불쾌한 게 마땅했다.
그런데 짜증이 나기보단 날카롭던 신경이 점차 누그러들었다.
진은 시모네타를 보고 느끼는 제 감정이 당혹스러워,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을 했다.
“왜 왔는지 말은 했고?”
“의뢰인의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의뢰인?”
아, 생각해 보니 만물상점이란 가게를 운영한다고 했다.
아마 그곳을 찾은 손님이 뭔가를 부탁한 모양이다.
“언제부터 기다렸지?”
“공작님께서 외출하시고 곧 이어 도착하셨으니, 3시간이 조금 넘었습니다.”
알렉의 대답에 진이 고갤 끄덕이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알렉에게 건네며 응접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마치 예기치 않은 만남이 기다려지기라도 하듯.
“차를 준비할까요?”
“평소보다 진하게. 피곤하군. 그리고 8시에 마차를 준비해 둬. 랑케에 갈 거야.”
“곧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알렉이 주방으로 향하자, 진은 응접실 앞에 섰다.
낯선 기대감에 굳어 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응접실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로엔은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에 한참을 머물더니, 이내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엔 그를 기다리는 동안 메리언과 함께 마신 찻잔과 다 먹은 스콘 부스러기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아,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보니…….”
변명처럼 말을 하곤 로엔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또다시 말을 이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다 친절한 것 같아요. 예의도 바르시고, 저 같은 불청객에게 환대까지 해 주셔서 편하게 기다릴 수 있었거든요.”
“그런 것 같군.”
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곤 테이블로 걸어갔다.
상인이라더니, 수완이 좋은 모양이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메리언의 환심을 산 걸 보면.
진이 자리에 앉는 동안 로엔은 그의 허락을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후광처럼 그녀를 비췄다.
진은 묘하게 눈이 가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온실의 화초 같은 사교계의 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당당한 자신감은 사람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