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러고 보니, 그믐이 닷새 후네. 별 생각 없이 시간을 정한 것인데.”
음력으로 그믐. 달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엔 공작새의 눈물의 효능 역시 가장 강해지는 때이기도 했다.
은둔자의 숲에 간 김에 지난번에 얻지 못한 공작새의 눈물을 가져올 생각이었다.
“숲에 가실 때 공작새의 눈물을 받아 오시게요?”
“응. 잘됐어.”
“저도 함께 갈게요. 제가 루시 님을 지켜보는 동안 주인님은 아르구스의 절벽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아니야, 그럴 것 없어. 그곳엔 혼자 가는 게 더 편해. 들킬 염려도 없고.”
무엇보다 한 달 전 아르구스의 절벽 아래로 흐르는 폭포수에서 로이슈덴 공작을 보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로엔은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제발 그믐의 밤엔 은빛 폭포수 아래 서 있던 그가 없기만을.
* * *
사흘 후, 로엔은 또다시 로이슈덴 공작저의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방문했던 때와는 달리 그녀의 손엔 붉은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봉투엔 당연히 루시 그린스버그를 대신해 쓴 연서가 담겨 있었고.
“또 뵙네요, 집사님.”
로엔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엔 조금 당황한 듯 굳어 있던 알렉이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로엔에게 예를 갖췄다.
지난번 제 주인이 로엔을 내쫓지 않았던 게 떠오른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공작님은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로엔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주인이 없는 저택에 사람을 들이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이걸 직접 전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집사님이 절 쫓아낸다고 해도 갈 수 없어요. 그러니 마음 넓으신 집사님이 절 한 번만 봐주세요.”
로엔이 환하게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알렉은 고갤 끄덕였다.
이번에도 지난번 제 주인이 로엔을 쫓아내는 대신 오랫동안 얘길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저에게 명령까지 내렸었다.
「알렉, 시모네타 만물상점의 주인에 대해 알아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내색하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령에 알렉은 조금 놀랐다.
제 주인의 성격이 원체 타인에겐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5년 전 로이슈덴 공작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감정을 품고 도망치듯 전쟁터로 떠났던 주인이 5년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상태는 오히려 더 나빠져 있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엔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마저 잃어버리시다니.’
알렉은 걱정이 됐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몸속에 있던 드래건의 힘은 통제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지만, 대신 삶에 미련 한 조각 없는 빈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감정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맹수가 된 주인을 보며 알렉은 매 순간 제 주인이 잘못될 것 같아 두려웠다.
뭐라도 좋으니, 제 주인을 묶어 둘 뭔가가 생기길 간절해 바랐다.
그런데 기적처럼 아름다운 레이디가 공작저에 나타났다.
다행히 레이디는 제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다시 공작저를 방문한 걸 보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알렉에게는 레이디를 집 안으로 들일 이유가 충분했다.
제 주인이 낯선 방문객을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였다 호통을 치더라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차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실래요?”
알렉의 호의에 화답하듯 로엔이 기쁘게 웃었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갑자기 왜 눈물이 나려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렉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분명 하녀장인 메리언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미쳤다고 비웃었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전 공작님이 돌아가신 후 로이슈덴 공작저에 레이디가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방문으로 인해 차갑고 음침하게만 보이던 공작저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알렉입니다. 요리사가 스콘을 특히나 잘 만든답니다. 그것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알렉의 뜻밖의 말에 로엔이 미소를 지었다.
로엔을 따라 들어온 부드러운 햇살이 오후의 공작저를 따뜻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진은 황실 소속 기사단의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인 에드윈의 명령으로 황궁에 왔다가 약속 시간이 아직 남아 있어 연무장에 잠깐 들른 것이다.
마침 검술 시합이 있는지 시합을 하고 있는 두 명의 기사를 중심으로 남은 기사들이 원을 만들어 그들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진은 시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 검술 시합을 하고 있는 기사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라우렐과 부단장인 세이지임을 깨달은 후, 느긋하게 팔짱을 끼곤 시합을 지켜봤다.
정복전쟁이 끝나고 수도 칼라일에 돌아온 지 벌써 2개월이 넘었다.
그래서인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지옥 같던 전쟁터에서 있을 때와는 달리 그들의 움직임엔 여유가 느껴졌다.
‘실력은 여전하군.’
진이 혼잣말을 하며 웃고 있는 사이, 진을 먼저 알아본 라우렐이 그를 불렀다.
“공작님!”
세이지의 검을 단숨에 쳐 낸 뒤 검을 거둬들인 라우렐이 바닥에 놓아두었던 단복을 걸치며 진에게 다가왔다.
땀에 젖은 라우렐의 얼굴엔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
“실력은 여전하군, 라우렐.”
“여전하긴요. 다 녹슬었죠. 지금 좀이 쑤셔 죽을 지경입니다. 전쟁터에 있을 땐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돌아오니 무료하게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전 전쟁터가 체질인 모양입니다. 공작님께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시간 날 때마다 공작저로 방문했지만 만날 수 없어서 걱정했었습니다.”
“알렉에게 전해 들었다. 네가 방문했다는 건.”
“단장님만 방문했던 건 아닙니다. 저도 항상 곁에 있었다고요. 그나저나 대장은 좋아 보이진 않네. 여잘 만난 것 같지도 않고.”
어느새 뒤따라온 세이지가 이를 드러내며 진을 아래위로 살피더니 실망이라는 듯 말했다.
“세이지, 이 미친! 그 입 좀 다물지 못해!”
라우렐이 버럭 소릴 지른 후 진의 눈치를 보며, 세이지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들 역시 ‘그레이트 모먼트’의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내가 뭘? 난 그냥 2개월이 넘는 동안 대장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여자한테 푹 빠진 줄 알았지. 전쟁터에 있는 동안 대장은 수도사처럼 지냈잖아. 사실 난 대장 거기가 고장 난 줄 알았다니까. 여자한테 하도 관심이 없어서. 그런데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소문이……?”
히죽히죽 웃는 세이지를 보며, 라우렐이 급기야 그의 발을 밟았다.
“더러운 말이나 지껄이려면 당장 꺼져, 세이지.”
라우렐이 진의 안색을 살폈다.
사실 전쟁터에 있을 당시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떠돌긴 했었다.
성욕을 참아 내는 진의 모습이 마치 고행을 하는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 같다고.
그런데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스캔들이라니.
그것도 가장 유명한 신문을 통해 공개 구혼까지 받게 되자, 세이지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럴 것 없다, 라우렐. 세이지의 저런 행동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세이지야말로 욕구 불만인 모양이군. 양기가 입으로 모인 걸 보면.”
진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농담을 하자 라우렐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이지는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은 정반대 성격의 라우렐과 세이지를 번갈아 봤다.
지금이야 사이가 좋지만,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땐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사실 귀족 출신에 진중한 성격의 라우렐과 평민 출신의 세이지, 두 사람은 태생부터가 상극이었다.
검은 기사단 소속이 아니었다면 분명 가까워질 수 없는 조합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겪고 난 후에야 라우렐은 평민 출신인 세이지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인정했고, 황실 소속의 기사단장이 되었을 때 부단장으로 세이지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주위에선 평민 출신에 건방지고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세이지가 부단장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라우렐이 세이지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 의견을 꺾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지금 기사단 내부에서도 세이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이지, 그리고 대장이 아니라 앞으로 공작님이라고 부르도록 해. 여긴 전쟁터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라우렐의 지적에 세이지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 보니 단정하게 제복을 갖춰 입은 라우렐과는 달리 세이지는 단추를 다 풀어헤친 상태였다.
“쳇, 이러니까 난 기사단 같은 곳엔 있고 싶지 않았다니까. 대장, 나 대장네 소속 기사단에 다시 들어가면 안 될까? 돈은 안 줘도 돼. 숙식만 해결해 주면 내가 대장을 지켜 줄게. 대장도 알잖아. 내 실력이 어떤지는.”
세이지가 당장에라도 기사단을 나가고 싶은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그건 안 될 것 같다, 세이지. 로이슈덴 공작가엔 소속 기사단이 없거든.”
“다시 만들면 되잖아.”
철없는 세이지의 말에 라우렐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인 에드윈 존더부르크 8세가 허락할 리 없었다.
정복전쟁이 끝나고 칼라일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로이슈덴 공작가에 소속된 검은 기사단을 황실 기사단 소속으로 흡수했다.
겉으론 전쟁에서 승리한 기사들에게 후한 포상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궁극적으론 진에게서 기사들을 빼앗으려는 의도였다.
전쟁이 끝난 아드리안 제국에선 로이슈덴 공작가의 검은 기사단은 황실에 위협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진은 물론 검은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