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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3화 (14/201)

13화

“가능하긴 한데……. 혹시 루시 님이 직접 전달할 마음은 없으신가요? 공작님에게 직접 눈도장을 찍을 기회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로엔의 말에 루시가 솔깃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무섭거든요. 분명 스캔들이 날 테니까요. 거절이라도 당하면 제 평판은 물론 아버지께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거기다 레이디들의 비웃음을 살 테고요.”

로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아드리안 제국의 사교계가 얼마나 소문에 민감한지.

그리고 한순간에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무서운 곳이라는 것도.

“제가 경솔했네요. 걱정 마세요, 루시 님. 제가 직접 공작님에게 연서를 전할 테니까요.”

“시모네타 님만 믿을게요.”

“여기, 묘약입니다.”

로엔이 상자를 루시에게 건넸다.

루시는 받아 든 검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안에 들어 있는 보랏빛 병을 확인했다.

“효력은 단 30분이란 걸 잊지 마세요. 아, 그리고 우리 주인님께서 연서 안에 공작님을 만날 시간과 장소를 써 놓으실 거예요. 그럼 루시 님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가기 전에 묘약을 뿌리면 됩니다.”

세실이 평소와 달리 건성으로 말했다. 상대가 로이슈덴 공작이라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로엔이 그런 세실을 눈빛으로 나무랐지만, 세실은 입술을 내밀 뿐이었다.

“원하는 장소나 시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루시 님?”

“은둔자의 숲이 좋을 것 같아요.”

루시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를 대자 로엔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장소를 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라면 그곳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 같거든요. 밤늦게 그곳에 가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그러면 소문날 일도…….”

루시가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추문에 휩싸일까 봐 잔뜩 겁을 먹은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루시 님. 약속 장소는 그곳으로 하죠. 대신 그곳은 레이디 혼자 가기엔 위험한 곳이니 제가 동행할게요. 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공작님에게 들키지 않게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거든요.”

“그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시모네타 님.”

루시가 한 발짝 다가와 로엔의 손을 잡으며 기뻐했다.

로엔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로이슈덴 공작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가 약속 장소에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혼자 그곳에서 기다릴 루시가 안쓰러워 함께 가 주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제 손까지 잡고 기뻐하는 루시를 보자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럼 닷새 후 밤 11시, 은둔자의 숲에서 보는 걸로 하죠.”

로엔이 아예 시간과 장소까지 확정 지어 말하자, 루시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사례비예요. 그럼 닷새 후에 뵐게요.”

들뜬 표정으로 상점을 나가는 루시를 보며, 세실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인님은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하신 거예요? 로이슈덴 공작님은 주인님의 남편이 되실 분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세실이 마치 로이슈덴 공작과의 결혼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아직 공작님이 공개 구혼에 답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루시 님의 마음이 갸륵하기도 하고. 괴물 공작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니 말이야.”

“갸륵하긴 뭐가 갸륵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주인님은 정말 화도 안 나세요? 조금 전 다녀갔던 귀족들도 그렇고 루시 님도 그렇고. 다들 주인님을…….”

차마 다음 말은 입에 담기도 싫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

“세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틀려요. 절대 주인님은 괴물 같은 게 아니니까요. 그냥 소문일 뿐이잖아요. 진짜 주인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데요. 마음도 예쁘고 똑똑하시고 또…….”

“그들에겐 소문이 진실이지. 그러니 상관없어.”

“그럼 로이슈덴 공작님에게라도 비밀을 밝히세요. 그러면 분명 주인님과 결혼하실 거예요.”

세실은 로엔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구불구불한 금발이 상아빛 얼굴을 후광처럼 감싸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봐 왔지만 제 주인의 아름다운 미모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분명 우리 주인님이 아드리안 제국, 아니 타란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인일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귀족들 앞에선 항상 검은 베일로 이 모습을 가려야 했다.

“세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공작님과 결혼을 한다고 해도 당분간은 그에게 내 비밀을 말해 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선 베일을 벗어야 하잖아요.”

세실의 말에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그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첫날밤 같은 건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 제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정화시키려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의 체액도 필요했다.

고서에 의하면 성인식을 치른 후론 꼭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의 체액으로 맹독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야 공작새의 눈물로 버텨 오긴 했지만, 맹독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젠 공작새의 눈물만으론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체액이란 게 입안의 타액도 해당되었지만, 맹독을 정화시키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내와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거기다 아이까지 생겨 가문을 잇게 된다면 더한 행운은 없을 테고.

그러니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를 유혹해 꼭 첫날밤을 보내야만 했다.

‘비밀을 들키지 않고도 그와 밤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러나 과연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약이라도 먹이면 모를까.

“주인님,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뭐가?”

“저는 주인님이 공작님을 적극적으로 유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로이슈덴 공작님이 주인님에게 빠지면 좋은 거잖아요.

피에 굶주린 맹수라는 소문이 있긴 해도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에겐 이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거든요. 주인님의 포로가 되면 분명 주인님 발아래 납작 엎드려 꼬릴 흔들 거라고요. 그러니 제 말대로 하세요. 치명적인 매력을 발휘해 공작님을 손에 쥐시라고요.”

세실의 말에 로엔이 픽 하고 웃었다. 며칠 전 유모인 엠마가 똑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가족이라 그런 건가? 어쩜 그리 생각이 똑같은지.’

하지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듯했다.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로이슈덴 공작이 사랑에 빠진다고 해서 충견이 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상상이 안 돼. 그가 여인에게 빠지다니…….”

“이러니까 주인님이 연애를 못하는 거라니까요. 주인님은 모르시죠? 오늘 방문하신 귀족들 중에 제라르 백작님이 주인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제라르 백작이면, 유일하게 록스버그 공작을 걱정해 주던 남자였다.

“네 착각이야. 그분은…….”

로엔은 말끝을 흐리며 정직해 보이던 루빈 제라르 백작을 떠올렸다.

종종 저를 보며 미소 짓곤 했지만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절대 아니야.”

세실이 한숨을 쉬며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뭐, 그렇다고 하죠. 하지만 주인님에게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이 필요한 건 맞는 것 같아요. 특히나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지금 시점에서는요.”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이라…….

“사교 클럽의 고급 창부들처럼?”

“그것도 도움은 되겠죠. 아, 그럼 말 나온 김에 우리 사교 클럽에나 한번 가 볼까요? 귀족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도 살펴보고, 또 어깨너머로 사내를 유혹하는 기술 역시 훔쳐볼 수도 있잖아요.”

세실의 말에 로엔이 살짝 미간을 접었다.

로엔이 시모네타란 상인의 신분으로 상점을 낸 뒤로, 세실과 함께 남장을 하고 남성 전용 사교 클럽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여인인 걸 들킬까 봐 잔뜩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주 방문하다 보니 지금은 자연스럽게 귀족들과 섞여 농을 주고받을 정도가 됐다.

무엇보다 신문사 ‘그레이트 모먼트’의 주인인 파엘라의 친척이라고 은근히 소문을 낸 뒤론 전용 회원 카드를 발급해 주는 곳도 있었다.

“나중에. 정 필요하면 파엘라를 통해 저택으로 사람을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로엔의 말에 세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급 창부를 공작저로 부르시게요?”

“어? 어. 그게 더 좋을 것 같지 않아? 댄스 선생처럼 저택으로 불러서 자세하게 요령이나 잠자리 기술을 배우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거든.”

“그게 좋겠어요. 사실 그런 기술들은 사적이고 은밀해서 슬쩍 훔쳐보는 걸론 부족할 것 같았거든요. 언제, 언제 부르실 건데요?”

“그것도 조금 나중에. 정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부를 생각이야.”

로엔이 대충 얼버무린 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세실의 말처럼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선생을 부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경험상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실은 계속해서 쓸데없는 말로 저를 설득하려 들 터였다.

“전 빨리 불렀으면 좋겠어요. 벌써부터 흥분이 되거든요. 저도 잠자리 기술을 배우고 싶기도 하고요.”

세실이 부끄러움도 없이 헤벌쭉 웃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마구간 지기 톰을 바라보는 세실이 눈빛이 심상치 않았었다.

풋,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잠자리 기술은 남자가 배워야 하는 것 아니야?”

세실이 처음으로 제 주인이 순진하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요. 여인이 남자보다 잠자리 기술이 뛰어나면 안 될 이유도 없잖아요. 누가 배우든 두 사람이 즐거우면 되는 법이니까요.”

로엔은 세실의 대범함에 새삼 놀랐다.

귀족 사회는 여인의 정숙함이 미덕인 곳이었다.

아무리 아드리안 제국에서 남녀 간의 연애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제국민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가문의 혈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사회에선 연애를 할 땐 자유분방한 여인을 선호했지만, 결혼을 할 때만큼은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댔다.

정말 모순적이고 구역질 날 만큼 가식적인 행태였다.

평소 귀족들의 그런 모습을 경멸하던 로엔 역시 제 스스로가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못내 충격이었다.

“그렇지. 누가 배우든 중요한 게 아니지.”

사랑하는 사이에선.

10년 간 암살자를 피하며 살기 위해 버텨 오는 동안 연애라는 몽글몽글한 감정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더욱이 가문의 저주로 몸속에 맹독을 갖고 태어난 그녀에겐 필요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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