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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2화 (13/201)

12화

“주인님, 의뢰인들은요? 벌써 가신 건가요?”

찻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던 세실이 혼자 서 있는 로엔을 보곤, 실망한 기색이었다.

“조금 전 돌아가셨어.”

“그래요? 무슨 의뢰였는데요?”

“록스버그 공작의 희생자 명단을 구해 달라는 의뢰였어.”

“네? 희생자 명단이라니. 그런 게 있었어요?”

“아니. 내가 모르는 그런 명단이 존재할 리 없잖아. 아마 귀족들 사이에서 헛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야.”

어떤 의미에선 참 씁쓸한 의뢰였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단 얘기가 사실처럼 돌다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네요.”

세실이 불쾌한 듯 닫힌 문을 쏘아보았다.

“쳇, 그런 미친 의뢰인 줄 알았다면 빨리 올라올 걸 그랬어요. 차에 침이라도 뱉어 먹게 했어야 했는데.”

그 장면을 상상하기라도 한 듯 로엔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 그러지 마. 소문이라도 나면 문 닫아야 하니까.”

로엔이 세실의 어깨를 토닥인 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인님은 화도 안 나세요? 그런 미친 의뢰를 받았는데 말이에요.”

“응, 안 나. 그자들은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대신 돈을 왕창 뜯어낼 생각이야. 아니다. 그 보다 벨루가 자작이란 자의 이름을희생자 명단의 제일 꼭대기에 올리는 게 좋겠어.”

로엔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그제야 세실이 만족스러운 듯 따라 웃었다.

“평소 의뢰비의 다섯 배를 부르세요. 아니, 열 배가 좋겠어요.”

“그래, 그럴 생각이야. 다음 예약자는 누구였지?”

“아, 그린스버그 백작가의 영애이신 루시 님이세요. 사랑의 묘약을 구매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창고에 부족한 재료들이 몇 개 있더라고요.”

“그래? 부족한 재료가 뭔데?”

“사향 고양이의 수염과 공작새의 눈물이요.”

둘 다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마법 재료였다.

사향 고양이의 수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공작새의 눈물을 손에 넣기 위해선 다시 은둔자의 숲으로 가야만 했다.

또 가야 하는 건가?

로엔이 고민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닫혀 있던 상점의 문이 열리고 낯이 익은 레이디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시모네타 님!”

루시 그린스버그가 로엔을 발견하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루시 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세실, 창고 안에 남이 있는 묘약을 가져와 주겠어?”

“얼른 가져올게요.”

세실이 창고로 간 사이, 루시가 조금은 난처한 표정으로 로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루시 님.”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게, 묘약을 주문하긴 했는데 그것보단 연서를 보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지금 연서 대필을 하고 싶다는 건가요?”

루시가 눈을 빛내며 고갤 몇 번이나 끄덕였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레이디의 풋풋함이 느껴지자 로엔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사실 묘약이 효과가 좋긴 하지만 그분은 무도회나 파티에 참석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만나 뵐 기회가 없어서요.”

루시가 마음에 둔 귀족은 사교계엔 관심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럼 연서가 좋겠군요. 상대에게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그만한 것도 없으니까요.”

로엔의 말에 루시가 안도하는 게 보였다.

“주인님, 여기. 묘약을 가져왔어요.”

세실이 검은색 상자를 로엔에게 건넸다. 상자 위엔 금빛으로 루시의 이름이 라벨링되어 있었다.

“세실, 루시 님께서 묘약 말고 다른 걸 의뢰하셨어.”

“그럼 이건 필요 없어진 건가요? 하지만 이건 루시 님에게 맞게 제조된 거라…….”

세실이 루시의 이름이 라벨링된 곳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가능하다면 이것도 구매하고 싶어요. 2주씩이나 기다려서 받게 된 것이니까요. 그래도 될까요, 시모네타 님?”

“당연히 괜찮습니다. 이건 처음부터 루시 님을 위해 만들어진 묘약이니까요. 그럼 연서를 보내고 싶으신 분이 누군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그렇죠.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냐면…….”

루시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떠올리는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이름을 말하는 게 어려우면 첫 만남부터 말하셔도 된답니다.”

로엔의 조언에 루시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을 처음 본 건 유리엘라 광장에서였어요. 시모네타 님도 기억하실 거예요. 얼마 전 있었던 전승 기념 퍼레이드를요.”

로엔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나 애써 침착한 태도로 루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기억해요. 정말 대단했었죠. 광장으로 몰려나온 인파도 그렇지만 정복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기사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으니까요.”

로엔은 검은 말을 타고 광장을 가로지르던 로이슈덴 공작을 떠올렸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그는 환호하며 꽃잎을 뿌려 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를 위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환영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굳어 있었다.

‘무심한 그 눈빛이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었지.’

그러나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벽한 얼굴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잔뜩 홀려 놓았다.

오히려 완벽한 얼굴에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분위기가 더해지며 그를 더욱 특별하게 했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로엔은 그와 눈이 마주쳤었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예리한 칼날처럼 제 얼굴에 닿았었다.

알 수 없는 당혹감에 로엔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외투의 후드를 머리에 썼고, 그다음 순간 날카로운 단검이 제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냉기였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암살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암살자를 찾기도 전에 콧속으로 스미는 짙은 혈 향에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두꺼운 외투로 팔을 감싼 후, 피가 흐르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맹독은 평범한 사람에겐 목숨을 해칠 만큼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그 자릴 벗어나야 했다.

실수로라도 제 피가 다른 사람에게 닿기라도 한다면, 10년 전 제 부모님들처럼 죽을 테니까.

밀려드는 공포를 억누르며, 인파를 뚫고 그곳을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인적 없는 골목길에 접어든 순간,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함께 있던 세실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여러 의미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제 팔을 스치고 간 단검의 끝엔 해독제가 없는 맹독이 묻혀 있었다.

“기사이신 모양이군요.”

“네. 멀리서 잠깐 본 것뿐이지만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셨어요. 특히 눈동자가 아름다웠어요. 평생 그렇게 깊고 시린 눈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눈동자만 아름다웠다는 건가요, 루시 님?”

루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세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꿈을 꾸듯 상상에 빠져 있던 루시가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환한 미소와 붉어진 얼굴은 어떻게 보아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세실, 그분은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게 아름다우신 분이야. 큰 키도, 검술로 단련된 몸도. 그리고 서늘한 분위기에 우수에 찬 얼굴은 심장이 뛸 만큼 섹시하거든.”

루시는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지 재빨리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로엔은 그 순간 루시가 말하는 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쳇,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

루시가 첫눈에 반해 연서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분명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군요.”

로엔이 단정 짓듯 말하자, 루시가 수줍은 듯 고갤 끄덕였다.

“로이슈덴 공작님이라고요? 하지만 지금 그분은 록스버그 공작님이 공개 구혼을 하신 분이시잖아요.”

세실이 로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루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래서 연서를 보낼 결심을 한 거야. 이대로 있다간 우리 공작님이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주먹을 꼭 쥔 루시의 얼굴에 비장함마저 감돈다.

마치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에게서 잘생긴 공작을 구해 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멋지네요, 루시 님. 마치 동화 속의 멋진 기사님 같으세요. 남녀가 바뀌긴 했지만.”

로엔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세실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다행히 루시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 꼭 구해 드릴 생각이에요. 시모네타 님, 연서는 언제까지 될까요?”

“사흘이면 될 것 같군요. 완성되는 대로 백작저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이 시모네타 님이 직접 공작님에게 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아주 잠깐이지만 로엔의 눈동자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연서를 로이슈덴 공작에게 전할 생각을 하자 난감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좋은 생각 같기도 했다.

어차피 록스버그 공작과의 결혼을 방해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른 여인의 연서를 들고 찾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제 행동을 그가 비웃을 테지만 꽤 흥미가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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