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드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위 계승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로이슈덴 공작가의 혼인이었다.
만에 하나 이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아드리안의 최고 명문가의 결합이 될 터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괴물 공작의 짝사랑일 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이긴 했지만, 진짜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록스버그 공작,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허락한다.’는 말을 귀족들 앞에서 공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결정은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하실 테니까요.”
순간 에드윈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거절할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건 아닐 테지?”
로엔이 맞잡고 있던 손을 풀어 베일 안으로 넣었다. 그리곤 초조한 듯 입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슬쩍 들린 베일 사이로, 로엔의 흉터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에드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사랑에 빠지면 다들 눈이 먼다지만, 그댄 록스버그 공작이다. 가문의 평판과 명예를…….”
그때였다. 검은 베일에 싸여 있던 로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울음이라도 참는 듯이.
“폐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인지를요.”
“그럼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공작?”
에드윈의 제안에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사실 후회 중이기도 하고요. 공개 구혼을 할 때만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제 힘으론 도저히 수습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로엔은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잠시 말을 멈췄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셋을 센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폐하께서 두 가문의 혼인을 허한다고 발표라도 해 주신다면, 제 체면과 가문의 명예가 조금은 세워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운 좋게 공작님이 폐하의 명에 복종할지도 모르고요.”
후회하고 있고, 수습하고 싶다는 말에 납득하던 에드윈은 로엔의 마지막 말에 눈을 번뜩였다.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이 내 명에 복종한다.’라.
복종이란 단어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인정하기 싫은 지독한 열등감.’
황제가 되기 전부터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진을 부러워했다.
아니, 질투였다. 그리고 뿌리 깊은 열등감이기도 했다.
황제가 될 이는 자신인데, 진을 보고 있으면 기분 나쁜 감정이 자꾸만 그를 집어삼켰다.
그래서 5년 전 전쟁터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바로 허락했다.
마음속으론 그가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아드리안 제국에게 타란 대륙을 가져다주었다.
제국민들은 그를 보며 환호했다. 어쩌면 제국민들은 황제인 저보다 진을 더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괴물 공작과 결혼한다면…….’
굳이 결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 자체가 진에겐 추한 스캔들이 될 터였다.
벌써부터 사교계에선 ‘야수와 미남’의 결합이란 조롱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기라도 한다면, 진의 성격상 분명 불쌍하고 가련한 록스버그 공작을 죽여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불운한 여인을 죽였다는 추문이 평생 진을 따라다닐 테지. 뭐, 어떤 상황이건 내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겠어.’
에드윈은 손에 들린 록스버그의 재산 목록을 내려다보았다.
황실 금고를 불려 줄 돈과 진이 받을 치욕을 생각하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좋다. 허락하지.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공작.”
에드윈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엔이 그제야 잘근잘근 씹어 대던 손을 내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윈을 향해 허릴 굽혔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는 아직 이른 것 같군. 내 충고 하나 하자면 조심하는 게 좋아, 공작. 진은 내가 봐도 좀 미쳤거든. 전쟁터에서 그 난리를 떤 걸 보면 뻔하지. 그러니 적당히 몸을 사리도록 해.”
같잖게 충고를 하는 에드윈을 보던 로엔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에드윈의 말처럼 진 로이슈덴 공작은 미쳤을지도 모른다.
고서에 의하면, 드래건의 심장은 그것을 삼킨 인간이 성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힘이 발현된다고 쓰여 있다.
아마 그 시점은 진이 전쟁터로 나갔던 5년 전일 테고, 그는 전쟁터에서 드래건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수많은 적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가 5년 동안 어떤 지옥을 보냈는지.
진에게 주어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결과적으로 진 본인은 물론 아드리안 제국에도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타란 대륙을 발아래 두게 해 주었다.
과연 황제는 알까?
진이 타란 대륙을 가져다 바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결과가 오든 폐하를 원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 볼까? 내가 언제 그대와 로이슈덴 공작의 혼약을 허락해야 하는지 말이야.”
“한 달 후, 건국 기념일. 그때가 좋을 것 같습니다.”
* * *
수도 칼라일의 중심 시가지에 위치한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은 2층으로 된 석조 건물이었다.
주변 상가와는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라, 상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꼭 한 번 들여다보고 지나가곤 했다.
5년 전 로엔이 시모네타라는 신분으로 상점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작은 디저트 가게처럼 생긴 가게가 이렇게 번성하게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처음 상점을 열었을 당시 레이디들이 주 고객이었다면, 시간이 흘러 손님들 사이에서 진기하고 희귀한 물건을 구해 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남성 귀족들 역시 하나둘 상점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에선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런 소문이 난 이유엔 록스버그의 재력과 공작가 직속의 정보 집단이 운영하는 ‘랑케’라는 클럽 때문이었다.
거기다 겉으론 드러낼 수 없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의뢰까지도 들어준다고 알려지자,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을 찾는 이는 더욱 많아졌다.
그중 만물상점의 주 고객층인 레이디들은 대부분 연서를 대필해 그것을 상대에게 전해 주는 일을 의뢰했다.
그러다 은밀하게 보낸 연서가 상대에게 전해져 결혼까지 갔다는 말이 레이디들 사이에 소문이 나자,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의뢰가 빗발쳤다.
덕분에 이젠 로엔과 세실 두 사람만으론 상점이 운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
딸랑, 딸랑.
문에 매달아 놓은 종이 두 번 울렸다.
“주인님, 2층에 의뢰인이 찾아온 모양이에요.”
물건을 정리하던 세실이 벨소리에 놀라 로엔을 돌아보았다.
“세실, 차를 준비해 줘.”
“네, 바로 뒤따라 올라갈게요.”
로엔은 세실에게 고갤 끄덕여 보이곤 드레스의 자락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을 방문한 의뢰인을 만날 시간이었다.
* * *
“이곳 주인이 정말 그 명단을 구할 수 있을까요?”
벨루가 자작은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으로 루빈 제라르 백작을 돌아보았다.
“내 생각엔……”
루빈 제라르 백작이 입을 열려는 순간, 닫혀 있는 문이 열렸다.
그리곤 불쑥 목소리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 홈볼트 백작이었다.
“벨루가 자작은 아직도 그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이 만물상점의 주인이 반역자를 돕는 것 외엔 못하는 게 없다는 걸 말이야.”
“홈볼트 백작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어야겠네요.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약속 시간이 넘었는데도 백작님이 나타나지 않으셔서 당장 결혼할 레이디라도 구하신 줄 알았습니다.”
벨루가 자작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홈볼트 백작이 안으로 들어서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 미안. 오는 길에 ‘랑케’의 주인을 만났거든. 그리고 그에게 아주 중요한 얘길 들었지.”
‘랑케’란 말에 루빈 제라르와 벨루가 자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랑케’는 남성 전용 사교 클럽으로, 사교계는 물론 타란 대륙의 모든 소문과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인 벤투스를 만났다는 건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
루빈이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전 록스버그 공작과 폐하께서 만나신 모양이더군요. 그날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건 사적인 공간인 티룸에서 만남이 이뤄진 터라 자세히 알긴 힘들다고 했습니다. 시종장하에 통제가 된 터라.”
“폐하께서 록스버그 공작을 티룸으로 부르시다니. 다른 말은 없었고?”
“제가 전해 들은 정보는 그게 다입니다, 백작님.”
홈볼트 백작의 말에 루빈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창가에 마련된 탁자로 걸어갔다. 두 사람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혹시 그날 폐하께 그 명단을 드린 건 아닐까요?”
자리에 앉자마자 벨루가 자작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어? 그래도 록스버그 공작가의 주인인데 말이야.”
“지금 그런 말 할 상황입니까? 이미 록스버그 공작은 가문의 명예든 평판이든 시궁창에 던져 버린 상태라고요. 남자에 미친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공개 구혼을 한 것도 모자라, 이젠 남편감 목록을 작성했다잖습니까? 거기다 폐하까지 만났다니. 이젠 꼼작 없이 우리가 괴물 공작의 다음 희생자가 될 겁니다.”
벨루가 자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제가 말한 모든 것들이 사실인 양, 벌벌 떨기까지 했다.
“벨루가 자작, 그렇게 떨 것 없대도. 처음으로 공개 구혼한 사람이 로이슈덴 공작님인데 아무리 급하다고 그대를 남편감으로 점찍을 것 같진 않거든.”
홈볼트 백작의 농담에 벨루가 자작이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로이슈덴 공작이야 아드리안은 물론 타란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외모였다.
그에 비해 벨루가 자작의 얼굴은 로이슈덴 공작의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로 비루했다.
“지금 록스버그 공작이 제정신이겠습니까? 하는 꼴로 봐선 ‘한 명만 걸려 봐라.’ 같은데. 속 편하게 있다가 운 나쁘게 선택이라도 된다면……. 저는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끔찍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요.”
벨루가 자작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평소보다 더 록스버그 공작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벨루가 자작, 그만하는 게 좋겠군. 록스버그 공작님의 행동이 이성적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대에게 이유 없이 비난받을 분은 아니거든.”
루빈 제라르가 불쾌한 표정으로 벨루가를 나무랐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공격당하자 무안해진 벨루가 자작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제라르 백작님은 록스버그 공작에게 굉장히 관대한 것 같군요. 혹시 마음에라도 있으신 겁니까?”
“미친! 벨루가 자작,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그런 막말을 백작님께 하다니. 당장 사과하는 게 좋겠군.”
홈볼트 백작의 지적에 벨루가 자작이 그제야 제 행동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은 듯 루빈 제라르 백작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