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황실의 티 룸은 처음이었다.
1년에 두 번, 제국의 건국 기념일과 황제의 탄신일엔 대부분의 귀족이 황실이 주최하는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황궁에 와 본 적은 있지만, 황실 사람들만 허락되는 사적인 공간에 발을 디디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다.
“왔군, 록스버그 공작.”
티 룸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햇살을 받으며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에드윈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새삼 제국의 레이디들이 왜 젊은 황제에게 열광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엔이 깍듯이 예를 갖추자, 에드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잘생긴 얼굴이 햇살 아래 빛이 났다.
“이리 와 앉지.”
에드윈이 권한 자리에 앉은 로엔은 얼굴을 가린 검은 베일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에드윈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그대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즐기는 취미는 없거든. 하지만 안타깝군. 그 사고 후로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직접 볼 수 없다는 게 말이야.”
에드윈이 황제가 아닌 황태자 시절을 떠올리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로엔은 그가 왜 10년이나 더 된 추억을 언급하면서까지 친분을 드러내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사고 후, 로엔이 참석한 파티에서 그녀의 흉터를 본 뒤로 귀족들은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건 베일을 벗지 않길 바랐다.
오히려 불어오는 바람에 실수로라도 베일이 들려 그녀의 흉터를 볼까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황제인 에드윈 역시 예외는 아닐 테지.
“불편하진 않나? 항상 그걸로 앞을 가리면 힘들 것 같거든.”
“익숙해서 괜찮습니다. 가끔 편할 때도 있고요.”
“그렇지. 누구나 껄끄러운 사람 하나쯤은 있으니까.”
로엔의 가벼운 농담에 에드윈 역시 동조하며 웃었다.
“폐하께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시라, 그런 고민은 저한테만 해당되는 줄 알았거든요.”
“나라고 예외는 아니지.”
“궁금하군요. 누가 폐하를 불쾌하게 만드는지. 혹여 저는 아니겠지요?”
“하하하, 절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해.”
에드윈이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로엔의 어깨에도 힘이 빠졌다.
기분 좋게 웃던 에드윈이 뭔가 생각난 듯 웃음을 거두곤,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나저나 그대의 흉터 말이야. 화장술이나 마법으로 가릴 수 없는 건가?”
“불행히도 없더군요. 워낙 흉터가 몸 전체에 남아서…….”
에드윈은 고갤 끄덕일 뿐, 더는 상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언급했다.
“몸은 어때? 두 달 전에 좀 아팠다지? 그렇게 몸이 약해서야. 좀 걱정이군.”
순간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었다.
다행히 베일을 쓰고 있어서 망정이지, 제 표정을 에드윈이 봤다면 불경죄로 감옥에 갇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에드윈이 언급한 두 달 전이라면, 유리엘라 광장에서 있었던 암살 시도 사건이 있던 때였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님 모른 척하는 걸까?
뭐, 어떤 것이든 상관은 없다. 그 일로 인해 동정을 받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나 생각할수록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대놓고 모르는 척하는 뻔뻔함이.
로엔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친구인 척 다정하게 굴고 있지만, 황제 역시 신뢰할 자는 아니라는 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거든요.”
로엔이 운이 좋았다는 말로 그를 비꼬았다.
그러자 에드윈이 침울한 표정을 하더니 곧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록스버그 공작. 그대를 조롱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그 사건에 대해 사실대로 언급하는 게 불편할 것 같아 돌려 말한 것뿐이다.”
순간 로엔은 하마터면 실소를 할 뻔했다.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배려였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지금껏 모른 척하던 황제가 왜 하필 이제야 제 암살 시도에 대해 언급하느냐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너무 꼬인 모양입니다. 몸은 괜찮습니다. 언제나처럼 운이 좋았다는 말은 사실이거든요.”
로엔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자 에드윈 역시 표정을 풀었다.
“다행이군. 그동안은 그대에게 신경 써 주지 못했지만 지금부턴 달라질 생각이야. 그래서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이고.”
에드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로엔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에드윈의 온화한 미소와 짙푸른 눈동자에 담긴 따뜻함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로엔은 베일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처럼 다행이라고 생각된 적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인 에드윈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보니 자꾸만 경계심이 일었다.
‘혹시 내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것밖에 없다. 황제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꺾이지 않는 펜’인 록스버그와 ‘부러지지 않는 검’인 로이슈덴의 결합.
분명 권력을 움켜쥔 자들에겐 위협일 터였다.
로엔은 기민하게 에드윈의 기분을 살폈다. 그리곤 그의 옆에 모여 있던 레이디들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온 계획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사실 그동안…….”
로엔이 말끝을 흐리며 목소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감정이 북받쳐 말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연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예상대로, 차를 마시던 에드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다.
“힘들었던 모양이군, 록스버그 공작.”
“네. 사교계에 친구가 없었거든요. 부끄럽지만 제 외모 때문에 외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폐하는 물론 다른 귀족들도 멀리해 왔고요.”
로엔이 약한 소리를 하자, 에드윈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다.
“그랬을 테지.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록스버그 공작! 내 사촌인 진과 그대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무척이나 궁금하군.”
오늘 황제 에드윈의 콘셉트는 친한 척하기인 모양이다. 가식적인 살가움을 온몸에 장착한 걸 보면.
“폐하께서도 신문을 보신 모양이군요.”
로엔이 부끄러운 듯 고갤 숙였다.
또한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난처한 듯 몸을 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일에 가려져 제 표정을 살피지 못할 에드윈에게 제 감정을 알려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늘 제 콘셉트는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심약한 레이디’였으니까.
동정심 유발 작전이기도 했다.
“맞아. 내 그 신문을 보고 얼마나 서운하던지. 공작이 내 사촌인 진에게 마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어때? 진에게서 공개 구혼에 대한 대답은 받았고?”
에드윈의 의뭉스러운 질문에 그가 로엔을 황궁으로 부른 진짜 이유가 이것임을 깨달았다.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의 일방적인 구애였거든요.”
로엔이 난처한 듯 고갤 가로저었다.
‘잘생긴 기사를 짝사랑하는 레이디의 이야기는 흔한 법이지.’
그 단편적인 예로, 지금 칼라일은 진 로이슈덴을 앓는 중이었다.
유리엘라 광장을 지나며 차갑고 위험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기사를 본 순간, 칼라일의 레이디들은 모두 사랑에 빠졌다.
사교계의 소식통에 의하면 진에게 반한 레이디들이 가슴앓이 중이란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분명 에드윈 역시 그 소문을 들었을 테니 저를 그중 하나로 여길 터였다.
‘거기다 나는 얼굴은 물론 몸에 흉측한 상처까지 있는 괴물이지.’
진 로이슈덴을 절대 욕심내서도 안 되는 흉측한 괴물.
그런 처지에 놓인 제가 ‘그레이트 모먼트’에 공개 구혼까지 했다.
미치지 않고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닥인 평판을 시궁창에 던져 버리는 최악의 스캔들이었으니까.
아마 에드윈은 물론 귀족들은 이 스캔들을 보며, 록스버그의 괴물이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쳤다고 생각할 터였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에드윈에게 쉽게 동정심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대 말은 공작 혼자 진에게 반해 짝사랑 중이란 건가? 공개 구혼은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벌인 일이고?”
에드윈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꼭 다무는 게 보였다.
괴물 주제에 로이슈덴 공작을 욕심내는 게 우스운 모양이다.
“사실입니다, 폐하. 전승 기념 퍼레이드 때 로이슈덴 공작님을 우연히 보고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실 제 처지가 이렇다 보니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언제 또 암살을 당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었거든요.”
사랑에 눈이 먼 여인의 치기 어린 행동일 뿐, 거기엔 아무런 의도도 목적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난처하게 됐군. 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검부터 휘두르는 나쁜 버릇이 있거든. 혹시나 진이 록스버그 공작가를 피바다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군.”
걱정하는 척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에드윈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사디스트가 분명해.’
에드윈의 태도가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라 당황했다.
그러나 꼭 사디스트로 몰아가기엔, 에드윈의 태도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제 불행을 보며, 지나치게 기뻐하고 있었다.
‘만약 이 지나친 관심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진 로이슈덴이라면?’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에드윈은 진이 저와의 스캔들에 휘말린 걸 기뻐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건지. 설마 황제가 진을 경계하고 있는 건가?’
그것도 남자 대 남자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했다.
타란 대륙의 모든 남자들이 진 로이슈덴 공작을 경외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에드윈 역시 예외는 아닐 터였다.
‘잠깐, 만약 에드윈이 느끼는 경계심의 뿌리가 열등감이라면?’
순간, 로엔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추측이 맞다면,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폐하께서 절 부르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폐하께 긴히 드릴 부탁이 있었거든요.”
부탁이란 말에 느슨하게 앉아 있던 에드윈이 허릴 세우며, 바짝 당겨 앉았다.
“뭐든 말해도 좋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록스버그 공작의 인연을 생각해 꼭 들어주고 싶군.”
이젠 완전히 경계심을 푼 에드윈을 보며, 로엔은 안도했다.
하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됐다.
“폐하!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내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로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외투 안에서 록스버그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꺼내 에드윈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제 의지입니다.”
봉투를 받아 든 에드윈은 안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해 갈수록 그의 푸른 눈동자가 기쁜 듯 반짝였다.
존더부르크 8세는 읽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귀족들 역시 그를 좋아했다.
‘의뭉스럽게 굴던 전대 황제보단,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편이 상대하기 쉬운 법이니까.’
정복 전쟁이 승리로 끝난 시점에서 아드리안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부유했다.
지금 칼라일의 귀족들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어떻게 나눌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게르피온에 있는 광산에서 검은 보석 호리우스의 눈이 화수분처럼 나올 테니 더더욱 그랬다.
“지금 이걸 나에게 주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또한 이번 정복 전쟁에서 얻게 되는 게르피온에 대한 광산 채굴권 역시 존더부르크 황실에 넘길 생각입니다.”
로엔의 대답에 에드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로엔의 시선을 의식한 듯 흠흠! 헛기침까지 하며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광산 채굴권까지 넘기면서 내게 할 부탁이란 게 뭔지 궁금하군. 혹시 들어주기 곤란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공작.”
조금 전과는 달리 톤이 높아진 목소리에서 들뜬 감정이 읽혔다.
로엔은 애써 모르는 척하며, 제 연기에만 집중했다.
“폐하껜 아무런 해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라. 내 다 들어주지.”
에드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엔이 천천히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리곤 최대한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이 간절히 소망을 말하듯이.
“제 공개 구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