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충격이었는지, 엠마의 얼굴이 창백했다.
“당연히 믿기지 않을 거야. 나도 내 눈을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자가 맞아. 엠마, 너도 잘 알 거야.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
엠마는 절박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래서 공개 구혼을 하신 거였네요. 저주를 풀기 위해서. 저는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 일부러 숨기려 했던 건 아니야. 아직 확실한 게 없어서 망설였던 거지.”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엠마가 고갤 끄덕였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세요? 위험한 자라면서요. 만에 하나 일이 잘돼서 로이슈덴 공작님과 결혼을 한다 쳐도, 주인님의 비밀을 그분에게 모두 말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가 믿어도 되는 자임을 묻는 것이라면, 로엔은 해 줄 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이미 내 몸속에 맹독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그의 비밀을 안 순간 내 비밀을 말해야 했거든.”
그 대가로 제 목숨을 건졌고, 그에게 거래를 하자고 제안을 할 수 있었다.
“그럼 주인님이 록스버그 공작인 것도 말씀하셨나요?”
“아니, 그건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결혼하실 생각이라면서요. 첫날밤에 베일을 벗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주인님이 시모네타 님이란 것도 알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그러나 당분간은 감출 생각이야.”
로엔이 책상 서랍 안에서 얇은 가죽으로 된 물건을 꺼냈다.
엠마는 그게 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좀 답답하겠지만 이걸 계속 쓰고 있으면 쉽게 알아차리진 못할 거야.”
로엔이 익숙한 듯 가면 형태의 인피면구를 얼굴에 썼다.
그러자 상아빛으로 빛나던 왼쪽 뺨이 순식간에 흉측한 상처로 덮였다.
책상에 놓인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아름다운 오른쪽 얼굴과 흉터로 가득한 왼쪽 얼굴.
신화 속 야누스처럼 거울에 비친 모습은 기괴했다.
“이건 기우겠지만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주인님이 그분을 마음에 담게 된다면?”
“엠마, 그건 정말 말 그대로 기우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는 내게 저주를 풀 희생양일 뿐이니까.”
로엔의 단호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지금껏 제 주인은 입으로 뱉은 말은 꼭 이뤄 냈다. 그러니 이번 일도 틀림없을 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엠마는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사이 로엔은 얼굴에 썼던 인피면구를 벗어 서랍에 넣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난 부모님처럼 운이 좋지 않은 것뿐이니까.”
무엇보다 사랑 따위 믿지 않는다.
록스버그의 불행한 사고를 시작으로 제 인생은 계속해서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니까.
그리고 그 나락의 끝엔 제 죽음과 가문의 몰락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랑이란 감정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치일 뿐.
“주인님…….”
엠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는 분명 주인님에게도 그런 분이 생기실 거라 생각해요. 록스버그 공작가는 사랑 운이 아주 강하다고 들었거든요.”
사랑에 운이 강하다라…….
“그래. 네 말처럼 그랬으면 좋겠네.”
저주가 풀리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 사랑하는 이를 만나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나저나 로이슈덴 공작님은 공개 구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구혼을 받아들이실 것 같던가요?”
“아니. 내가 신문을 건넸더니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 있지. 신문을 보여 줄 때까지 공개 구혼을 한지도 모르는 눈치였어.”
“쓰레기통에……. 정말 무례하네요. 안하무인에 개차반이란 소문이 맞는 모양이에요.”
엠마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로엔은 화를 내는 엠마와는 달리 차분한 얼굴로 차의 향을 음미했다.
차에 독을 해독시키는 푸른 양귀비의 진액을 섞은 모양이었다.
“주인님은 화도 안 나세요? 감히 록스버그 공작가를 무시하다니.”
“괴물 공작과 혼인하게 되었다고 검을 들고 쫓아오지 않는 게 다행이지. 꼭 그럴 기세였거든.”
“쫓아오면요? 우린 가만있고요? 라이칸을 당장 불러야겠어요.”
게르피온에 가 있는 라이칸을 불러들이다니. 엠마는 로이슈덴 공작가와 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싸웠을 때, 과연 이길 확률은 있을까?’
‘부러지지 않는 검’이라 불리는 로이슈덴 공작가는 타란 대륙 최고의 기사단인 검은 기사단을 소유한 가문이었다.
한마디로 로이슈덴 공작가와 정면승부를 했을 때, 이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싸움보단 머릴 써서 그를 제 편으로 만드는 게 현명했다.
‘꺾이지 않는 펜’과 ‘부러지지 않는 검’의 대결인 건가?
기대돼. 누가 이길지…….
“싸우긴? 달래야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혹할 만한 제안을 하든가. 사실 아드리안 제국에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괴물 공작인 나와 혼인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 아냐.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설득해야지.”
로엔의 말에 엠마가 억울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거야 다 소문 때문에…….”
“엠마. 세실에게도 말했지만 그 소문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탐욕스러운 늙은 귀족의 아내가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 난 절대 그 소문을 바로잡지 않을 거야.”
로엔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긴 한데…….”
결국 엠마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망설이지 말고.”
“그게, 별것 아니긴 한데 로이슈덴 공작님이 주인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 해서요. 사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에겐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 족속이거든요.”
“그게 사실이야?”
로엔은 아주 조금 흥미를 내비쳤다.
“당연하죠. 그게 아니면, 주인님의 만물상점에 하루가 멀다 하고 레이디들이 찾아드는 이유가 뭐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발아래 두려는 것이지요.”
진 로이슈덴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 내 발아래 둔다니.
굉장히 흥미로운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로엔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던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던 그의 무심한 표정도.
이내, 로엔은 고갤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날 마음에 담을 일은 없을 거야.”
“왜죠?”
“그는 날 두 번이나 죽이려 했어. 난 거래라는 조건으로 그를 협박했고. 그런 나를 사랑할 순 없는 거잖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로엔의 말에 엠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박할 수 없어서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로엔이 뭔가 방법이 생각난 듯 엠마를 불렀다.
“엠마, 스미스에게 내 재산 목록을 적은 리스트를 준비하라고 전해 줘. 내일 아주 중요한 거래를 해야 할 것 같거든.”
내일은 분명 황제와의 알현이 약속되어 있는 날이었다.
엠마는 제 주인이 황제를 설득해 로이슈덴 공작을 움직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폐하의 도움을 받으시려는 건가요?”
엠마의 물음에 로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손에 꼭 넣는다고.”
* * *
수도 칼라일의 정북쪽에 위치한 황궁 앞에 록스버그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멈춰 섰다.
이내 성문이 열리고 마차가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로엔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황궁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6년 전 존더부르크 7세가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그의 유일한 혈육인 에드윈 존더부르크 8세가 스무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미혼인 데다 젊고 잘생기기까지 해 정식 약혼 상대가 결정될 때까지 수많은 스캔들에 휩싸였다.
“어렸을 땐 다정한 순정남이었는데…….”
로엔은 10년 전 록스버그 공작가를 찾아왔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와 혼담이 오가던 사이였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후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로엔은 가면처럼 얼굴을 덮은 인피면구가 잘 붙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검은 베일을 내려 얼굴을 완전히 감췄다.
허릴 세워 몸을 바로 하는 사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미리 마중 나온 시종장이 허릴 숙여 로엔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록스버그 공작님. 폐하께서 티 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접견실이 아니라 티 룸이라고?
로엔은 시종장을 뒤따르며, 황제가 사적인 공간으로 저를 부른 이유를 가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에드윈이 황제가 된 후 황실과 록스버그 공작가의 관계가 조금 호전되긴 했지만 여전히 껄끄러웠다.
비단 황제와 록스버그 공작가 사이에 결혼 얘기가 오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두 사람은 너무 어렸고, 연애 감정 따윈 전혀 없었으니까.
「폐하께서도 다 알고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그럼 묵인이로군요.」
「묵인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암살자가 록스버그의 상속녀를 빨리 처리하길 바라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어린 상속녀가 죽게 된다면 그 많은 재산과 개인 서고에 보관된 보물들은 제일 먼저 국고로 환수될 테니까요.」
사고가 있고 얼마 후, 억지로 참석했던 파티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던 귀족들의 속삭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땐 배신감에 몸을 떨었었다.
아버지인 록스버그 공작의 친우였던 황제가 친우의 딸인 제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돈과 권력 앞에선 그런 감정 따위 하찮은 것이란 걸 어린 나이에 이미 알아 버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공작님.”
티 룸 앞에 도착한 시종장이 옆으로 물러서며 로엔에게 길을 내 주었다.
로엔은 검은 베일을 사이에 두고 시종장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다음, 티 룸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