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7화 (8/201)

7화

“윽, 아하.”

진이 살을 찢는 괴로움에 신음을 삼켰다.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어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검은 비늘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비늘을 떼어 내려 했지만 살에 들러붙은 비늘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벌써 다섯 개였다.

성인식을 기점으로 매년 생일에 드래건의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심장엔 다섯 개의 비늘이 흉한 생명체처럼 들러붙어 빛나고 있었다.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돋아난 비늘은 다른 것들에 비해 색이 옅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것과 똑같이 짙고 단단해질 터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심장에 무섭게 뿌리를 내리고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날뛸 게 분명했다.

검은 비늘을 내려다보는 은청색의 눈동자는 암흑이었다.

빛 한 점 없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지? 너도 처음으로 드래건의 힘이 발현되었을 때 느꼈을 텐데? 그 힘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쯤. 그래서 지금까지 전쟁터를 전전했던 것 아니었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다 알고 있어. 적어도 너보단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 두지.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나뿐이란 것도.」

진은 시모네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녀의 속삭임은 부질없는 희망처럼 달콤하다.

그러니, 독이 분명했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벌써부터 그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려는 걸 보면.

가망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어쩌면…….’이라는 미련을 떨쳐 낼 수 없다.

‘독배라는 걸 알면서도 마셔야 하는 순간이 온 건가?’

진은 손을 뻗어 제 심장을 꾹 눌렀다.

순간 시모네타의 뺨이 닿았던 자리란 걸 깨닫곤 당혹감에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인간의 온기 따위 부질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껏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로이슈덴에 소속된 검은 기사단 외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시모네타라고 저를 소개한 여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시모네타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아주 조금 흥미가 일어서다.

「기대하세요. 이래 봬도 전 뛰어난 상인이거든요. 꼭 록스버그 공작님의 남편이 되실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말하곤 서재를 빠져나가던 시모네타가 떠오르자,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록스버그 공작이 공개 구혼을 하다니.”

너무도 뜻밖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공개 구혼이라니.

잠깐,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록스버그 공작을 본 적 있었다. 아니, 그땐 록스버그의 어린 상속녀였다.

그리고 그 상속녀를 본 건 다름 아닌 록스버그 공작가의 불행이 시작된 마차 사고 현장에서였다.

‘그땐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처참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진 모양이군.’

순간 진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주제에 어린 상속녀를 동정하다니.

“그런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대체 왜 내게…….”

순간 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 사고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걸 알았나?’

아니, 절대 알 리 없다.

진이 어린 상속녀를 도왔을 땐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만약 알았다면 분명 저를 찾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진은 작게 한숨을 쉬며, 원치 않아도 들려오던 록스버그의 상속녀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 사고로 어린 상속녀는 고아가 되었고, 작위를 물려받은 여공작이 되었다.

누구나 탐낼 정도의 재력과 힘을 가진 가문의 유일한 주인이었지만, 귀족들은 누구 하나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어린 여공작은 얼굴의 반과 몸의 반이 흉터로 뒤덮인 추악한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교계의 외톨이가 된 여공작은 탐욕스러운 귀족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을 테지.’

그렇게 힘없고 어린 상속녀가 암살의 표적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테고.

소문엔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암살 시도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두 달 전 마지막 암살이 있었다고 했으니, 10년 동안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려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용케 살아남다니.’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흥미롭군.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여인이라니.”

진은 감이 좋았다.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이건 분명 몸속에 흐르는 드래건의 동물적 본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본능은 그에게 경고하고 있다.

“위험한 냄새가 나. 수상해.”

그렇다고 해서 도망칠 생각 따윈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여인을 죽이는 건 쉬웠다.

그러니 아주 잠깐, 조금만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 * *

“주인님, 주인님!”

서재에 앉아 있던 로엔은 유모인 엠마의 목소리에 고갤 들었다.

“엠마, 무슨 일이야?”

“차와 간식을 조금 가져왔어요. 저녁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신 것 같아서요.”

엠마는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로엔의 표정을 살폈다.

로이슈덴 공작저에 다녀온 후, 쉬지도 않고 개인 서고에 앉아 몇 시간째 꼼짝도 하지 않은 제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

로엔이 바삭하게 구워진 비스킷을 들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게 입에 들어가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세실 말론 로이슈덴 공작저를 방문하셨다고 하던데, 혹시 그곳에서 불쾌한 일을 당하셨다거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엠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소문이 그렇잖아요. 잘생기기만 했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냉정하다고. 거기다 전쟁터에서만 지내서 그런지 레이디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도 하고. 그래서 혹시나 주인님을 험하게 대한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

엠마가 소문을 언급하며 로엔의 눈치를 살폈다.

차를 마시던 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엠마. 지금 묻고 싶은 게, 공작이 소문처럼 미쳐 보였냐는 거지?”

순간 엠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대로 짚은 모양이다.

“뭐, 그렇죠. 정말 소문이 맞던가요?”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아. 악마처럼 잘생긴 건 맞는데, 완전 미친놈은 아니었어. 그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 보였고.”

제 목을 조르던 진의 서늘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로엔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위험했다.

눈에 거슬리는 자를 죽이는 것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미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그는 멀쩡한 정신으로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자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니, 그 전에 공작저엔 왜 가신 건지부터 말씀해 보세요.”

일주일 전, 로엔이 아무런 접점도 없던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을 했을 때도 놀랐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저택으로 돌아온 세실에게서 로엔이 로이슈덴 공작저로 무작정 찾아갔다는 말을 들었을 땐, 더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알아야 했다. 지금 제 주인에게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실에게 들었을 것 아냐? 한 달 전에 은둔자의 숲에서 공작을 만났고, 그때 내가 첫눈에 반한 것도.”

“지금 저보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건가요?”

엠마가 한숨을 내쉬며, 로엔을 보았다.

제 주인이 태어난 순간부터 보살펴 왔으니, 그 세월이 20년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제 딸인 세실보다 로엔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만큼 엠마는 제 주인을 성심성의껏 돌봐 왔다.

미묘한 표정부터 말투 하나까지 제 주인의 감정이 어떤지 다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첫눈에 반했다는 그 말을 믿으라니?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한데, 제 주인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그럼 그 목에 난 상처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한 달 전에도 똑같은 상처를 본 것 같거든요.”

엠마의 지적에 로엔이 손으로 목을 더듬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속일 수 없을 것 같다.

“로이슈덴 공작이 그런 거야.”

“하아, 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미친놈이랑 결혼하시겠다고 공개 구혼까지 하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데요?”

화가 치미는지 엠마가 부들부들 떨었다. 제 주인의 목을 조른 자를 똑같이 해 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 모습에 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엠마밖에 없다니까. 내 일에 이렇게 화를 내 주는 사람은.”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세요? 마음 같아선 손톱으로 그 잘났다는 얼굴을 확 긁어 주고 싶어요. 그래서 다신 그 얼굴로 여자들을 홀리지 못하게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 보세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개 구혼까지 하셨는지.”

이내 로엔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곤 진지한 표정으로 엠마를 응시했다.

어디까지 진실을 말할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로이슈덴 공작과 결혼하겠다는 계획은 진심이야. 그래서 좀 더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공작저에 간 것도 사실이고.”

로엔의 대답에 엠마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했다.

언젠가 제 주인에게도 결혼 상대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은 해 왔다.

하지만 제 주인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목을 조른 미친놈은 절대 아니었다.

엠마의 머리론 제 주인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심이세요? 정말 로이슈덴 공작님을 남편감으로 여기시는 게?”

“그래야 할 것 같아. 내가 알아 버렸거든. 그가 지금껏 숨겨 온 비밀을 말이야.”

“비밀이라니, 대체 그게 뭔데 결혼까지 하시려는 건데요?”

엠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로엔은 또다시 망설였다.

아직 진 로이슈덴이 저와 거래를 하겠다고 확실히 대답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진실을 말하는 게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로엔은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심장에서 드래건의 비늘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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