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6화 (7/201)

6화

“이게 뭐지?”

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태도로 보건대, 일주일 전부터 아드리안 제국을 뒤흔든 스캔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신문을 보지 않는 모양이네요. 벌써 일주일이나 더 된 일인데.”

진이 신문을 쏘아보더니 불쾌한 듯 가차 없이 구겼다.

그리곤 두 번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걸 왜 보여 주는 거지?”

그런 진을 보며 로엔은 마음을 굳혔다.

“제 조건이거든요. 공작님과 록스버그 공작님의 결혼을 방해하는 것. 공작님도 원하시는 일일 것 같아서 제가 해 드리려고요.”

로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 도발에 진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렸다.

“그럼 내 조건을 말하지. 내가 공작의 공개 구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봐.”

로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 전부터 진이 어떤 조건을 내걸지 뻔히 짐작이 됐었다.

뭐가 되었든 그는 처음부터 저와는 반대되는 제안을 할 생각이었을 테니까.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 내는 방패처럼 그는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 저를 곤란하게 만들길 원했던 것이다.

“정말 공평하네요. 지금까지 그 어떤 계약 조건보다 말이에요.”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시모네타, 잊지 마. 내가 두 번이나 널 살려 줬다는 걸.”

진의 말에 로엔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그를 쏘아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차갑게 일렁였다.

“그렇지 않아도 잊지 않을 생각이에요. 공작님께서 두 번씩이나 절 죽이려 했던 사실을요. 저는 아드리안의 법보다 타국의 율법을 더 신뢰하거든요. 예를 들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이번엔 진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차갑게 일갈하는 로엔의 표정을 보니 제가 들은 게 맞는 모양이다.

진의 입가에 픽 하고 미소가 떠올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

겁도 없이 제 앞에서 대놓고 복수를 하겠다고 말하는 여인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돋았다.

“기대되는군, 시모네타.”

모양 좋은 입술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로엔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주 잠깐, 공작저를 찾아온 제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경험상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두려워 도망치는 것보다 맞서는 게 옳았다.

“기대해도 좋아요. 이래 봬도 전 뛰어난 상인이거든요. 꼭 록스버그 공작님의 남편이 되실 거예요.”

* * *

진은 창가에 서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지독한 고통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극심한 통증에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다 뜯어 버리기 전에.”

진은 이를 사리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존재에게 하듯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한 달 전 다섯 번째 드래건의 비늘이 새로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살을 뚫고 나오는 중이라, 새하얀 셔츠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아마 추악한 모습일 터였다.

인간이라면 절대 나서는 안 되는 곳에 드래건의 비늘이 돋아나는 것일 테니까.

처음 드래건의 비늘이 돋아났을 때, 진은 고통을 삼키며 비늘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빌어먹게도 제 몸에 돋아난 비늘은 아무리 검으로 찢고 베어 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가 죽지 않는 한.

“으윽. 하아…….”

진은 주먹을 움켜쥐며 잇새로 신음을 뱉어 냈다.

꽉 다문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목덜미에 서늘한 냉기와 함께 식은땀이 배어났다.

치가 떨릴 만큼 불쾌한 감정이 또다시 일렁였다.

사실 살을 찢고 독초처럼 자라나는 비늘보다 더 참기 힘든 건, 바로 피를 원하는 맹수의 충동이었다.

스무 살 성인이 된 후, 그를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이 본능은 그를 나락 끝까지 밀어 넣을 만큼 강렬했다.

“빌어먹을…… 제길!”

끝끝내 그의 입술 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마에 돋아난 땀이 차가웠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고대 마법에 미쳐 있던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드래건의 심장을 삼켜야 했다.

광기에 젖어 푸른빛을 띤 핏덩이를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던 아버지의 표정과 눈동자가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점성술사의 한마디가 뭐라고. 아니, 황좌에 대한 욕망이 대체 뭐라고…….’

자식을 재물 삼아 그가 원하는 금기 마법을 실현시킨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린 진에게 있어선 믿는 자에 대한 첫 배신이었다.

그것도 온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던 혈족의 배신이라 그 상처는 지금까지 그를 분노케 했다.

그러나 그는 원망 한 마디 내뱉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로이슈덴 공작은 드래건의 심장을 진의 입에 밀어 넣은 직후, 스스로 제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아직도 비릿한 혈 향과 바닥에 흥건히 고인 붉은 피가 그의 망막에 맺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생명이 빠져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향해 웃고 있던 광기 어린 아버지의 눈빛 역시도.

「진, 너는 황제가 될 거야. 아드리안은 물론 타란 대륙을 손에 쥘 예언의 황제가. 라딘이 말한 황제가 로이슈덴 가문에서 나오는 거지. 알려지지 않는 세 번째 예언이 바로…….」

끝을 맺지 못한 아비의 저주 같은 마지막 유언을 들었던 때가, 그의 나이 고작 다섯 살이었다.

진은 제 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고에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생명이 빠져나간 공허한 몸뚱이만 남아 관에 누워 있었다.

처음엔 아버지의 자살이 저에 대한 죄책감이라 여겼다. 그래서 용서하려 노력했다.

황좌에 대한 그릇된 탐욕이 아니라 고대 마법에 미쳐 제 아들의 입에 드래건의 심장을 밀어 넣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제 행동을 후회한 것이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닌 진의 유년기는 한 마디로 지옥이었다.

상처를 품은 어린 맹수처럼 날이 서 있었고, 제 비밀이 갖는 무게에 짓눌려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식을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무 살이 된 진에게 가문의 전통에 따라 가문의 장자에게만 내려지는 비밀서고의 열쇠가 전해졌다.

진은 의식에 따라 물려받은 열쇠로 비밀서고의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15년 전 제게 벌어진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추종자였다.

존더부르크 1세의 친혈족인 로이슈덴 공작가는 황위 계승 서열에서도 황실 다음의 순위였다.

아마 그것이 문제였나 보다.

아버지는 라딘이 예언한 검은 드래건의 주인이 제 아들인 진이라 확신한 모양이다.

거기다 진이 태어나던 날, 찾아와 그의 미래를 예언한 점성술사의 거짓말이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되었을 테고.

그리고 결국 제 아들의 몸속에서 소환된 검은 드래건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제 심장을 찔러 금기 마법을 완성했다.

권력과 황좌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욕망이 아버지를 망친 것이다.

이것이 그날의 진실이었다.

사실을 알았을 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니 황좌에 눈이 멀어 반역을 꿈꾸었던 자가 제 아들이라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리 없다.

저를 향해 웃던 아버지의 인자한 미소는 다 가식이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금기 마법을 완성해 라딘의 쓰레기 같은 예언을 실현시킬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슈덴 공작 가문을 위한 희생양.

‘그나마 끝까지 이기적이라 다행인 건가? 아버지라고 해서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날 이후, 진은 마음을 죽였다.

그에겐 대상을 잃은 분노와 터뜨리지 못한 어둡고 음습한 화만이 남았다.

새롭게 알게 된 진실이 검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고, 15년 동안 제 삶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용서하려 했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렇게 지독한 분노와 절망이 순식간에 그를 잠식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지독한 파괴욕과 어두운 감정이 그를 집어삼켰다.

15년 동안 제 몸속에 잠들어 있던 검은 드래건이 각성한 순간이었다.

그 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건 제 성인식 당일이었다.

끔찍하게도 로이슈덴 공작가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가문의 검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아비의 심장을 찔러 죄악의 피를 삼킨 검이 이번엔 저를 살육으로 내몬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과 제 하녀인 메리언이었다는 점뿐이었다.

그 직후, 진은 황궁으로 향했다.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이자, 사촌이기도 한 에드윈 프레데릭 존더부르크 8세에게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청했다.

그때 황제인 에드윈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갤 끄덕였다.

「로이슈덴 공작, 아니 내가 가장 아끼고 믿는 내 형제 진. 대신 이기고 돌아와야 해. 네 선대이신 제1대 로이슈덴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진은 에드윈의 말속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 안개가 걷힌 듯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된 그의 사촌 에드윈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에드윈 역시도 라딘이란 미친 예언가의 말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씁쓸한 현실에 냉소했다.

그리고 그 순간 200년 동안 존더부르크 황실은 뿌리가 같은 로이슈덴 공작가를 항상 경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로이슈덴 공작가의 장자를 정복 전쟁의 선봉으로 내몰았다는 것 역시도.

‘내가 전쟁터에서 죽길 바랐던 것이군.’

오히려 잘됐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진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비에 의해 제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를 향해 웃고 있는 황제는 저에게 반역이란 미명 아래 목을 칠 게 분명했다.

반역자.

황좌라는 건, 그렇게 잔혹하고 냉정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

어차피 아비도 제 욕망 때문에 절 버린 마당에 누구 하나 제가 살길 바라는 이는 없을 터였다.

실망할 것도, 아파할 것도 없다.

아무리 혈족이라도 권력이란 독배 앞에선 잔혹해지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걸 원치 않는다 해도, 운명은 제 뜻과 다르게 흘러간다.

오늘 제 앞에 나타난 시모네타란 여인처럼.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정복 전쟁에서 제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진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금기된 마법인 드래건의 힘 때문이란 걸.

전쟁터에 있는 동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피에 굶주리고 살육을 즐기는 잔혹한 맹수였다.

전쟁터에 있는 5년 동안 진은 억누를 수 없는 피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게르피온과의 전쟁에서 가까스로 제 몸속에서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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