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화 (6/201)

5화

“사실 폐하의 생각도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라딘의 예언이라면 덮어 놓고 믿는 제국민들이 더 문제거든요. 분명 제국민들은 제 손으로 황제를 끌어내리고 공작님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 들 테죠. 맹목이란 단어는 그렇게 무서운 법이거든요.”

로엔은 그의 순진함과 안이함을 비웃었다.

그에 비해 그녀는 살기 위해 너무도 절박했다. 그래서 더욱 몰아붙여 그를 손에 쥐어야 했다.

‘괜찮아. 어차피 그는 삶에 집착도 없어 보이니, 그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 따위…….’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비웃음으로 일관하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자, 잔혹한 맹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위험을 감지한 초식 동물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로엔은 어쩌면 이 얼굴이 그의 본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 답은 하나군.”

잇새로 뱉어 내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쏘아보는 은청색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급소인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관용은 이제 끝이다. 명줄을 재촉한 것은 바로 네 세 치 혀고.”

그러니 원망 따위 하지 말라는 의미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이 로엔의 목을 움켜쥐었다.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 또다시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며 폐 속의 공기가 희박해졌다.

로엔은 눈을 들어 진을 응시했다.

“경솔해. 정말 나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은청색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의외인 모양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처럼 행동하는 제 태도가.

“지금은 너만 죽이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지? 너도 처음으로 드래건의 힘이 발현되었을 때 느꼈을 텐데? 그 힘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쯤. 그래서 지금까지 전쟁터를 전전했던 것 아니었나?”

록스버그 공작가와 함께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진 로이슈덴 공작가의 젊은 공작을 수도 칼라일에서 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록스버그 공작가가 제국의 ‘꺾이지 않는 펜’이란 칭호로 불리듯, 로이슈덴 공작가는 ‘부러지지 않는 검’이란 칭호를 받는 명문 귀족가였다.

뛰어난 검술과 자부심, 그리고 대단한 기사도는 아드리안 제국뿐만 아니라, 타란 대륙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선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껏 사교계는 물론 건국 기념일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건 분명 이상한 점이었다.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통제 불능의 힘을 다스리고 억누르며, 제 것으로 만들 시간이.

아마 전쟁터는 그런 그에게 최고의 장소였을 테고.

“뭐든 다 알고 있다는 그 태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다 알고 있어. 적어도 너보단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 두지.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나뿐이란 것도.”

그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울질을 하는 모양이다. 제가 한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너도 보았을 텐데? 내 몸이 맹독으로 이뤄졌다는 걸. 그런데도 난 지금껏 살아남았지. 그런 경우를 넌 본 적 있어?”

대답은 ‘아니다.’였다.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았을 때, 진은 그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책을 탐독했었다.

그 과정 중 금기된 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맹독을 품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대체 어떤 가문이지?’

진은 궁금했다. 그가 아는 한 아드리안 제국의 귀족가들 중 핏속에 맹독이 흐르는 가문이 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금기 마법에 심취해 있던 아버지마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진이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여인의 분홍빛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다. 상아빛으로 빛나던 뺨 역시 창백해졌다.

죽음의 신호였다.

“널 어떻게 믿지?”

“믿지 마. 난 널 안 믿거든.”

“계약이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이번 경우는 달라. 내가 제안한 계약이 협박에 가깝다는 건 인정해. 그러나 네가 날 죽이면 네 그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마저 날아가는 거란 걸 잊지 마. 그리고 나 역시도 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거든.”

“무슨 도움?”

“내가 왜 말해 줘야 해? 넌 지금 날 죽이려 하잖아.”

로엔은 그를 믿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저주를 함께 풀 동료나 친구가 아니라, 이용해야 할 희생자다.

그에게 감정을 갖는 건 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네 정보만 빼앗고 널 죽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맞아.”

목을 조여 오는 힘에 의해 로엔은 더는 대답하기 힘이 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다.

그를 설득하지 않으면…….

“콜록, 콜록!”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목을 옥죄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엔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 잠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짙은 사향과 함께 상쾌한 체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그와 동시에 뺨과 손아래에 닿은 뭔가가 단단하게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

당황한 로엔이 기침을 억누르며 고갤 들자, 눈살을 찌푸린 은청색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불결한 것이 닿기라도 한 듯 제 품에 기댄 저를 쳐내고 싶은 눈치였다.

그제야 로엔은 주저앉지 않기 위해 붙잡은 게 그의 몸이었고, 균형을 잡기 위해 기댄 곳이 그의 단단한 가슴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 이번엔 정말 죽는 것 아냐?’

로엔이 생명에 위험을 느낀 채 멍하니 그의 품에 안겨 있자, 그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굉장히 대담하군. 사내의 품으로 몸을 던지는 레이디라니.”

순식간에 로엔의 귓불이 붉어졌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로엔이 재빨리 몸을 떼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

그러나 사과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그가 제 어깨를 밀어 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책상을 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서늘한 태도에 로엔은 기분이 상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그를 유혹하려고 그의 품으로 뛰어든 여인을 보듯 경멸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게 그렇게 싫은 티를 낼 일이냐고! 밀려나는 사람 민망하게.’

저 역시 의도치 않게 몸을 기댄 것뿐이었다.

좋아서 그의 품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저를 죽이겠다고 목을 조른 건 그였다.

그러니 제가 그의 품에 안긴 데엔 그의 책임도 있었다.

조금 억울했다. 아무래도 그는 결벽증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로엔은 몸을 바로 하곤 침착하게 호흡을 골랐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 안이 짓눌린 듯 불편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한 순간이라도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와 계약할 마음이 생겼다고 보면 될까요?”

조금 전까지 반말을 하며 거침없이 쏘아붙이던 기색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는 모습에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화가 나면 말이 짧아지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군.”

로엔은 그에게 목이 졸렸을 때 그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예의 차리고 말고가 있나요? 무엇보다 전 고귀하게 태어난 귀족들처럼 예의란 걸 몸에 두르고 태어난 게 아니라서요. 무식한 상인과 거래를 하려면 이런 무례함은 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뻔뻔한 대답에 진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리곤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는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붉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밀빛 머리카락도 붉게 보였다. 선이 또렷한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우아한 콧날까지.

여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달라. 온실 속 화초 같은 나약함은 절대 아니야.’

분명 여인은 제 말처럼 상인이 아니라 귀족이다. 그것도 명령에 익숙한 높은 신분의 귀족.

“이름이 뭐라고?”

“시모네타입니다. 칼라일에서 만물상점이라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요.”

거짓말 같진 않다. 그렇다면 진짜 신분을 숨기고 상인 행세를 하는 귀족인 모양이다.

“주로 뭘 팔지?”

“다. 의뢰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다 팔고 있어요. 레이디의 장신구부터 구하기 힘든 마법 재료까지. 딱 하나 구할 수 없었던 게 있었는데, 이제 그것도 구할 수 있게 되었네요.”

진은 로엔이 구할 수 없었던 딱 한 가지가 제 몸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이란 걸 깨달았다.

“계약은 네 능력을 시험한 후에 하기로 하지.”

“시험이라……. 좋아요. 대신 공작님께서도 제 시험에 응하신다는 조건이라면요.”

로엔의 건방진 태도에 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 마당에 공평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참, 제가 잊었네요. 공작님은 동등한 거래엔 익숙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말이에요.”

로엔은 조금 전 진이 했던 말을 꼬집었다.

“그런 게 불만이었다면 나와 계약하려 들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코가 석 잔지라 자존심을 세울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요.”

로엔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태도로 어깰 으쓱했다.

“먼저 네 조건이 뭔지 말해. 그다음에 내가 원하는 걸 말할 테니까.”

진의 말에 로엔이 고갤 끄덕인 후, 입고 있던 외투의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펼쳐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신문이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레이트 모먼트’의.

그리고 그 신문 1면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기사는 다름 아닌, 록스버그 공작이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청혼하는 내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