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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4화 (5/201)

4화

순간 픽 하고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예상대로 그저 그런 상인은 아닌 모양이다.

숨기고 싶겠지만 은연중에 드러나는 태도와 습관은 감출 수 없는 법이었다.

진이 그녀에게서 느낀 건 오랫동안 엄격하게 교육받은 귀족 특유의 우아함과 고귀한 자태였다.

‘정말 재미있군. 그런데 귀족가의 레이디들 중 저렇게 당차고 용기 있는 여인이 있었던가?’

사교계에 관심이 없어 잘 나가진 않았지만 저런 여인이 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있었다면 귀족들 사이에서 입방아를 찧어 댔을 테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 그의 귀에도 들어왔을 테니까.

모처럼 흥미가 일었다.

5년 동안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느껴 보지 못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예리하게 날 선 본능이 작고 여린 여인을 향해 가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위험하니, 당장 죽이라고.

“의외군. 난 너에게 살 기회를 준 건데, 오히려 죽을 자릴 찾아오다니 말이야.”

“기회였나요? 하지만 달갑진 않네요. 제가 원한 유형의 기회는 아니었거든요.”

로엔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진이 미간을 접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책상을 돌아 로엔 앞에 멈춰 섰다.

큰 키와 그가 뿜어낸 서늘한 냉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너무 무례하게 군 건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역시 재미있군. 내 예상을 빗겨 가는 대답 역시 흥미롭고.”

“제 대답에 흥미를 느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야 거래도…….”

“아니, 거래는 없을 거야. 넌 동등한 계약을 원했지만 우린 처음부터 동등한 관계가 아니거든. 넌 날 말릴 수 없을 테지. 내가 너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말이야.”

진의 느른한 미소에 로엔의 입매가 굳어졌다.

로엔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가 살려 주었기 때문이란 걸 분명히 했다.

계약의 우위를 점유하는 포식자는 바로 그라는 것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지 않은 모양이네요.”

“맞아. 난 너처럼 비밀이 드러나는 게 두렵지 않거든.”

그러고 보니 은둔자의 숲에서 그녀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는 저를 황제가 보낸 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초연한 얼굴을 했었다.

정말 두렵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것도 트릭?

“떳떳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폐하나 귀족들도 과연 공작님처럼 생각할까요? 황위 계승 서열 2위에 드래건의 심장까지 삼킨 로이슈덴 공작님을 보고 말이에요.”

불신이란 불쾌한 언어가 진의 입 안을 맴돌았다.

“너도 그 사기꾼이 했다는 예언을 믿는 모양이군.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는 헛소리를 말이야.”

“얼마 전까진 믿지 않았었죠.”

로엔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진을 보았다.

“설마 날 보고?”

“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을 줄을 몰랐거든요. ‘하늘과 땅이 섞이고 그 경계마저 허물어지는 시간.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고, 해가 지지 않는 7일간의 백야가 끝나는 날. 세상을 삼킬 검은 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로엔이 라딘의 서에 쓰여 있는 구절을 읊었다.

마치 아름다운 시를 암송하는 것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그 구절 속에 반역이란 단어는 한 마디도 없는데 말이야.”

로엔이 진을 보며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제가 집중하고 있는 구절은 그다음이거든요. 혹시 공작님은 다음 구절을 아시나요?”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두 사람을 감싼 고요하던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역시 다음 구절을 아는 모양이다.

『하늘에 떠오른 태양의 반지가 가리키는 한곳. 그곳에 선 자, 제국의 유일한 주인이 되리라.

-위대한 예언자 라딘의 서 중-』

200년 전 아드리안 제국의 건국과 함께 위대한 예언자 라딘이 제국의 미래를 점쳤다.

‘라딘의 서’라고 불리는 예언서엔 아드리안 제국과 타란 대륙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중 황실 비서(秘書)라는 명명 아래 존더부르크 황가에 대한 예언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예언이 아드리안 제국의 첫 번째 주인인 존더부르크 1세가 ‘호리우스의 눈’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타란 대륙에선 ‘호리우스의 눈을 가진 자, 타란 대륙을 얻는다.’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 라딘의 서를 신봉한 이가 존더부르크 1세라는 점에서 200년 동안 이뤄진 정복 전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으니까.

두 번째 예언으로는 황실에 검은 용의 피를 가진 자가 태어날 것이라 했다.

존더부르크 1세는 제 혈족 중 신비로운 힘을 가진 존재가 태어난다는 이 예언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급기야 타란 대륙에 있는 검은 용을 잡아 심장을 꺼낸 후 제 다섯 명의 아들들에게 먹이는 끔찍한 짓까지 저질렀다.

불행히도 그 결과는 참혹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라딘의 예언이 귀족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황좌를 꿈꾸는 자들이 드래건을 잡아 그 심장을 제 아들에게 먹인 것이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 아드리안의 황제가 되리라.’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까지 합세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어느새 그 소문은 돌고 돌아 존더부르크 1세에게 전해졌고, 황제는 황실의 일족 외에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는 행위는 반역이라 선포했다.

그리고 황좌를 욕심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귀족가를 멸족시켰다.

그 가문의 씨라곤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잔혹하게.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예언은 존더부르크 황실의 몰락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으로 라딘에 의해 마지막 예언이 행해진 후 존더부르크 1세는 라딘에게 금언령을 내렸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신관들의 목을 쳐 예언의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세 번째 예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전혀 없었다.

다만 ‘라딘의 서’의 마지막에 부분에 짧게 언급된 내용을 통해 존더부르크 황실의 몰락이 황후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타란의 검은 보석인 호리우스의 눈에 숨겨진 힘 중 하나가 바로,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 하더군요. 공작님은 폐하와 귀족들 앞에서 호리우스의 심판을 받을 수 있나요? 공작님의 신뢰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요.”

못 받을 이유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를 제외하면.

선대 로이슈덴 공작이자, 제 아버지는 금지된 마법에 심취해 제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했다.

감히 황족도 아닌, 일개 공작이었던 아버지는 반역이란 이름 아래, 황좌를 꿈꿨다.

그러니 여인의 말처럼 진실을 보는 호리우스의 눈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면 제 아비의 죄 역시 낱낱이 밝혀질 게 뻔했다.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사인 알렉을 통해 제가 태어나던 날 점성술사가 저택을 찾아왔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점성술사가 진이 존더부르크가가 이루지 못한 라딘의 예언을 이룰 존재라고 예언했고, 그 말을 신봉한 아버지는 타란 대륙을 샅샅이 뒤져 드래건의 심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황좌를 꿈꾸며 제 아들인 진에게 삼키게 한 것이다.

‘대신전에서 전한 신탁이 아니라, 일개 점성술사의 거짓 예언을 믿다니.’

이성적이며 냉철한 기사라는 평가를 받던 로이슈덴 공작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에 현혹되었다는 사실이 진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공작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공작님의 가슴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이 바로 반역의 증거가 될 것이란 거죠. 사람들은 신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요.”

진의 턱이 굳어지며 입매가 불쾌한 듯 실룩였다.

화는 나지만 그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이니까.

“검은 용이 실존하는 데다, 그 인물이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설의 기사라면 어떻게 될까요?”

“난 반역 따위 할 생각 없다.”

“알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했을 텐데요? 무엇보다 존더부르크 1세께선 황실의 일족이 아닌 자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면 반역이라 하셨죠. 거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요.”

고집스레 버티는 진을 보며, 로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라딘이 예언한 아드리안의 유일한 황제가 될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법령에 의해 아드리안의 황족은 존더부르크 가문 하나뿐이라고 적시되어 있지만, 그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로이슈덴 공작가 역시 황족이었다.

1대 로이슈덴 공작이 바로, 황제인 존더부르크 1세의 친동생이었으니까.

아마 지금의 황제인 에드윈은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황좌는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독점하는 법이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그를 도와 반역이라도 꾀해야 하는 건가?’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로엔은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깨끗이 지웠다.

로엔에겐 그가 누구든 중요하지 않았다. 반역 따위 꾀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로엔에게 중요한 건 그를 이용해 제가 먼저 사는 것이었다.

제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중화해 록스버그의 지독한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꼭 살 거야. 저주에서도 벗어날 거고. 내가 아니라, 날 위해 죽은 부모님을 위해서.’

로엔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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