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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3화 (4/201)

3화

“처음 본 순간 운명이라고 느꼈어. 절대 놓아서는 안 될 그런 인연 말이야.”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의 드레곤의 비늘이 꼭 필요했으니, 운명은 운명이었다.

그리고…….

로이슈덴 공작은 예측 불가능한 자였다. 그의 절박함을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사실 다음 날 바로는 아니더라도, 곧 만물상점으로 저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은둔자의 숲에서 저와 만났던 일 같은 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긴장을 늦춰선 안 돼. 그는 위험한 자야. 내가 그의 비밀을 안 이상,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저를 쏘아보던 은청색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공작님은요? 당연히 주인님께 첫눈에 반하신 거죠? 그래서 공개 구혼까지 하신 것이고요.”

세실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아닐걸?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거든.”

“설마 주인님이 누군지도 말씀해 주시지 않은 거예요?”

“말했지.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상인이라고.”

“그럼 공작님은 주인님을 평민으로 알고 계신다는 거죠? 아, 그래서 나타나지 않는 거였네요.”

세실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드리안 제국은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는 나라였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평민 여인은 귀족과의 연애는 물론 결혼도 불가능했다. 정부라면 모를까.

세실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제야 로이슈덴 공작이 록스버그 공작과 시모네타가 동일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안 모양이다.

“이런 일 있을 때마다 화가 나요. 주인님의 본 모습을 아무도 모르다니. 평상시엔 항상 검은 베일을 쓰고 다니시는 것도 안타깝고.”

세실 말처럼 로엔은 평소에 검은 베일을 쓰고 다녔다.

10년 동안이나 계속해 온 일이라, 불편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5년 전 시모네타란 상인의 신분으로 위장을 한 뒤론 지긋지긋한 베일을 벗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도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가 록스버그 공작과 같은 인물일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난 불만 없어. 장점도 꽤 있고. 우선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지 않아도 되잖아. 거기다 베일을 쓰고 있으면, 남들은 보지 못하는 진실을 간혹 보게 되거든. 소문이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현명한 자인지, 아니면 멍청인지.”

“그럼 로이슈덴 공작님은 멍청인가 보네요. 주인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세실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로엔이 동의하자, 세실이 이때다 싶었는지 공작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고 보니 로이슈덴 공작님에 대한 소문도 만만치 않는 것 같아요.”

로엔 역시 진을 둘러싼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성인이 된 그는 황제인 에드윈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향했다.

그가 전쟁터로 간 뒤 지지부진하던 게르피온과의 전쟁의 판세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도 칼라일에 승전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에 대한 명성과 인기 역시 높아 갔다.

“나도 그 소문 들었어. 5년 만에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타란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하던데?”

“어, 제가 말한 소문은 그게 아니라…….”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세실을 보며, 로엔이 짐짓 모르는 척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소문이라도 있어?”

“그게, 들리는 말로는 로이슈덴 공작님이 살인에 미친놈이래요. 적군의 심장을 맨손으로 꺼내 씹어 삼킨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했어요. 거기다 성격은 얼마나 까칠한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하던데요? 가깝게 지내는 기사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에요. 무엇보다 사교계엔 나오지도 않고요.”

“사교계엔 나도 잘 나가지 않잖아. 내 경우엔 괴물이란 별명 때문에 나와 가까워지려는 사람이 없는 거지만.”

“그건 엄연히 경우가 다르죠. 주인님은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을 멀리하는 거잖아요. 비밀을 감춰야 하니까요.”

“난 같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귀족들은 날 괴물로 보는 것이고, 그는 살인에 미친 악마로 보는 거니까.”

세실이 조금 놀란 듯 입술만 달싹였다. 제 주인이 로이슈덴 공작을 옹호하고 나설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설마 주인님은 벌써 공작님을 마음에 담으신 건가요? 무서운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세실의 물음에 로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의미에선 그런 것 같아. 나는 신문에 공개 구혼을 낼 만큼, 그를 원하거든.”

세실이 말하는 연정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그를 원했다.

더 엄밀히 말해 그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을 원했다.

“진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주인님은 그 소문이 가짜라고 생각하세요?”

“진실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손에 넣고 싶어.”

로엔의 대답에 세실이 입을 떡 벌렸다. 정말 놀랐다.

지금까지 남자에겐 관심도 없던 주인이었다.

그런데 공작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세실은 로엔이 앞으로 뭘 할지 알았다.

“저도 도울게요. 제가 뭘 하면 되는지 말씀해 주세요.”

불퉁하던 세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걸 보며, 로엔은 속으로 웃었다.

제 말을 근거로, 제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푹 빠져 무모한 짓을 벌인 것이라 결론을 낸 모양이다.

“당분간은 없어. 미끼를 풀어 놓았으니 물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

세실이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해요. 지금 칼라일은 주인님의 공개 구혼으로 난리가 났는데, 정작 그 당사자인 공작님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 보면요.”

“나도 그게 궁금해.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경험상 이 정도 스캔들이면, 수 십 번은 사교계가 발칵 뒤집혀야 했다.

가문의 평판 운운하며, 공개적으로 결투를 신청했어도 무방할 일이었으니까.

“흐음, 거참 신기하네요. 전 공작님이 주인님을 몰래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공개 구혼에 답하기 위해 그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세실,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절대 그럴 일 없어.”

로엔의 단호한 말투에 세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긍정하는 눈치였다.

“아마 굉장히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한 달 동안 그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로엔은 그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뭐,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라고 하더니. 내가 또 움직여야만 하는 모양이야.’

생각에 잠겨 있던 로엔이 갑자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 시각에 어딜 가시게요? 벌써 저녁이에요. 호위도 없이 나가셨다간 위험할지도 모른다고요.”

“걱정 마. 로이슈덴 공작저에 갈 거야.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를 봐야겠어. 그래야 폐하를 만났을 때 거래라도 해 볼 것 아냐.”

“지금 로이슈덴 공작저로 가신다고요?”

“맹수를 사냥하려면 맹수가 있는 숲으로 가야 하는 법이잖아.”

외투의 옷깃을 여민 로엔이 상점 문을 나서며 말했다.

“넌 먼저 돌아가. 집사와 유모에겐 저녁 먹기 전에 돌아가겠다고 전하고.”

문이 닫히기 전 얼빠진 표정을 한 세실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흥분으로 묘하게 심장이 뛴다.

10년 전 불행한 사고가 닥친 이후, 처음 갖는 느낌이다.

이런 충동적이고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 역시 저답지 않는 일이었다.

끝없는 고독과 절망.

그리고 제 명줄을 갉아먹는 록스버그의 저주.

그녀를 따라다니는 귀족들의 멸시와 조롱.

어둡고 음습한 생각들로 가득 찼던 제 머릿속에 떠오른 호기심이란 이질적인 감정은 분명 독이다.

제 몸속을 채운 저주받은 피처럼 당연히 없애야 할 맹독이었다.

그러나 걸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오히려 로이슈덴 공작저로 향하는 제 발걸음이 유난히 경쾌하기까지 했다.

* * *

“누가 찾아왔다고?”

“시모네타 만물상점의 주인이랍니다.”

집사 알렉의 말에 무표정하던 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주인의 표정을 살피던 알렉이 덧붙이듯 말했다.

“돌려보낼까요?”

“아니, 들여보내.”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알렉이 진을 응시했다. 뭔가 잘못들은 건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진이 다시 한 번 고갤 끄덕이자, 알렉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알렉이 서재를 나가자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언제나처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이유는 뻔뻔하게 공작저까지 찾아온 당돌함 때문이다.

“한 달이 한계였나? 아니지. 그날의 기세로는 당장에라도 찾아올 것 같더니, 딴엔 오래 기다렸는지도 모르겠군.”

은둔자의 숲에서 보았던, 저를 상인이라고 말했던 시모네타를 떠올렸다.

달빛을 받고 서 있던 여인은 청초한 겉모습과는 달리 당돌했다.

저를 쏘아보며 의뭉스런 제안을 하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유약하지 않았다.

“온실의 화초 같던 귀족가의 레이디들과는 차원이 다르긴 했어.”

뭐, 목까지 조르며 위협하던 그의 시선에 기가 죽기는커녕 도울 수 있다며 협박까지 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힘만으로 보자면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만큼 약한 상대였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자는 흔치 않지.’

무엇보다 시모네타는 저의 비밀을 빌미로 협상까지 하려 들었다.

“평범한 상인은 아닌 게 분명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그대로 보낸 것은.

평소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제 비밀을 안 여인을 죽였을 터였다.

반역이란 이름까지 들먹인 상대를 살려서 보낸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열렸다.

알렉의 안내를 받아 서재 안으로 들어오던 여인은 진을 발견하곤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빛이 여인의 우아한 움직임을 쫓아 너울거렸다.

허릴 숙였다 일어서는 일련의 몸짓에 은청색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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