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세실, 진정해.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주인의 지적에도 세실은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뭐, 그녀의 급한 성격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러다 제풀에 다치지 않을까 노파심이 들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너무 급한 마음에.”
“왜? 파엘라가 내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한 공개 구혼 광고 내 주기 싫대?”
“싫긴요. 록스버그 공작가의 일이라면 뭐든 도와주고 싶어 안달 난 분인데요. 사실 제가 신문사로 찾아갈 때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구인 광고라며, 좀 더 강력한 문구를 사용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할 정도라니까요. 그래서 신문 1면에 떡하니 기사를 내 준 거고요.”
로엔은 유명 신문사인 ‘그레이트 모먼트’의 주인인 파엘라를 떠올렸다.
분명 그의 성격이라면 지금보다 좀 더 파격적인 문구의 공개 구혼을 신문에 기재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파엘라와의 인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다 망해 가던 신문사를 지금의 명성과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지원한 게 바로, 록스버그 공작가였다.
다행히 파엘라는 돈이 없었을 뿐 머리가 비상한 상인이었다.
그리고 로엔은 아드리안 제국의 여론을 움직일 수단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신문사 ‘그레이트 모먼트’는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특히 파엘라는 사람들의 허영심과 욕망을 읽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를 십분 발휘해 5년 안에 ‘그레이트 모먼트’를 아드리안 제국 최고의 신문사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번처럼 터무니없는 공개 구혼 광고를 낸다고 했을 때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신문 1면에 실어 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신문사가 주인님 것이나 다름…….”
“쉿, 세실. 입조심해야지.”
로엔의 경고에 세실이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상점 안을 살폈다.
다행히 금요일 오후라 상점 안은 한가했다.
“그래도 무리한 요구였어. 록스버그 공작이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을 하는 기사를 신문에 싣다니.”
자칫 지금껏 쌓아 온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명성에 금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광고 문의가 쇄도하는 중이라고 하던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거리가 한산하네요. 오늘 밤 폐하께서 주최하는 무도회가 있다고 하더니, 다들 거기에 가실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한 달 후가 건국 기념일이네. 앞으로 바빠지겠어.”
“제국 최고의 축제 기간이니까요. 그런데 올해도 검술 시합이 열릴까요?”
검술 시합이란 말에 로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겠지. 200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이니까.”
“그럼 이번에도 출전하시게요? 저는 올해엔 안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믿을 만한 용병이라도 구해서 대신 내보내시는 건 어떨까요?”
세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얼마 전 유리엘라 광장에서 있었던 암살 미수 사건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물어? 입 아프게.”
당연히 출전한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세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검술 시합에 나갈 혈육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한 명쯤 더 낳으시지. 달랑 주인님만 낳으시다니. 두 분 금슬도 좋으셨다면서요?”
순간 로엔의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세실은 몰랐다. 혈독화를 가진 저를 열 달 동안 품고 있었던 공작부인은 출산과 함께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순진한 거야, 아님 뭘 모르는 거야? 남녀가 몸을 나누는 목적이 출산만은 아니잖아. 부모님 역시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로엔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전 공작부처의 은밀한 성생활에 대해 듣게 된 세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이제 성인인데 못 할 말이 어디 있다고. 신경 쓸 것 없어. 그런데 급하게 들어왔던 이유는 뭐야?”
“아참, 내 정신 좀 봐. 제가 이렇다니까요. 여기. 신문사에 다녀오다가, 길거리에서 집사님을 만났지 뭐예요. 평소라면 절대 여기까지 오실 분이 아닌데, 뭐가 급한지 이걸 주인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황궁에서 보냈다면서요.”
“스미스가?”
로엔은 재빨리 세실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았다.
봉투엔 황실을 상징하는 존더부르크의 표식이 붉은 인장에 찍혀 있었다.
로엔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에서 불의 마석을 꺼내, 서둘러 봉투 위의 붉은 인장을 녹였다.
그리곤 황제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또 돈을 내놓으래요? 정말 지독한 욕심쟁이라니까. 얼마 전에 세금으로 걷어 간 황금이 얼만데.”
로엔의 표정을 살피던, 세실이 불안한 표정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이제 정복 전쟁도 끝났으니 군수품비로 들어갈 세금이 고스란히 황실 금고에 쌓일 판인데 더는 뜯어 가진 않겠지. 그냥 내일 아침 황궁으로 들어오라는 내용이야.”
“내일 당장 폐하를 알현하러 가신다는 말씀이세요?”
“응.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세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세금이 아니면 특별히 교류도 없는 제 주인을 황궁으로 부를 이유가 없어서였다.
“설마 아직도 주인님을 황후로 맞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건 아닐 테죠?”
세실의 말에 로엔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폐하께선 이미 반년 전에 약혼하셨어.”
황제가 된 에드윈 존더부르크 8세가 황태자 시절에 록스버그 공작가의 유일한 상속녀인 로엔과의 약혼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10년 전 사건으로 인해 유야무야되긴 했지만, 가끔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참석할 때마다 에드윈은 그때 얘길 꺼내곤 했다.
귀족들은 에드윈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그로 인해 로엔에 대한 비난은 더욱 집요하고 잔혹해졌다.
가끔 황제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저를 괴롭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폐하도 평범한 성격은 아니시지. 가끔 보면 사디스트 기질도 있는 것 같고. 사람을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끼는 유형이랄까?”
뭔가 음흉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니 황태자였을 땐 그렇게까지 꼬인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검술과 승마를 함께 배우는 동안 그는 어린 로엔의 눈에도 동화 속 왕자님처럼 보였으니까.
뭐, 사실이 황태자이긴 했지만.
“폐하가 변태라는 말씀이세요?”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순간 로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나야 모르지. 폐하께서 그런 쪽의 취미를 갖고 있는지는. 뭐, 궁금하지도 않고.”
로엔은 무심한 눈빛으로 열린 문을 응시했다.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네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응. 생각보다 인내심이 강한 유형 같아. 지금껏 이렇게 날 기다리게 만든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야.”
로엔의 미소가 깊어졌다.
사실 은둔자의 숲에서 돌아온 후 제 성급했던 제안을 후회했다.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달이 다 지나가는 동안 후회는 불안으로 바뀌었고, 초조함이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결국 기다리는 대신 로엔이 먼저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세상에, 그래서 신문에다 공개 구혼을 하신 거였어요?”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께 공개 구혼합니다.
-록스버그 공작-』
“맞아.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나도 놀라는 중이야.”
초조함을 넘어서 이젠 기대가 됐다.
작은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상인이 록스버그 괴물 공작이란 사실을 모를 테니, 당장에라도 공작저로 쳐들어가 해명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로이슈덴 공작은 록스버그 공작저는 물론 만물상점에도 코빼기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
설마 신문을 보지 못한 건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교계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신문을 읽지 않을 리 없다.
파엘라를 통해 오전 6시면 로이슈덴 공작저에도 ‘그레이트 모먼트’가 배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였으니까.
‘그럼 무시한다는 건데…….’
로엔이 습관적으로 검지를 쓸었다.
진에게 제 비밀을 알려 주기 위해 직접 물어뜯어 상처를 낸 곳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엔이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가?”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첫눈에 반한 날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도 되지 않아서요. 아, 이제 알았다. 전승 퍼레이드가 있던 그날인 거죠?”
세실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러자 로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네?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요?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이러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다니까요.”
애매한 대답이 세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인내심 없는 세실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빨리 얘기해 달라는 듯 떼를 썼다.
그 모습에 로엔이 피식 웃었다.
유모의 딸이기도 한 세실은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로엔에겐 자매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세실의 철없는 행동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은둔자의 숲에서 봤어. 공작새의 눈물을 구하러 갔던 날.”
“정말 그곳에서 공작님을 뵀다고요?”
“응. 폭포수 아래 서 계셨어. 상의를 벗은 채로.”
로엔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첫눈에 반하신 거였네요. 전 또 괜스레 이상한 상상을 했지 뭐예요.”
첫눈에 반했다라…….
부인할 생각은 없다. 유리엘라 광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니까.
또한 은빛 폭포수 아래 서 있던 그는 첫눈에 반할 만큼 매혹적이기도 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다른 귀족가의 레이디들처럼 그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그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살아남은 자다.
심장에 검고 푸른빛이 나는 드래건의 비늘이 살아 숨 쉬는 듯 돋아나 있었다.
그 순간, 로엔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지독한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그가 아무리 매혹적인 사내라 해도, 그녀에게 더는 연애 대상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