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화 (2/201)

1화

은청색이었다.

잘 벼린 검날 같은 눈빛이 냉기를 품고 로엔에게 날아들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엔 맹수의 잔혹함만이 감돌았다.

위험하다. 도망치거나, 숨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늦은 건가?’

로엔은 덫에 걸린 초식동물처럼 두려움에 숨을 삼켰다.

그다.

로엔이 암살자에게 습격을 당하던 그날, 검은 말 위에 앉아 있던 기사.

2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이자, 로이슈덴 공작가의 주인.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아주 잠깐, 그것도 멀리서 눈이 마주친 것뿐이었지만 그녀의 뇌에 각인된 그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말도 안 돼! 그가 왜……?”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려는 순간 로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경악으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아, 이런…….’

보지 말아야 할 걸 봐 버린 모양이다.

달빛 아래 서서 그녀 쪽으로 완전히 몸을 튼 진의 표정 역시 위험스럽게 변했다.

“왜 그의 심장에 드래건의 비늘이……?”

검은 드래건의 비늘은 인간의 몸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녀가 본 게 사실이라면 그는 전설로만 존재하는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일 것이다.

‘대체…… 믿기지 않아.’

로엔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위에 몸을 기댔다.

놀란 나머지 머리에 쓰고 있던 외투의 후드가 흘러내린 것도 깨닫지 못했다.

달빛이 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안으로 스몄다.

답답한 듯 얼굴의 반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 역시 끌어 내리자, 순식간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반듯한 이마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뺨. 그리고 귀족적으로 휘어진 입술과 곧은 콧날까지.

따뜻한 바람이 깃털처럼 다가와 지친 로엔의 얼굴을 감쌌다.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에 진이 다가오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평소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다.

“헉!”

목에 닿는 차가운 냉기에 고갤 들자,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팽팽하게 날 선 공기가 위험을 경고하듯 얼어붙는다.

두렵다.

로엔은 처음 느껴 보는 공포에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제 목을 쥔 커다란 손이 서서히 조여 와 숨쉬기가 버겁다.

그에게선 온통 피 냄새가 났다.

분명 그의 몸엔 피 따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그에겐 살육의 냄새가 났다.

광기에 사로잡힌 잔혹한 맹수처럼.

“누가 보낸 거지?”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선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 들었지만 우습게도 로엔은 그의 목소리가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죽음 직전에 놓이자, 이제 미친 모양이다.

“황제가 보냈나?”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무감하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지레 포기한 듯이.

로엔은 그 순간 깨달았다.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이 숨기려 한 비밀이 무엇인지.

그리고 제 비밀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있다는 걸.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로부터 살아날 방법이.

아니, 죽음 따위가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목줄을 쥐게 될 기회일 수도 있다.

다만 그녀가 무탈히 이 숲을 빠져나가야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드래건의 비늘은 반역의 상징이라고 하던데…….”

로엔의 도발에 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무감하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날 선 살기로 번뜩였다.

“그럼 죽어야겠군. 널 살려 두면 내가 죽게 될 테니까.”

목을 쥔 손에 힘이 가해지자, 로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숨이 턱 막히며,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방법을 알아.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효과가 있었는지 희미한 그녀의 목소리에 목을 옥죄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로엔은 제 말에 동요하는 그를 보며, 그녀의 목을 죄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날 죽이면 후회하게 될 거야. 네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자를 네 손으로 없앤 것이 될 테니까.”

“어떻게 믿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저 역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자에게 제 비밀을 들킨다면, 달콤한 유혹을 가장 경계할 테니까.

그러나 위험한 비밀을 품어 본 자는 다르다.

그 절박함을 아는 자는 희망이라는 아주 작은 진실 하나만 흘려도 그의 견고한 벽에 균열이 생길 터였다.

저처럼…….

“나도 너와 똑같거든.”

로엔이 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이가 살을 찢자, 아릿한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입술을 따라 흘러내렸다.

순간 숲의 공기 사이로 비릿한 혈 향과 함께 짙은 꽃 향이 두 사람을 감쌌다.

혈 향 안에 숨겨진 꽃 향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진이 그녀의 목을 쥔 손을 놓곤,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믿을 수 없지만, 혈독이다.

여인의 작은 몸속에 흐르는 피가 맹독인 것이다.

“콜록, 콜록!”

갑작스럽게 풀려나자 로엔은 어깰 뒤흔들며 기침을 했다.

부족했던 공기를 채우기 위해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셨기 때문이다.

기침이 잦아들고서야 로엔은 허릴 펴고 몸을 똑바로 했다.

그리곤 저를 쏘아보는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네 표정을 보니 내가 누군지 설명할 필요도 없겠어.”

“너, 누구야? 왜 금지된 주술이…….”

금지된 주술 따위가 아니다. 더 집요하고 악랄한 저주일 뿐.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너 역시 그런 걸 내게 물을 처진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직접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게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쏘아보는 눈빛을 보니 똑같이 저주받은 처지에 다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표정이다.

로엔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 손에 흐르는 피를 붉은 혀로 천천히 핥았다.

초식 동물이 제 상처를 치료하듯 붉은 혀가 상처 난 손가락을 핥아 내렸다.

그러자 공기 중에 떠돌던 향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이에 뜯겼던 상처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끈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진은 천천히 코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 냈다.

“내가 누군지는 아는 모양이군. 그러니 이제 네 차례다. 어떻게 해야 널 만날 수 있는지 말해.”

그의 물음에 로엔은 당장에라도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그는 알까?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지를?’

아니, 당연히 알 리 없다. 알았다면 그는 날 지금 이 자리에서 죽였을 테니까.

로엔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막 동료가 된 자에게나 하듯 손을 내밀며 제 또 다른 이름을 댔다.

비밀을 공유했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 놓을 의무는 없는 법이니까.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으로 와. 내가 그 상점의 주인이거든.”

그는 제 손을 잡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는지 앞에 내밀어진 손을 쏘아볼 뿐이다.

로엔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곳에서 그토록 찾아 왔던 저주를 풀 실마리를 잡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흥분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제 감정을 밖으로 쏟아 낼 만큼 로엔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그럼 넌 그 대가로 뭘 원하지?”

“공평한 거래.”

공평이라. 제가 말하고도 비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 제가 말한 공평한 거래는 그에겐 독배를 삼키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일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할 테니 상관없다.

만약 안다고 해도 그는 제 손을 놓을 수 없을 터다.

아드리안 제국 최고의 기사 가문.

‘부러지지 않는 검’이라 불리는 로이슈덴 공작가가 반역자란 불명예를 갖고 무너져 내리는 것은 원치 않을 테니까.

드디어, 200년 동안 철저히 침묵하던 비밀이 마침내 깨어지려 한다.

‘대예언가 라딘의 예언이 사실일 줄이야.’

뭐, 상관은 없다. 이젠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는 눈앞의 희생양을 발판 삼아.

* * *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나무문이 빠르게 열렸다.

기분 좋게 부유하던 공기 조급한 방해꾼에 의해 깨어지며, 열린 문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 들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휴식을 즐기던 로엔은 한숨을 내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우아하게 호를 그리며 휘어진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드디어 온 건가?’

한 달이었다.

은둔자의 숲에서 로이슈덴 공작과 헤어진 후, 로엔은 한 달 내내 이곳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런 그가 이제야 나타난 모양이다.

로엔이 긴장을 숨긴 채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나 이체를 띠며 풍성한 금색의 속눈썹 속에 감춰졌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곧 실망한 기색이 스며들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온 이는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로이슈덴 공작이 아닌, 세실이었다.

상점으로 오는 중간에 돌풍이라도 만난 듯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론 드레스 위에 걸친 앞치마 역시 헤집어져 있었다.

“그 꼴은 대체 뭐야?”

헐레벌떡 상점 안으로 들어서던 세실이 걸음을 멈추더니, 재빨리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후다닥 로엔 앞에 섰다.

“주인님! 제가 뭘 가져왔는지 맞혀 보세요.”

손을 등 뒤로 숨긴 걸 보니 뭔가를 감추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방문객이 오지 않은 시점에서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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