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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0화 (1/201)

[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 ]

프롤로그 ‘은둔자의 숲’은 언제나 그렇듯 달빛 한 점 없이 어둡다.

숲을 가득 채운 어둠은 붙여진 이름처럼 방문자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서늘한 기운마저 내뿜는다.

익숙하게 숲을 가로지르던 로엔 시모네타 록스버그는 걸음을 멈추곤 주위를 경계했다.

가쁘게 숨을 내쉴 때마다 폐부를 뚫고 들어오는 서늘한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아직 무리였나?”

한 달 전, 또다시 암살 시도가 있었다.

열 살 이후 10년 동안 심심치 않게 벌어졌던 일이라 특별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제가 로엔 시모네타 록스버그가 아닌, 또 다른 신분으로 그곳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잘 감춰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또다시 불안이 엄습했다.

몸속에 흐르는 차갑고도 진득한 피가 독버섯처럼 퍼지며 불안을 가중시킨다.

로엔 시모네타 록스버그.

록스버그 공작가의 작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상속녀이자, 10년 전 마차 사고로 부모를 잃고 온몸에 흉터를 가진 고아.

귀족들은 불행한 사고 후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그녀에게 ‘불행을 몰고 다니는 괴물.’이라 손가락질했다.

하루아침에 보호막을 잃은 부유한 상속녀는 맨몸으로 사교계란 잔혹한 사냥터에 던져졌고, 이리 떼처럼 달려들어 급소를 물고 뼈와 살까지 발라내려는 자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록스버그 공작가를 지켜야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시간은 몸과 마음에 생긴 상처를 낫게 했고, 고통을 무디게 했다.

그리고 상처 위에 딱지가 앉고 단단해진 심장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의 잔혹한 혀와 암살자의 검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로엔 시모네타 록스버그 공작은 잔인한 현실에서 꿋꿋이 살아남았다.

로엔은 굳은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긴장한 탓일까? 자주 오던 숲인데도 오늘은 자꾸만 걸음이 늦어진다.

로엔은 초조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11시. 자정이 되려면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은둔자의 숲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르구스의 절벽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로엔은 회중시계를 다시 품속에 밀어 넣고는 발을 재개 놀렸다.

“하아, 하.”

걸음을 재촉할수록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을 뚫고 더운 숨결이 뿌연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흩뿌려진다.

로엔은 심장을 옥죄는 날카로운 감각을 무시했다.

‘제길, 아직 다 회복되지 않다니…….’

로엔은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한 달 전 암살자가 쓴 건, 다름 아닌 독이었다.

우습게도 해독제도 없는 독에 당하고도 살아날 수 있었던 건, 록스버그 공작가에 전해지는 저주 때문이었다.

가문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록스버그의 저주는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록스버그의 여자아이는 모두 심장에 꽃을 품고 태어난다.』

‘혈독화’라 불리는, 심장에 핀 아름다운 꽃은 맹독을 품고 있어 아이가 생명을 갈구하며 숨을 쉴 때마다 맹독이 심장으로 파고들어 핏속에 독을 품게 했다.

딱 100일이었다. 온몸에 맹독을 품게 된 아이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잔인해. 살기 위해 절박하게 숨을 들이마실수록, 죽음에 더 가까워지다니.’

로엔 역시 예외 없이, 절망적인 록스버그의 저주 속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로엔 역시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로엔은 살아남았다.

선대 공작인 로엔의 아버지는 이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로엔이 록스버그의 저주를 풀 열쇠라고 생각했다.

「금환일식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라딘의 예언서에 언급되었던 그 일식이 록스버그의 저주와도 상관이 있는 것 같고. 로엔, 알아내야 해. 존더부르크 1세가 숨긴 세 번째 라딘의 예언을.」

마차 사고가 있었던 날,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가 로엔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금환일식이라.’

로엔은 아버지를 통해 제가 태어나던 그날의 광경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환하던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태양과 달이 완벽하게 일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핏빛처럼 붉은 반지의 형태가 어두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며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시간에 로엔이 태어났다고.

아마 달이 태양을 집어삼킨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일식이 네 심장에 핀 혈독화에게 영향을 미쳐, 살아남은 것 같다고.

그 후 아버지는 일식과 록스버그의 저주와의 연관성을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고서와 비밀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나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로엔에게 일어난 일은 록스버그가에 최초의 기적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상관없다고 했다. 저주 따위 풀지 못한다 해도, 제 딸이 살아남았으니 상관없다고.

‘왜 그땐 몰랐던 걸까? 내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 아니라 지독한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심장에 새겨진 혈독화가 제 죄의 증거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끊어 내고 싶어. 이 지독한 목숨 줄을.’

그러나 로엔은 알고 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는 걸. 그리고 저주받은 운명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이것 역시 부모를 죽이고, 살아남은 대가니까.’

로엔은 손끝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마차 사고로 생겼던 흉측한 상처가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끈했다.

‘이것 역시 죄의 증거일 뿐이지.’

로엔은 허망하게 웃었다.

사고 후 제 몸속에 흐르는 맹독이 제 상처를 치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암살자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끔찍해.’

제 몸속에 흐르는 피는 저주다.

저를 치료하고 살게 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치명적이고 잔혹한 독이었다.

그로 인해, 제 부모 역시 죽었다.

사실은 사고 때문이 아니라, 제가 흘린 피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로엔은 지독한 죄책감과 함께 진득하게 따라붙는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어두운 장막을 뚫고 아르구스의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쐐기풀이 마녀의 혀처럼 다리에 들러붙었다.

로엔은 작게 욕설을 뱉어 내며 단검을 꺼내 쐐기풀을 잘라 냈다.

그러나 힘없이 잘려 나간 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제 다릴 휘감아 온다.

“끈질기군. 마치 숲에 주술이라도 걸어 놓은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단검으로 잘라 내는데도 끊임없이 엉겨 붙을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숲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다르다.

몸에 남은 독을 해독하기 위해 공작새의 눈물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공작새의 둥지가 있는 아르구스의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변화는 확연했다.

서늘하던 숲의 공기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로엔은 뺨에 닿는 냉기가 어느새 새의 깃털처럼 포근하게 바뀐 걸 느끼고는 입매를 굳혔다.

뭐지? 한 달 사이에 숲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변하다니…….

제가 독에 중독돼 침실에 누워 있는 동안 이곳에도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다.

“공작새의 눈물.”

위대한 예언가가 저술한 ‘라딘의 서’에는 여신의 파수꾼이라 알려진 공작새가 흘린 눈물이 폭포수에 섞여 특별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 힘을 믿는 자들이 종종 공작새의 눈물을 받기 위해 은둔자의 숲으로 찾아왔다.

지금 로엔이 그런 것처럼.

절벽이 보이자, 로엔은 숨을 죽인 채 풀숲에 몸을 숨겼다.

그리곤 아르구스 절벽에서 떨어지는 은빛 폭포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내 로엔의 시선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한 거대한 새의 둥지에 머물렀다.

“이상해. 왜 공작새가 알을 품고 있지 않은 거지? 분명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한참이나…….”

로엔은 평소와 달리 묘하게 어긋나는 일련의 일들로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돌아가는 게 좋을까?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로엔은 손바닥을 펴 입고 있는 검은 외투에 문질렀다.

긴장이 되는지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심장 역시 평소와 달리 빠르게 뛴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순 없어.’

지금 돌아가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믐이었다. 달의 기운이 가장 충만해지는 오늘이 로엔의 몸속에 흐르는 맹독이 가장 강해질 시기였다.

그러니 공작새의 눈물을 삼켜 독의 기운을 해독해야 했다.

로엔은 발소리를 죽이며 호수 근처까지 움직였다. 다행히 공작새는 침입자를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로엔은 커다란 바위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채, 공작새가 잠기 들기를 기다렸다.

1분 1초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다.

“지금인 건가?”

로엔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호수로 발을 디디려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몸을 숨기고 있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은빛 폭포수 아래 누군가 있다.

낯선 자를 살피기 위해 고갤 든 순간, 로엔은 놀라 숨을 삼켰다.

사내였다.

그는 부서지는 은빛 폭포수를 온몸으로 맞으며 서 있었다.

물에 젖은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휘감은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다.

강인해 보이는 턱 선 아래 유려하게 호를 그리며 붙어 있는 탄탄한 어깨와 가슴 근육이 물에 젖어 야릇했다.

숨이 막혔다. 당장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음란하게 사내의 몸을 탐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홀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껏 한 번도 사내의 몸을 보고 이런 식으로 느낀 적이 없었는데…….

사내가 뿜어내는 신비롭고 강인한 존재감에 로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사내 역시 시선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갤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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