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전운
황후와 만남을 가지고 난 후, 며칠이 흘렀다.
생각보다 황후는 아주 호의적이었고 의욕적이었다. 덕분에 프시케가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만약 황후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황제의 차나 음식에 해독제를 탈 암살자라도 구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황후가 흔쾌히 그녀의 계획에 동의함으로 인해 일은 생각보다 조금 더 쉽게 풀리고 있었다.
덕분에 프시케는 날이 지날수록 안정을 찾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녀가 만든 해독제가 흑주술에 아주 잘 통했다. 프시케를 옥죄던 주술의 기운도 나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황제를 해독하는 것도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문제는 황제의 흑주술을 푸는 것이 아니었다.
‘사라.’ 아니. 레이첼이 준 이름을 계속 쓸 수 없어 프시케는 그녀에게 ‘릴리’라는 이름을 우선 주었다. 그녀에게 프시케가 자신이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첼에게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연거푸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곤 했다.
제대로 된 이름은 클린트와 함께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일단은 아쉬운 대로 ‘릴리’라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빠르게 새로운 이름에 적응했다. 애초에 사라라는 이름에 애정이 있지도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나마 프시케를 만난 이후로 꽤 혈색을 찾았다.
프시케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수프를 떠먹다 말고 제 앞에 마주 앉은 릴리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매 끼니 릴리와 같이 식사를 하지만 릴리의 모습은 여전히 신기하기만 했다. 제 아이가 살아 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프시케는 가만히 릴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살이 오른 느낌이어서 조금 보기가 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얇은 손목이 유독 눈에 띄었다. 릴리는 한 손에 빵을 들고, 한 손에는 포크에 고길 찍은 채 들고 있었다.
“좀 천천히 먹어도 돼. 먹을 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그 말에 프시케는 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레이첼은 그저 릴리를 데리고 있기만 했지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프시케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막 대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방금 상황처럼 릴리는 ‘죄송합니다.’ 혹은 ‘용서해 주세요’ 등의 말이 아주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모든 상황에서 그녀는 먼저 사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것이 레이첼과 함께 그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해 단적으로라도 보여 주는 것 같아 프시케는 마음이 아주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릴리는 음식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그 때문에 체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레이첼은 먹는 것마저 릴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프시케는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기 위해 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걸로 죄송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아, 죄송……. 아.”
그 말에 릴리가 또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다 입을 막았다. 프시케는 제가 한 말이 괜히 그녀를 옥죄는 말이 될까 얼른 손사래를 치며 다시 웃어 보였다.
“아냐, 아냐. 편하게 먹어. 천천히. 또 체할라.”
프시케의 눈치를 슬그머니 본 릴리는 그에 급하게 고기를 왕 입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프시케는 여러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
릴리에게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릴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레이첼의 흑주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프시케나 황제처럼 단순히 해독제로 풀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어서 그녀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괜히 흑주술을 풀었다가 릴리가 목숨이라도 잃으면 그 후의 일은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프시케는 제 앞에서 허겁지겁 먹는 릴리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맛있어?”
“녜?”
입에 음식이 든 채라 그런지 발음이 뭉개졌다. 릴리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에 든 음식을 크게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그것이 목에 걸렸는지 캑캑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러게 천천히 먹으라고……! 괜찮니?”
놀란 프시케가 얼른 일어나 물을 건네며 등을 토닥였다.
릴리는 토끼처럼 발개진 눈을 하고 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프시케는 이 상황에 속이 쓰렸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아침 식사가 끝이 났다.
릴리를 들여보내고,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푸르른 녹음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소란한 제 상황과는 상관없이 고요하고 아름답기만 한 경관이 도리어 야속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숲속의 임시거처를 마련한 터라 그녀는 어디서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창가로 노란 햇살이 숲을 들여왔다. 때로는 바람이 싱그러운 녹음을 불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녀의 마음은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자연이 무슨 죄가 있나. 그녀는 오전의 볕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침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온 클로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쉬고 계신 것을 방해한 겁니까.”
“아냐. 어차피 일어나려고 했었어.”
그 말에 고갤 끄덕인 클로드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다시 다물었다.
머뭇거리는 모양새에 프시케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네 할 말 다 할거잖아. 말해.”
클로드는 번화가에 들러 동향도 살피고 오는 길이었다.
황후의 심복과 만나러 가는 김에 이런저런 소문도 함께 가져왔다.
“황제 폐하의 해독은 순적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다행이네.”
“그리고 곧 흑주술 금지령도 내려진다고 합니다.”
“그래. 좋다.”
감정 없이 추임새를 넣는 모습에 클로드가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아니지?”
“예……. 그게…….”
밖에는 묘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공작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 황제가 이상한 병에 걸렸다는 소문 등이 마구잡이로 나돌고 있었다.
그중에 공작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은 그냥 지나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클로드는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음……. 이제 공작님께 부인의 상태를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
프시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렉사를 보냈으니……. 지금쯤 클린트도 알지 않았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합니다. 알고도 남을 시간인데.”
“…….”
알렉사에게 자신의 생사를 알리라는 명을 따로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클린트에게 프시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알렉사를 그에게 보내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프시케는 달리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인지 영 몸이 무겁고 정신도 맑지가 않았다.
또 릴리의 문제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프시케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레이첼만 해결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고, 이미 황후와 손을 잡고 황제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그러니 종래에는 누구보다 클린트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이 상황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에게 전달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우선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생각보다 알렉사가 늦네.”
프시케는 알렉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공작께서 계속 움직이고 계시니 길이 엇갈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수도 있겠다.”
몸도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했고 릴리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으니.
또 이쯤 했으면 레이첼이 프시케가 죽었다는 사실에 의심을 갖지 않을 만한 시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사람을 보내.”
그 말에 클로드가 모처럼 밝은 얼굴을 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자신만 프시케의 생존 사실을 아는 것이 후일 결코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프시케의 일에 관련되면 이성을 잃곤 했기에.
그리 생각하자 클로드는 괜히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프시케와 둘 사이가 오해를 받은 전적이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 늦었다간 자신이 목을 닦고 죽음을 기다려야 할 판이 될 것 같아 그는 몸을 사렸다.
질투에 눈이 먼 공작의 얼굴이 이유 없이 떠올랐다. 살기가 등등한 눈빛이 그려지자 클로드는 몸을 떨고는 서둘러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공작이 프시케의 곁에 있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클로드는 발이 빠른 사람을 보내 얼른 클린트에게 프시케의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클린트는 그나마 믿을 만한 용병 발락을 고용했다. 프시케의 생존 소식을 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