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20. Epilogue: 엔딩 이후의 세계
환한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중립국 페르가나의 교육 도시인 레반, 팔미라 지구의 작은 광장을 낀 3번가의 작은 집에도 공평하게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작은 정원과 후원이 딸린 2층집은 소박하고 아담했다. 붉은 벽돌 위로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에, 담벼락에는 장미 넝쿨이 다소 야생적으로 자라 분홍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소란은 그 2층집의 위층에서 시작되었다.
“느, 늦었다!”
거의 꽥 하는 비명과 함께, 유리는 헝클어진 은발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푹 자고 일어난 날, 몸이 가뿐하고 햇살이 따사로워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지각임을 알 수 있는 그런 날이.
유리에겐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7시 30분……!”
대지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에 맞출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면 아직 수습의 여지는 있었다. 유리는 작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침대에서 구르듯이 내려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맞은편에 위치한 화장실로 쳐들어갔다.
카미엘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통해 아내의 동선을 파악하면서 씨익 웃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놀란 아내와 달리,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요리하고 있었다.
프라이팬 속에서는 이리저리 뒤섞인 계란 세 알이 비명을 지르며 처참한 형상으로 익어 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아침 식사가 어떤 꼴로 조리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리는 옷장에서 옷을 집어 꺼내느라 바빴다.
흰 셔츠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치마, 그리고 옅은 노란색 카디건.
두피가 긁힐 정도로 벅벅 빗은 머리카락에 물을 발라 정전기를 정리하고, 유리는 두다다다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 시각, 카미엘은 아내를 위한 소꿉놀이에 잔뜩 심취해 있었다. 그는 얼룩덜룩하게 익은 오믈렛 — 이고 싶었던 무언가를 접시에 덜고, 화분에서 줄기째로 갈취한 바질 잎사귀를 전위적인 모양으로 장식했다.
“카미엘! 왜 안 깨웠어요?”
“응? 나야 자기 아침 차리고 있었지.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
“제발, 일어났으면, 날 좀 먼저, 깨워 달라고……!”
아침부터 아내에게 멱살을 잡혔지만, 카미엘은 하하 웃을 뿐이었다. 무엇도 지금 이 순간 그의 행복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멱살을 잡힌 채로 유리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하며 말했다.
“자기야, 아침 먹어야지.”
“애초에 내가 이렇게 늦게 일어나게 된 것도 당신 탓이잖아!”
카미엘은 수줍게 웃었다.
“어젯밤의 내 노력을 알아준다니 기쁜데.”
“$%#$^^%!!!”
유리는 문자로 형상화할 수 없는 비명을 꽥 내질렀다.
하지만 곧 그녀도 행복 120%로 무장한 카미엘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카미엘은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하고 한탄하는 아내를 끌어다가 식탁 앞에 앉혔다.
“식사를 해야 출근도 하지.”
“당신 가끔 진짜 죽이고 싶다.”
“사랑한다는 거지? 알았어.”
가당찮다는 듯 카미엘을 노려보면서도 유리는 포크를 들었다. 아무리 늦어도 카미엘이 차려 준 아침은 먹어야 했다. 안 그러면 남편이 너무 상심한 나머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유리는 전투적으로 오믈렛을 푹 찔렀다. 무슨 의도인지 안에 들어 있는 케첩이 피처럼 튀었다.
우물우물우물. 카미엘은 자신을 노려보며 계란을 삼키는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계란 껍질이 안 들어 있다는 점에서 합격점…….”
“해냈다.”
그만하면 요리에 성공한 거라고 믿는 카미엘은 느긋하게 식탁에 팔을 쭉 뻗고 얼굴을 괴었다. 그리고 분이 안 가신 표정으로 너무 익어 질겨진 계란을 강철같이 씹어 대는 아내를 구경했다.
“그믄 츠드브르 즌쯔.”
“그러기엔 여보가 너무 사랑스러운걸.”
유리는 그쯤에서 소통을 포기했다.
카미엘은 그런 줄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자기,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되나?”
“미쳤죠 진짜?”
“오늘 하루 종일 나랑만 있자.”
“어제가 일요일이었잖아!”
“어제 하루 가지곤 모자라.”
“자랑이다, 자랑이야!”
넌더리를 내면서도 유리는 붉어진 뺨을 감추지 못했다. 카미엘은 거의 황홀해서 돌아 버리겠다는 듯한 얼굴로 아내의 발그레해진 뺨을 바라보았다.
너무 귀여워서 씹어 먹고 싶었다.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려고 들면 진짜로 아내가 저를 죽이려 들겠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손이라면 죽는 척이라도 해 줄 수 있었지만 — 카미엘은 이 험한 세상에 유리만 내버려 두고 죽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그러기를 각오하고 덤볐다가는 유리가 정말로 폭발할 것이었으므로 참았다.
‘이만하면 나, 정말로 훌륭한 남편 아닐까?’
유리가 듣는다면 속 터질 속마음이었다.
“조교수 주제에 자꾸 휴가 내고 그러면 눈치 보인단 말이야. 얌전히 있어야 이번 주말에 또 같이 시간 보낼 수 있게 노력을 하죠.”
툴툴대면서도 저를 달래 준다. 카미엘은 그게 좋아서 일부러 더 치대곤 했다.
“노력을 못 하면 이번 주말도 날아갈 수 있다는 뜻이야?”
페르가나 아카데미에서 정화력에 관련한 강의를 완벽하게 해낸 이후, 감명을 받은 학장은 유리를 즉시 조교수로 채용했다.
비록 마법에 대한 소양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유리는 정화력에 관한 한 이 대륙의 유일한 전문가였다. 페르가나는 그 점을 아주 높이 샀다.
장난도 아니고 교수님 소리를 듣게 된 이상 유리는 이 일을 대충 할 생각이 없었다.
“당신, 우리 집이 외벌이 가정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죠?”
“자기, 집에서 살림한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설마?”
카미엘이 살랑거리며 물었다. 유리는 기가 차서 웃었다. 카미엘은 최근 ‘집에서 살림만 하는 백수 남편’ 놀이에 몹시 심취해 있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에 따르자면 유리는 두 사람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악독한 페르가나 아카데미에서 뼈를 갈아 근무하는 가장이었고, 카미엘 자신은 그런 가장을 존경하며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알뜰한 가정 주부였다.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 유리는 코웃음을 쳤다.
“노는 건 좋지만 현실을 잊은 건 아니죠?”
정작 이 집 — 규모는 작지만 중심가에 위치해 지대가 장난 아닌 — 을 산 것도 카미엘이었고, 풍족한 살림의 재력을 담당하는 것도 카미엘 쪽이었다. 유리는 제 조교수 월급이 이런 값비싼 소꿉장난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환상을 깨지 말아 주라.”
“네에, 네.”
대강대강 대답하며, 유리는 카미엘이 챙겨 주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불평을 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카미엘의 맛없는 아침식사를 참아 준다는 점에서 자신도 이미 이 소꿉장난에 훌륭하게 어울려 주고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 *
기운차게 출근하는 유리를 배웅한 다음, 카미엘은 허리에 맨 앞치마에 손을 닦는 척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이 근방 사람들로부터 ‘교수님 댁’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집은 작약, 수국, 여러 종류의 장미가 철 따라 피어나는 소담한 정원으로도 유명했다.
카미엘은 그 아름다운 작은 정원을 지나 집으로 들어와, 부엌으로 다시 돌아왔다.
창가의 커튼을 치고, 유리가 여기저기 널브러뜨리고 간 식기를 정리하노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괴멸적인 요리 솜씨는 초기에 비해 나아진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리하고 설거지하는 솜씨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젠 접시를 깨 먹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정리를 마친 다음, 카미엘은 창가에 놓인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
바로 이 그린 듯한 행복을 위해 제라늄 화분이 이미 30개쯤 죽어 나갔고, 지금 있는 화분도 과습으로 썩어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거야 카미엘이 알 바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카미엘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유리를 출근시키고 나서 간단히 정리를 마치고 늘어지게 자다가, 점심때가 지나서 일어나 느지막하게 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집 안을 치운다. 서툰 솜씨로 빨래를 해서 뒷마당에 널고(가끔 이러다가 빨래가 찢어지기도 했다), 말끔하게 청소를 한 바닥에 왁스를 먹이고(유리가 미끄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 먼지를 털고 물건의 배치를 조금씩 바꾸기도 하는 그 모든 과정을 카미엘은 진심으로 즐겼다.
대공 전하의 이런 밀월에 속이 터져 나가는 사람들이야, 물론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 유리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카미엘은 장바구니와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 집안일로 더러워진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미모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살뜰히 점검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치고, 아카데미 쪽으로 출발한다.
매번 찾아오는 카미엘 때문에 유리는 퇴근 시간을 꼭 지켰다. 사실 그러기 위해 매일 한 시간쯤 일찍 출근을 하곤 했다.
“카미엘! 기다렸어요?”
“조금?”
눈웃음을 치며 대답하면서, 카미엘은 은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카데미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카미엘은 계산적으로 유리의 관자놀이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누가 보면 한 석 달쯤 못 만난 사람인 줄 알겠어요.”
“체감상으론 거의 그런데.”
과시용 스킨십을 마친 카미엘이 유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리도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도 장 보러 가요?”
“계란을 다 썼어.”
사실 유리가 아침에 먹은 질긴 오믈렛도 다섯 개쯤 계란을 낭비하고 나서 얻어 낸 결과물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시장은 이미 퇴근하고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토마토가 싸네. 살까?”
“토마토로 뭘 할 수는 있어요?”
“썰어서 설탕을 뿌리는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흠. 유리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답게 결재를 내렸다.
“다섯 개만 사죠.”
카미엘이 토마토 다섯 개를 집어 얼른 값을 치렀다.
사실 집에서 먹는 건 아침 식사나 카미엘의 간단한 점심뿐이고, 두 사람 다 요리를 못 하기 때문에 저녁은 주로 사 먹는 편이었다.
이렇게 매일 장을 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엘은 매일 저녁 유리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잗다란 물건을 사들이는 걸 즐겼다.
대충 장보기 놀이를 마친 다음, 둘은 자주 들러 저녁을 해결하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아이고, 교수님이 또 오셨네!”
“한스, 반가워요.”
“어서 와요, 둘 다. 아이고, 남편분은 오늘도 얼굴이 훤하시네.”
카미엘과 유리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메뉴는 조개가 듬뿍 들어간 클램 차우더와 판체타가 들어간 토마토 스파게티였다.
카미엘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많이 먹는 편이었고, 내내 학교에서 시달린 유리도 절대 식사량이 적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식탁 위에 올라온 접시들을 깔끔하게 비웠다.
“오늘은 뭐 했어요?”
“빨래.”
“내 손수건 안 찢어 먹었죠?”
“하나 정도는……?”
카미엘이 살살 눈치를 살피는 척하며 웃었다. 유리도 한숨을 쉬는 척했다.
“주부 하겠다더니, 우리 남편 안 되겠네. 너무 솜씨가 없어요.”
“으음, 봐주라. 앞으로 더 노력할게.”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창가의 제라늄, 또 죽기 일보 직전인데요.”
“왜 이럴까? 아무래도 이 집이 식물하고 뭐가 안 맞나 봐.”
“당신 손길에 뭔가 문제가 있단 생각은 절대 안 하죠?”
유리는 서재로 들어가는 대신 식탁에 자료를 늘어놓고 내일 수업안을 점검했다. 카미엘은 아침에 도착한 신문을 팔랑팔랑 넘겼다. 평화로운 교육 도시에는 사건사고라곤 페르가나 아카데미의 마스코트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정도가 다였다.
새끼 고양이 중 세 마리가 치즈 태비라는 것까지 확인하고 카미엘은 신문을 덮었다. 날은 적당히 저물어 있었다.
“자기야.”
“으, 으음.”
깜빡 잠이 든 유리를 얼러서 살짝 잠을 깨우고, 카미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머지는 내일 해.”
“응…….”
유리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엘이 익숙하게 그런 유리를 안아 올렸다.
깔끔하게 정리를 한 침대에 유리를 누이고, 카미엘은 잠시 옆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는 유리를 구경했다.
새근새근. 아내는 자는 숨소리마저 예뻤다. 그게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이 9시니까, 딱 두 시간만 자고 나랑 놀아 줘야 해요?”
농밀한 기운을 담은 속삭임이 귓전에 닿자, 유리가 끙 소리를 냈다. 카미엘은 그걸 긍정의 대답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평범하고 행복한, 교수님 댁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