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182)

169화

“!”

심상찮은 소리에 나와 칼릭스는 시선을 주고받자마자 서재 쪽으로 향했다. 마침 카미엘이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열며 나왔다.

“사람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네? 무슨 일이에요?”

그게, 하며 카미엘이 머쓱하게 목 뒤를 쓸었다.

“아버님께서 뒷목을 잡으셨어.”

“네에? 아버지!”

드라마 속에서 자주 본 회장님들의 뇌출혈 신을 떠올리며 황급히 주치의를 불렀다.

“심각한 건 아닙니다. 후유증이 다 낫지 않은 상황에서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소식을 들은 게 조금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정도라고 할까요.”

“…….”

아버지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에 물수건을 얹고 안락의자에 기대 있었다.

나는 뒤늦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카미엘을 다그쳤다.

“아니,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아버지가 뒷목을 잡으신 거예요?”

“억울해. 나는 정말 ‘유리 공녀에게 청혼했고, 허락을 받았다’는 말밖에 안 했다고.”

“그게 왜 별말이 아닙니까? 당연히 쓰러질 만한 소식이죠.”

칼릭스의 말에 아버지도 동의한다는 듯 우리를 향해 심기가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대공 전하.”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아버님.”

“……잠시 나가 주시겠습니까? 딸애랑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카미엘과 칼릭스를 쫓아낸 다음,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이마에서 물수건을 치웠다.

“유리.”

“네.”

복잡한 한숨을 내쉬면서, 아버지가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네 의견을 존중하고 싶다만, 정말 저 사람으로 괜찮은 거냐?”

사윗감으로 세드릭을 점찍었던 아버지에게 카미엘은 너무 파격적인 인사인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내 자식의 배우자로는 세드릭을 추천하고 싶긴 해.’

카미엘에게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만, 사실이 그렇잖은가?

내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재료는 많지 않았다. 카미엘이 세드릭보다 조건적으로 좋은 점은 더 부자고, 더 신분이 높다는 점뿐이었으니까.

‘그 외에는 얼굴 정도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아버지.”

“그래.”

“제가 저 사람을 좋아해요.”

“…….”

“저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공 전하를 다시 들라고 해라.”

“네.”

나는 다시 서재 문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카미엘이 생전 처음 보는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말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다음,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카미엘은 오래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허락받았어.”

그러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깨지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카미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른들한테 환영받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내가.”

“당신…….”

나는 조금 놀라서 카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 주제를 알고 있긴 했네요.”

“나 상처받는다?”

샐쭉 웃더니, 카미엘은 곧 다시 곰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상당한 난항을 예상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아버님께서 독기가 다 빠지셔서 결혼을 허락하신 거야?”

“…….”

“자기야?”

“말을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에요.”

“뭐야, 나 궁금한 거 못 참아. 설마 자기, 우리 결혼 생활에 비밀을 만들 생각인 거야?”

“앞서 나가지 말아요.”

뭐, 말해 줘도 나쁘지 않으려나?

나는 카미엘의 귀를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귓속말로 정답을 알려 주었다.

너랑.

결혼하면.

행복해질 것 같다고 했어.

“……어때요?”

“근사해.”

카미엘이 웃었다. 눈언저리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마법의 말이었어.”

* * *

돌아가는 길에 카미엘이 칼릭스를 처남이라고 불러 칼릭스가 대노하는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유혈 사태 없이 잘 마무리했다.

이렇게 가장 큰 난관을 의외로 수월하게 넘긴 했지만, 남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카미엘을 보내고 방에 돌아온 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작은 열쇠가 달린 목걸이가 얌전히 나를 반겼다.

“…….”

그 언젠가, 세드릭이 내게 선물한 열쇠였다.

“적어도 당신이 어려울 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도 세드릭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담담하게 내 방문을 받아들였다.

“저, 세드릭.”

“네.”

세드릭이 단정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어쩐지 입을 떼기가 망설여졌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인편을 통해 열쇠를 돌려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세드릭이 보여 준 마음을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약속한 1년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나는 품속에서 열쇠 목걸이를 담은 상자를 꺼냈다.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

세드릭은 조용히 내가 내미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예상하고 있다고 해서 대비가 되는 건 아닌 것 같군요.”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드릭.”

“예.”

“제게 보여 주신 당신의 모든 마음에 감사해요.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세드릭의 마음은 늘 과분한 선물 같았다. 정중한 진심에 같은 무게의 마음으로 응답할 순 없었지만, 그렇기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세드릭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조금 웃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앞으로도 제 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야 당연히, 아니, 경만 불편하지 않다면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죠.”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냥…….”

세드릭이 쓸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잘려 나간 페이지가 되고 싶지는 않을 뿐입니다.”

“…….”

“이 마음이 욕심일지라도.”

사랑을 거절당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 상황에서 ‘친구라도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 걸까?

가늠할 수 없는 마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 *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이안의 반응은 깔끔했다.

“그…… 아무튼 네.”

나는 두서없이 말하며 뒷목을 살짝 쓸어내렸다. 이안은 속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승식 때문에 바쁜 와중일 텐데 이런 쓸데없는 소식이나 전해서.”

“쓸데없지는 않습니다.”

이안이 부드럽게 내 말을 받았다.

“오히려 공녀가 이렇게 직접 소식을 전해 주니 제 마음이 좀 낫군요.”

“그, 그런가요?”

이안이 하하, 하고 산뜻하게 말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카미엘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야 낫지요.”

“저도 그럴 것 같아서 제가 오긴 했는데요…….”

카미엘이었다면 온갖 말로 이안의 화를 돋군 다음 화룡점정으로 우리의 결혼 소식을 알렸겠지. 안 봐도 뻔했다.

“아무튼.”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제 부활 미수 사건 이후, 그는 엉망이 된 국정을 수습하고, 황제가 은밀하게 물밑에서 진행해 온 악행의 흔적을 치우며 동시에 계승식을 준비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젊은 황제의 등극에 벌써부터 황후 폐하를 누구로 들여야 할지 말들이 많았다.

“속이 좁은 사람이라 순순히 축하한다고는 못 했지만…….”

나는 왠지 지은 죄도 없이 약간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연애 루트는 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이안이 난감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진심을 마주한다는 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미안해할 일이 아님에도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편해하지는 말아요. 당신이 너무 멋진 사람이라 내가 멋대로 좋아해 버렸을 뿐이니까.”

“이안도 멋진 사람이에요.”

“멋지긴 하지만 마음을 받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 정말!”

“하하. 농담이에요.”

이안이 웃으면서 느긋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세실리아가 들으면 아쉬워하겠군요. 그 아이, 당신을 새언니로 맞고 싶다고 유난이었던지라.”

유구무언이었다.

“능력 없는 오라버니를 원망하라고 해 둬야죠.”

“산뜻하게 웃고 계시는데 어째서 상당한 뒤끝이 느껴지는 걸까요……?”

“어라, 들켰네요.”

“이안.”

젊은 황제가 속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어쩔 도리 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한차례 웃음이 가시고, 그가 말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최고로 행복해지도록 하세요.”

“…….”

“내가 당신을 놓친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번에도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명심할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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