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
순식간에 할 말을 잃고 만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가을로 건너가며 서늘해지고 있는 바람이 페르가나의 교정을 휩쓸었다. 먼 곳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며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푸르스름해져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카미엘은 웃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이 결단코 사실임을 증명하는 담백한 표정으로.
“귀찮게 해서 미안해.”
“…….”
“너를 내가 너무 사랑해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이건.
고백이었다.
자각한 순간 손끝부터 불에 집어 삼켜지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고백이라면 이미 들었다고 생각했다. 카미엘이 과거에서 온 나를 집어삼키던 날에, 그 갈급한 몸짓에서 그가 할 평생의 사랑 이야기를 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부끄럽고 내밀한 고백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냥 웃으면서 “나도요.”라고 대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 손끝을 가늘게 떠는 나를 보며 카미엘이 눈으로 가늘게 웃었다.
“떨려?”
“아, 아니거든요!”
나도 모르게 빽 하고 부정하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카미엘은 잠잠히 웃을 뿐이었다.
“난 지금 떨려.”
그는 서슴없이 자기의 약한 마음을 내보였다.
“네가 날 차 버리면 죽을 것 같을 정도로, 떨려.”
어떤 화려한 고백보다, 그 두려움이. 연약한 마음이.
병아리의 보송보송한 솜털처럼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약함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절대 거절할 수 없음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나도…….”
“응.”
“당신을 좋아해요.”
“…….”
그 순간, 카미엘의 얼굴에 번진 미소.
노을에 물들어 빛나는 눈동자, 눈 코 입에 천천히 아로새겨지는 그 웃음.
그 표정을 살아가는 내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유리 엘로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내가 카미엘의 진명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나만 카미엘의 이름이 진명인 줄 알고 있는 거지만, 어쨌든…….
그에게 나를 다른 사람도 다 아는 가짜 이름으로 부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미엘.”
“!”
나는 덥석, 팔을 뻗어 카미엘의 목을 그러안았다.
자연히 내 쪽으로 숙여지는 그 고개에, 귓전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내 이름은 유스티엔이에요.”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네 어절의 이름을 토해 놓는 동안, 카미엘은 가만히 내게 안겨 있었다.
그렇게 고백하고 나니 떨림이 가라앉았다. 내 목숨 줄을 남에게 쥐여 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내가 이 사람이 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걸 뼛속 깊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
카미엘은 뭔가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너무 좋은 선물 앞에서, 그게 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 작은 아이처럼.
그렇게 서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혼할래?”
최선을 다해 멋있게 꾸밀 겨를도 없이, 그저 툭 튀어나오고 만 진심.
카미엘도 자기가 뱉어 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놀랍게도 귀엽게 보인 나머지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기쁨이, 수천 마리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나비의 날갯짓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나는 답했다.
“좋아요!”
그리고 다시 한번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리듯이 안겼다.
타이밍 좋게 저녁 일과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카미엘은 얼떨떨하게 나를 마주 끌어안고 다급히 물었다.
“지금 좋다고 대답한 거야?”
나는 팔을 약간 느슨하게 풀고 카미엘을 바라보았다. 늘 능숙하고, 능글맞고, 자기 잘생긴 거 아는 사람의 얼굴에 처음 보는 얼빠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조금 놀리고 싶은 심술궂은 마음을 살짝 억누르며, 나는 다시 한번 대답해 주었다.
“천만번도 좋아요.”
나는 미뤄 뒀던 시스템 창을 불러, 마지막으로 “Yes”를 선택했다.
* * *
내 특별 강연은, 다행스럽게도 아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학부생들은 물론 교수들까지도 이 대륙에 유일하게 실존하는 정화력의 소유주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나는 준비한 내용을 그럭저럭 피로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맨 앞에 앉은 카미엘이 눈을 찡긋거리는 듯 예쁜 척을 해서 웃음이 나올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정말 흥미로운 강의였소! 특히 정화력의 실제 사용에서 마법과 응용하여 대 마물 특화형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게 놀랍군.”
“엘로즈 공녀, 하는 김에 내 연구 내용도 들어 보지 않겠소? 분명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거야. 하는 김에 내 협력 연구자로 이름을 올리는 길이 있는데……”
“어허, 이 사람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하하, 하하하.”
박 터지게 나를 원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를 구출한 건, 다름 아닌 엘리야였다.
“내 제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있어도 없는 걸로 해야 할 것 같은 싸늘한 말투였다.
“아니, 뭐…….”
열광적으로 덤벼들던 마법사들은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의 제자였지’하는 뜨악한 표정으로 슬슬 흩어졌다.
“흥.”
악명만으로 손쉽게 사람들을 물리친 엘리야가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기세등등한 표정은 곧 나를 보자마자 한낮의 꿈처럼 덧없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유리.”
“네?”
엘리야가 나를 불러 놓고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비유하자니 좀 그렇지만 마치 시든 채소 같은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약혼을…… 한 겁니까?”
“어, 그게요…….”
아직 공식화한 건 아니긴 했지만, 엘리야라면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약간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다니, 설마 억지로……?”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엘리야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어 부정했다.
자세히 설명하긴 쑥스러우니까, 간단하게 얘기해야겠다.
“그냥 청혼을 받았는데 저도 비슷한 마음이라서 허락했어요.”
“청혼…….”
“으, 이런 얘기 어디서 하려니까 진짜 부끄럽네요.”
나는 일부러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종식하려고 했다.
엘리야의 입가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아직 나하고 꼬인 회로도 다 해결 못 했잖습니까.”
“네? 그게 왜요?”
“…….”
엘리야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스승님이 보기엔 회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내가 영 못 미더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나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마법사로서는 아직 가르침이 필요하긴 하지만, 나는 성인이니 안심하라”고 듬직하게 말해 보았다.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표정은 끝까지 별로 개운치 않아 보였다.
“무슨 얘기 했어?”
떨떠름한 표정의 엘리야가 학장에게 잡혀 끌려간 다음, 카미엘이 등장했다.
“약혼했다는 얘기요.”
“아, 역시.”
카미엘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윽, 원체 미남이라 그런지 이렇게 활짝 웃기까지 하니 후광이 감당이 안 되는 느낌이다.
“좋아하지 말아요. 넘어야 할 산이 있거든요!”
“장인어른을 두고 넘어야 할 산이라니, 우리 자기 벌써부터 너무 매정한 거 아냐?”
“그런 뜻이 아니라……!”
“나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친정에 매정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
기가 차서 가늘게 카미엘을 노려보았다. 평소와 같은 능글맞은 웃음이었지만 감추지 못한 행복이 엿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래. 이렇게 좋다는데…… 하고 뭐든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살그머니 고개를 든다.
하지만 카미엘의 그런 미소가 효과를 발휘하는 건, 유감스럽게도 나까지만이었다.
페르가나의 강연 일정이 끝나고, 아버지도 어느 정도 회복하신 후에 카미엘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아버지에게 우리가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식을 알리고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
나는 서재 문을 똑똑, 두드리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안경을 쓰고 책을 보던 아버지가 이쪽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셨다.
“유리. 무슨 일이냐?”
“저기, 그게…….”
나는 약간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로엔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요.”
“로엔 대공이?”
“그, 아버지를 뵐 일이 있어서요.”
“…….”
아버지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집사가 아니라 내가 전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아버지의 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일단 안으로 모셔야겠구나.”
“네, 오시라고 할 게요.”
이제부터는 카미엘한테 맡긴다.
나는 서재 문을 빠져나가 대기하고 있는 카미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서재에서 가까운 응접실로 향했다.
‘대화를 엿듣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왠지 쑥스럽기도 해서, 그냥 조용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님?”
그때, 막 응접실 앞을 지나가던 칼릭스가 서성거리는 나를 보고 의아하게 말을 걸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계신 겁니까?”
“아, 그게…….”
어떻게 하지? 칼릭스가 알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으나, 이왕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목소리를 죽여 상황을 설명하자, 칼릭스의 눈이 커졌다.
“누님, 지금 그 말씀은……!”
“쉿, 쉿!”
칼릭스가 환장하겠다는 듯 눈을 굴리면서도 내 말을 따라 목소리를 죽였다.
“로엔 대공과 누님이 결혼을 한다는 뜻 아닙니까? 대체 누님이 뭐가 모자라서요?”
“누가 모자라느냐를 따지면 신분적으로는 내 쪽이 아닐까…….”
“말도 안 됩니다!”
“쉿, 조용히 하라니까!”
바로 그 순간, 서재 쪽에서 “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