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182)

167화

“유리?”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에 휩싸여 있는 나를, 엘리야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불렀다.

“아, 네.”

나는 짧게 머리를 털어 내며 깊은 고민을 뒤로 미뤘다.

“어디로 가는지 물었죠? 음, 일단 경의 연구실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들어야 할 이야기도 조금 있고.”

“그렇게 하시죠.”

우리는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하는 대신 부러 걸어서 엘리야의 연구실로 향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엘리야지만, 페르가나에서는 특히 더했다. 마탑주인 그를 대부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엘리야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가자마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당신하고 걸으니까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에요.”

“내 탓은 아닙니다만.”

“너무 유명한 것도 탓이라면 탓 아니에요?”

엘리야는 내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아공간을 열었다.

한동안 아공간을 뒤적이던 그가 꺼낸 것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평범한 바이올린이었다.

“앗, 설마 이게?”

“올가의 바이올린입니다.”

아티팩트라고 듣긴 했지만, 바이올린은 겉으로 보기엔 세월을 좀 먹었을 뿐,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정말 마법 상해를 치유하는 바이올린인 건가요?”

“일정 이상의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 그리고 주변에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만 작동하는 바이올린입니다.”

“아…… 그럼 지금은 마력을 불어넣어 봐도 동작은 안 하겠네요?”

“글쎄요.”

엘리야가 “시범 삼아서.”라고 중얼거리며 바이올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연주하는 것처럼 공중으로 스륵 떠오른 바이올린 위를, 활이 누비기 시작했다.

“이게 왜……?”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엘리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이해하기 쉽게 마법 상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올가의 바이올린은 좀 더 광범위한 종류의 상해를 치료합니다.”

“하지만 전 딱히 치료받을 게 없는 것 같은데…….”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짚이는 게 없는데요.”

“과거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 앞에서 올가의 바이올린이 연주를 시작한 예도 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엔 짚이는 게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짓을 시도한 적이 없다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정말 없을까?’

혹시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유리가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든가……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비약이겠지?

찝찝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엘리야가 덧붙였다.

“그냥 설명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

“어쨌든 들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어떤 종류의 상해든, 당신이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치유할 수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

찝찝한 건 여전했지만, 깊게 파고들 일도 아니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아버지의 치료는 마무리한 건가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했습니다. 이제는 영혼의 회복력이 작용하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오늘 용건은 이게 아니라.”

“네?”

엘리야가 또 한 번 아공간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툭 꺼내 놓았다.

“?”

목걸이였다. 붉은 보석이 달린.

‘일단 눈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긴 하는데.’

느껴지는 마법적 에너지가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등급이 아주 높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마나석처럼…….

“이건……?”

“마법적 처치를 해서 크기를 줄인 마나석을 단 목걸이입니다.”

“아, 역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더라니, 그런 히스토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이걸 저한테 왜?”

“……기억 못 하는 겁니까?”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엘리야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당신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이 걸린 마나석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죠.”

“그리고 내가 말했죠. 그 정체불명의 물건보다 더 괜찮은 걸 만들어 주겠다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지.

그 이후로 너무 엄청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거의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 공격을 방어하는 마법을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일회용이 아니라 다회용입니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엘리야가 어찌나 콧대를 세우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웃음은 대체 뭡니까?”

“그냥요, 좋아서 웃은 거예요.”

손사래를 치며 대충 얼버무리고, 나는 목걸이를 감사히 받아 들었다.

“아무튼 감사해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런 배려를 해 줘서.”

“약속했으니까요.”

정식으로 한 감사 인사에 멋쩍어졌는지, 엘리야는 흥 코웃음을 치며 부러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를 구사했다.

나는 그런 엘리야를 놀리기 위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스승님의 저를 생각하는 마음의 증표라는 거죠?”

“그게 아니라……”

엘리야가 울컥해서 부정하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조짐 없이 등 뒤의 문이 열렸다.

“어?”

열린 문 틈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나는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미엘?”

“…….”

그랬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카미엘이었다.

“어떻게 당신이 여길……?”

“왜?”

카미엘이 물었다.

“내가 여길 오면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엘리야의 연구실은커녕 페르가나에 올 거라고 전달한 적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내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 탓일까, 카미엘이 짧게 웃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빈말로라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는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로엔 대공?”

“사제 간에 정답게 증표도 주고받고, 그런 건 참 좋은데…….”

사제 간에, 라는 말에 명백히 강세가 들어가 있었다.

카미엘이 명백히 기분 상한 티를 내면서도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그 손에 내 손을 쥐여 주자, 알기 쉽게도 카미엘의 미간에 슬쩍 힘이 풀렸다.

……아무래도 이 남자, 지금 질투하는 것 같지?

내 손을 잡고 조금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카미엘이 말했다.

“나는 내 약혼녀한테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약혼녀?”

엘리야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로 말씀드리자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언제 약혼을 했는데?’

……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질투하고 있는 와중에 기름을 붓는 짓이 될 테니까.

“그럼,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그러면서도 카미엘은 나를 끌어내는 대신 슬쩍 눈치를 보듯 내 허락을 구했다.

나는 결정적으로 그 태도에 넘어가고 말았다.

“엘리야 경, 일단 이 목걸이 진짜 고마워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해요.”

엘리야는 당황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거의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카미엘은 곧장 엘리야의 연구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미엘?”

“…….”

대답이 없다.

“우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 말에 카미엘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나를 엘리야의 연구실에서 데려오는 게 급했지, 딱히 목적지는 생각 안 했던 모양이었다.

어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밥은 먹고 이러고 다녀요?”

“밥이 먹혔을 것 같아?”

“못 먹을 이유는 또 뭔데요?”

“네가 없어졌잖아.”

“…….”

너무 그렇게 단언하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진 쪽은 내 쪽이었다.

‘아니…….’

그런 나를 보며 카미엘이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네? 뭐를요?”

“내가 싫어진 거지?”

“……네?”

이게 웬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카미엘은 그런 내 반응을 멋대로 해석한 듯, 안 그래도 딱딱했던 표정을 참담하게 굳혔다.

“그렇겠지.”

“아니 잠깐……”

“나도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거든. 그걸 알게 된 네가 진력을 내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카미엘이 워낙 단숨에 말을 쏟아 내서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럼 그러지는 말았어야지.”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지만, 눈가는 심상찮게 붉어졌다.

카미엘이 씨근거리며 말했다.

“나를 허락해 줄 수도 있는 것처럼, 그 밤을 적선하지 말지 그랬어.”

“그러니까 지금.”

듣고 있자니 어이가 다 없어졌다. 나는 곱게 해명하려던 걸 때려치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적선 때문에 당신하고 그……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틀려?”

“당연히 틀리죠!”

이 사람은 대체 나를 어느 정도까지 박애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애초에 동정이라는 이유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하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 멍청한 남자 같으니! 나름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 다 좋은데 가끔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거 알아요?”

“그러니까…….”

카미엘이 얼떨떨하게 입을 가렸다.

“네 말은 날 좋아한다는 거지?”

“지금 제 말을 최고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겠네요!”

나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카미엘의 입가는 씰룩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 좋다고 할 정도로 내가 좋다는 거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만 들려요?”

“당연하지.”

카미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하…….”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이 푸시시 식는 느낌이었다.

‘됐다, 됐어. 이런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냐?’

카미엘이 항변했다.

“애초에 네가 나한테 언질 하나 안 주고 페르가나에 떨렁 가 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오해는 안 했잖아.”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도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건 마찬가지거든요!”

“아, 그건 그래. 근데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카미엘이 어느새 반질반질해진 낯짝으로 말했다.

“유리, 넌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 중에 제일 좋은 일이거든. 그래서 눈을 뜨면 다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워.”

한없이 가벼운 것 같지만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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