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182)

166화

“어?”

바로 거기서, 익숙한 얼굴을 만나 버렸다.

“유리!”

“어 그러니까…….”

익숙한 얼굴을 한 남학생이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래? 나 에단이잖아. 축제 때 만났던.”

“그건 기억하고 있어! 이름만 좀 헷갈렸을 뿐이야.”

“그랬을 거라고 믿어. 나한테서 산 잉크는 어땠어?”

에단이 편안한 화제로 주제를 돌렸다. 나는 덕분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남동생이 좋아했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군.”

그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나저나 학기 중인 페르가나엔 어떻게 온 거야? 또 마탑주님하고 온 건가?”

“아,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페르가나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게 됐다는 건 딱히 숨길 만한 일도 아니었다.

“강의를 하게 됐다고! 아니, 그럼 그 유명한 정화력의 성녀가 바로……”

“쉿, 쉿.”

나는 에단의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에단이 제 입을 막으며 익살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시작 전까지는 최대한 조용히 있고 싶어.”

“알았어, 알았어. 내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실수했어.”

“알면 됐어.”

정중한 예의가 늘상 깔려 있는 사교계에서 지낸 기간이 길어서일까? 평범하게 또래 친구처럼 대해 주는 에단에게는 나도 절로 편한 태도가 우러나왔다.

“그럼 강의 준비하느라고 바쁘겠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라고 해야겠지. 망신이나 안 당하길 빌고 있어.”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너한테 잉크만 안 빌려준다면…….”

“그러지 마라.”

에단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녁 약속 없지?”

“응?”

“다른 건 아니고 이따 한나랑 다른 애들하고 밥 먹기로 했거든. 같이 식사하러 가는 건 어때?”

“어…….”

“절대, 하늘에 맹세코 네가 특별 강연자라는 얘긴 안 할게. 아마 애들도 네가 그냥 마탑주님을 따라온 줄 알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에단이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잖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때 잠깐 마주친 것뿐이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은 만남이었고 굳이 여기 와서 혼자 밥을 먹겠다고 고집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알았어.”

“좋아. 내가 이따 7시까지 도서관으로 데리러 올게.”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에단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준비 열심히 해.”

“고마워.”

도서관 앞에서 에단과 헤어진 뒤, 나는 귀빈 패스를 이용해서 금서 구역에까지 출입해 가며 강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화력, 균열, 마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키워드와 관련성이 높아 보이는 책을 뽑아 온 다음, 강의의 흐름을 대충 순서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순서별로 참고할 책의 제목을 적어 두었다.

거기까지만 하는 데만도 시간을 꽤 소요했다.

“데리러 왔어.”

“앗.”

나는 에단이 내 자리까지 찾아와서 말을 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으, 고마워. 완전히 몰입해 있었네.”

“고마울 것까지야. 하는 거 보니까 완전 열중해 있던데. 왜 페르가나엔 입학 안 한 거야? 마탑주님한테 개별적으로 사사하느라고?”

“일단 내가 타국의 공녀거든.”

“페르가나는 중립국이라 국적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데.”

“그래?”

“나만 해도 인접국인 트레바스 출신이야.”

“그렇구나…….”

우린 이런 식으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를 벗어났다.

저녁 시간대를 맞아 북적북적해진 학교 앞 상권에서, 에단은 익숙하게 식당을 찾아갔다.

‘오늘의 테이블’이라는 상호가 걸려 있는 가게는, 자칫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았지만 내부는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이게 바로 현지인 맛집인 건가!’

“어, 학장님.”

내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에단이 먼저 가게 구석에 앉아 있던 선객에게 알은척을 했다.

‘학장?’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보니 말 그대로 학장이 구석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앞에 뭘 씹은 듯한 표정의 엘리야가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경이 어떻게……?”

나도 모르게 얼떨떨하게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저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 식사라는 걸 할 만한 사회성이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엘리야를 봐 온 중에 제일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가 없었다.

“눈빛이 기분 나쁩니다만.”

들켰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허허, 벌써 어울리는 친구가 생기신 모양이군요.”

학장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중재하려고 했다.

“저희는 이미 식사를 마쳤으니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라케시 교수?”

“흥.”

엘리야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학장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 엘리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생각했다.

‘좀 서운하네.’

올가의 바이올린을 사용하느라고 계속 로잔헤이어 저택에 머물 줄 알았더니.

돌아올 거였으면 나한테 연락 좀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버지 소식도 듣고 싶고,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었는데.

에단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낯선 도시에서 혼자 식사를 해결했어야 할 뻔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도 즐겁겠다고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조금 서운한 건 사실이었다.

“유리?”

“아, 응.”

작아지는 엘리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린 나를 에단이 일깨웠다.

테이블에서는 한나를 비롯한 예전 불꽃놀이 멤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단이 데려온다던 손님이 너였어?”

“학술제 손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근처에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쏟아지는 질문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를 주제로 하던 화제는 얼마 가지 않았고, 곧이어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마탑주님은 왜 학장님이랑 같이 계셨던 거야? 뭐 아는 거 있어?”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에단이 킥킥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우리 그때 불꽃놀이 기억나?”

“기억하지.”

엘리야가 쏘아 올린 온갖 마법진 말이지.

“학술제 다음에 자유 주제 연구 과제가 온통 그날 불꽃놀이로 본 마법진 이야기뿐이었다니까. 다들 기억하지?”

“아 그럼. 우리 조 주제도 그거였는데.”

세계 유수의 마법 명문도 조별 과제를 피해 갈 수 없다니, 그것 참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나라는 여학생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마탑주님의 독자적인 마법진을 보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야. 그분의 실력을 배견한 것에 대해 좀 더 감사하는 태도를……”

“앗, 파스타 나왔다.”

“여기, 여기 놓고 먹자.”

“……사람 말을 좀 들어!”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 도중에 내가 끼어들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에단이 적절히 설명을 해 주거나 공감할 수 있는 화제로 주제를 돌려 주거나 해서 대충 끼어들어 같이 웃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제국에서 용과 싸우는 동안 한쪽에서는 이렇게 평화롭게 과제나 시험 따위로 투닥거리는 나날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

그게 나쁘게 여겨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뿌듯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계산을 마친 에단이 가볍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가왔다. 기분이 좋았던 나는 미소를 띤 채로 “그냥.” 하고 대답해 주었다.

내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는 자세히 묻는 대신 익살스럽게 어깨를 떠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저녁이 되니까 좀 썰렁한 것 같지 않아?”

“그런가? 하긴. 이제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시답잖은 대화를 툭툭 주고받으면서 다시 페르가나로 돌아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어? 엘리야 경?”

“…….”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서늘했다.

나는 에단을 뒤로하고 얼른 엘리야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왜 설마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왜 미안하게시리…….”

엘리야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한 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나를 기다렸다는 말에 좀 미안해지긴 했다.

“날도 썰렁한데. 어디 들어가 있기라도 하시지.”

“됐습니다.”

“유리, 그럼 난 애들하고 먼저 들어가 볼게.”

“아아, 어.”

나는 먼저 가겠다는 에단을 대충 배웅했다. 그러는데 뒤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저건 누구입니까?”

“기억 안 나세요?”

“기억?”

엘리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 기억에 없는 눈치였다.

‘하긴, 천재여도 사람 기억하는 능력은 좀 떨어질 수 있지.’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나?

“방금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것 같았습니다만.”

“어머, 착각이에요.”

“뭐, 어쨌든…….”

엘리야가 불퉁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친구도 생긴 것 같고. 즐거워 보이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은 왜 안 좋은 건데요……?”

“……서운해서 그럽니다, 서운해서!”

엘리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에엥? 하고 괴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체 뭐가 서운한 건데요? 자기도 다른 사람하고 밥 먹었으면서!”

“그래서 대충 상대해 주고 빨리 만나러 갈 생각이었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왁왁대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일단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집?”

집이라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로잔헤이어의 저택을 떠올리곤, 속으로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거기를 당연히 집으로 생각하게 된 걸까?’

이렇게나 깊게 적응해 버렸는데, 과연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예전처럼 생활하는 게 가능할까?

나를 붙잡아 줄 가족이나 연인조차 없는 그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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