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런……!’
쿵!
균열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이 고릴라만큼이나 두껍고 넓고, 괴상하게 긴 팔과 단단하고 커다란 손톱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 괴물이 바닥에 균열을 일으키며 착지함과 동시에, 날개를 쫙 펼쳤다.
“쳇……!”
칼릭스가 검을 들고 자세를 낮추었다. 엘리야 역시 무언가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괴물이 입을 벌려 말했다.
무지한…… 멍청한…… 인간들!
기름칠을 안 한 문이 삐걱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슨……!”
마물이 제 가슴팍에 손톱을 인정사정없이 쑤셔 박은 것이다.
검고 찐득한 피가 튀었다. 마물은 광소를 내뱉으며 제 가슴을 갈라 붉게 빛나는 심장을 꺼냈다.
이 심장을 용제 폐하를 위해서 바치겠다!
허공에 떠오른 심장이 두 손을 받쳐 올린 황제에게 떨어졌다.
황제는 타르처럼 역겨운 피가 떨어지는 붉은 심장을 귀중히 받아 챙기며 허리를 숙였다.
“귀하의 희생을 용제 폐하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안 될 말이지!”
칼릭스가 검을 휘둘러 마물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푸른 오러가 피어오른 검과 마물의 손이 충돌했다.
안 될 말이지.
심장을 잃은 채로도 마물은 건재했다.
마물은 칼릭스의 말을 조롱하듯 따라하며,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칼릭스의 검을 밀어냈다!
“크윽!”
칼릭스는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피했다. 동시에 엘리야가 불러낸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불꽃이 마물을 향해 쇄도했다.
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상대해 주마!
불에 그을려 연기를 피워 올리는 마물이 한 걸음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뒤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나는 다음 메시지가 떠오르기도 전에 정화력을 폭발시키듯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으음……!
마물이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용봉공의 후손이로구나.
마물은 반쯤 녹아내린 날개 한쪽을 촤악 찢어 내고는, 남은 날개로 날갯짓을 해 바람을 일으키며 외쳤다.
너는 오늘 용제 폐하의 부활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엘리야가 빙벽을 세워 칼날 같은 바람을 막아 냈다. 칼릭스가 다시 오러를 피워 올리며 마물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 공격은 빗나갔고, 반대편 날개를 꿰뚫는 데 그치고 말았다.
손쉽게 우리의 공격을 피한 마물이 입을 쩍 벌리고 예의 그 끔찍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가가가가가각!
등 뒤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기세로 쏘아졌다!
커헉……!
푸른 잔상을 남긴 그것은 곧바로 마물의 쩍 벌린 입을 꿰뚫어 버렸다. 그뿐 아니라 거기 담긴 힘이 마치 회전하듯 하며 마물의 머리 전체를 반쯤 날려 버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카미엘!”
카미엘이 서 있었다. 거대한 활을 들고서 말이다.
이…… 인…… 용제께서는…… 부활을…….
턱과 혀만 남은 상태로도 마물은 몇 마디 말을 했다. 가공할 생존력이었다.
하지만 곧 쿠웅!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심장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가 날아간 충격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카미엘!”
마물의 피 묻은 심장을 들고, 황제가 환호하듯 외쳤다.
“마침내 네가 왔구나!”
“그래.”
카미엘이 거대한 활을 내던지며 대답했다.
“마침내 내가 왔지.”
날아가는 화살에 오러를 실어 날리는, 문자 그대로 ‘마나가 넘쳐 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짓을 하고도 카미엘은 멀쩡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목도하고도 황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희에 차서 이렇게 외칠 뿐이었다.
“카미엘, 넌 역시 내가 만든 그릇 중에 가장 완벽한 그릇이야!”
광소에 가까운 웃음이 터졌다. 황제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늘은 그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시작하라!”
황제의 말과 동시에 그가 쥔 마물의 심장에서부터 붉은 빛이 흘러나와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허공에 세차게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건……!”
엘리야가 입술을 깨물며 마력을 일으켰지만, 순식간에 거의 완전한 형태를 이룬 마법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며 황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량한 네 동료들을 믿고 네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와 줘서 참 고맙구나, 카미엘.”
뭘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거대한 기운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윽…….”
공간 전체가 거대한 파도처럼 들썩이는 느낌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엄청나게 강한 압박감과 동시에, 귀를 찢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님!”
칼릭스가 몸을 구푸려 쓰러지려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겨우 버티고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용제……!’
실체를 잃은 영체만으로도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마물의 왕.
느껴지는구나. 또 한 번, 이질적인 존재가…….
무형의 기운이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군. 로잔헤이어의 후손인가?
“오오, 용제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용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나는 최대한 정화력을 내 안으로 갈무리하면서 존재감을 죽였다. 다행히 황제가 용제의 흥미를 끌 만한 말을 외쳤다.
“여기 제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그릇이 있습니다! 과거 당신을 봉인한 매개인 황가의 피를 이은 순수한 그릇입니다!”
그릇이라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카미엘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붉은 빛에 휘감긴 팔을 당겨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황제는 거의 황홀경에 차서 말했다.
“어서 저 그릇을 차지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저를 영생 불사하는 인간의 왕으로 삼아 주십시오!”
나의 그릇…….
거친 숨결이 섞인 목소리로, 용이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붉게 빛나던 마법진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용제는 용봉공의 후손인 나를 처치하는 것보다 자신의 현신이 먼저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검은 기운이 빠른 속도로 넘실대며 카미엘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흐하하하! 부활이다! 부활이야!”
황제는 희열에 차 광소를 터트렸다.
“오오, 용제 폐하께서 드디어……!”
둘러선 사람들 역시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은 기운이 카미엘이 서 있는 자리를 둘러쌌다.
절체절명의 순간.
“누님.”
칼릭스가 내게 신호를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검은 기운이 카미엘의 몸으로 침식을 시도했다!
순식간에 그림자에 잠긴 것처럼 카미엘의 온몸이 검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마침내 용제가 그를 집어삼키려던 찰나.
키이이잉-!
맞물려선 안 될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린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카미엘의 몸으로부터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크윽!
검은 기운이 예상치 못한 반격에 놀라 카미엘로부터 멀어졌다. 카미엘이 그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를 구속하고 있던 마법적인 힘을 떨쳐 내며 씩 웃었다.
“뭘 놀라고 그러시나?”
“카, 카미엘, 너 어떻게……!”
황제가 눈을 뒤집을 듯 놀라 물었다. 카미엘이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황제여!
이제까지와 달리 목소리를 높인 용제가 황제를 추궁했다. 황제가 대경해서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수작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저것은 분명 제가 용제 폐하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릇이 맞는데, 어째서……”
“그릇에 뭘 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카미엘이 느물거리며 끼어들었다.
“이미 뭔가가 담겨 있을 때.”
“무, 무슨……!”
그랬다.
여기까지 오는 게 황제의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거란 걸 눈치챘을 때, 나는 불현듯 생각했다.
카미엘은 용제라는 마물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그와 용제가 접촉하면 분명히 용제는 그의 몸을 차지하고 부활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카미엘의 내부를 정화력으로 채워 넣는다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카미엘과 각인이라는 모종의 통로로 연결된 사이였기 때문이다.
정화력을 전달할 때, 음…… 칼릭스가 납득하기 힘들 만한 일을 좀 하긴 해야 했지만, 어쨌든.
너, 로잔헤이어의 후손! 네 짓이로구나!
역시, 마물의 왕이라는 별칭답게 용제는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했다.
농도 짙은 분노와 악의와 증오가 넘실댔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이쪽의 수에 당했다는 전적 때문일까,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용제가 압도적인 존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로잔의 일족 같으니라고……!
이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용제는 분통을 터트리기에 바빴다.
하긴, 몇백 년 만에 부활의 기회를 잡았는데, 그게 눈앞에서 날아갔으니 화가 안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화를 내기엔 이를 텐데.”
카미엘이 깐죽거리며 시선을 끌었다. 그사이에 엘리야는 조용히 내 옆으로 이동했다.
“마탑주……! 저쪽을 저지해!”
황제가 기민하게 대처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엘리야는 이미 내 손목을 쥐고, 내게서 정화력을 끌어가고 있었으니까.
평범하게 마나를 사용하는 대신 내 정화력을 사용해서, 엘리야는 발밑에 펼쳐진 검붉은 마법진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카미엘이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부활의 마법진을 전부 역으로 연산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카미엘의 입가에 비수 같은 미소가 스쳤다.
“정답은 소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