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182)

162화

* *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평소에 착실하게(?) 반란 준비를 해 온 카미엘과 이안 덕에 군사를 동원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수도 방위 기사단 역시 이안이 무슨 수를 써 둔 건지 우리가 사병을 집결시키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안, 당신 수완이 좋네요.”

“제가 아무리 수완이 좋아도 황제 폐하께서 대비하셨더라면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고 있을 텐데도 아무 대비를 안 했다는 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성공할 거란 분명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카미엘이 나른하게 말했다.

“황제를 저지한다.”

“단순해서 좋군요.”

“거창할 필요는 없잖아?”

제국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창하지 않다니, 카미엘다운 말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카미엘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어차피 난 큰 그림 같은 건 몰라. 내가 하려는 건 그저 사적 복수일 뿐이라서.”

“그것도 참 당신답네요.”

“그래서 싫어?”

“꼭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묻고 대답을 들어야 할까……?”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한걸.”

카미엘의 살랑거리는 말투에 칼릭스가 욱하고 열이 받은 것 같았지만, 내 동생은 카미엘과 달리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누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시죠.”

아니, 없구나.

“일단, 계획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도록 하죠.”

엘리야가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카미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도 카미엘이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총대를 멘 이안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황궁 기사단을 제압하는 건 우리가 데려온 병력이 충분히 해낼 겁니다. 관건은 안에서 황제가 벌이고 있는 일을 저지해야 한다는 건데.”

이안이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그 건은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기동대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유리 공녀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자면 세실리아 역시 ‘그릇’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로엔 대공의 정보력에 의하면 세실리아는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세실리아 황녀 전하께서는 아마 이번 사태에 어떤 식으로든 이용당하실 거예요. 에스테반 후작 역시 그렇고요.”

“문제는 다른 한쪽에서는 균열이 열리고 있다는 점이로군요.”

“분명히 그 균열을 여는 목적도 있을 겁니다.”

“균열이 열리고 있다면 많은 사람을 데려가는 건 희생자만 늘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조 작전에도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고요.”

“저희 인원을 두 팀으로 나누어 작전을 진행하는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음.”

칼릭스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팀이 균열을 저지하는 동안, 다른 한 팀이 납치당한 사람들을 구출한 뒤 합류하는 겁니다.”

“저는 일단 균열을 저지하는 팀이겠네요.”

벌어진 균열을 다시 봉인하는 일은 이 중에서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슬쩍 카미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대공 전하께서 황녀 전하와 에스테반 후작이 납치되어 있는 곳을 짐작하고 계실 것 같아요.”

“…….”

내 말에 카미엘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좀 점잖게 표현하면 그랬고,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입술이 댓 발 나온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이견이 나오기 전에 이안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저와 로엔 대공이 구조팀으로 움직이고, 마라케시 경과 유리 공녀, 소공작이 균열 쪽으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찬성입니다.”

“괜찮은 계획이로군요.”

“유리.”

카미엘이 살살 꾀려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말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누님은 제가 목숨을 다해 지킬 테니, 신경 쓰지 마시죠.”

칼릭스가 거의 이를 갈며 경고했다. 카미엘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쯤에서 납득해 주겠다는 사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 * *

황궁은 북문과 서문, 남문이 있고 동쪽에는 산세가 있어 자연적으로 수성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되, 특별히 관문이 없는 동쪽에 더욱 신경을 썼다. 행여나 도망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계획을 짤 때, 우리는 세드릭의 존재를 굉장히 아쉬워했다.

기사로서 황궁의 파수에 밝은 세드릭이 있었으면 좀 더 효율적으로, 피를 덜 흘리며 황궁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고전을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전하.”

이안의 휘하 기사단장으로서 이번 연합군을 통솔하게 된 칼이 당혹스러워하며 보고했다.

“황궁 기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 방위 기사단도 움직이지 않고 있고요.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지경입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방심은 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말해 둔 대로 따로 작전을 진행해야 하니 이후의 점령 작전 진행에 대해서는 귀관에게 맡기겠다.”

칼 경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의 진행 정도는 어떻습니까?”

“많이 벌어졌지만, 아직 마물은 등장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일단 움직이도록 하지.”

카미엘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이야기를 나누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엘리야가 내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까?”

“이쪽이요.”

“북동쪽이군요.”

칼릭스가 내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향이라면 곧장 태양궁으로 향하면 될 것 같습니다.”

“태양궁이라. 알겠습니다. 둘 다 이쪽으로.”

엘리야가 나와 칼릭스를 가까이 서게 했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빛나는 마법진이 떠오른다 싶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우리는 태양궁 앞 정원에 서 있었다.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게 다듬어진 정원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사람을 물린 것 같습니다.”

“일단 궁 안으로 들어가야겠죠……?”

궁 안쪽에서 균열이 불안하게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강도의 불길함이었다.

공간이 비틀어지고, 찢어지는 불쾌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마물이 등장하려는 걸까?’

정확히는 몰라도, 지금 균열의 크기는 레비아탄급의 마물이 불완전하게 현신할 수 있을 정도로는 벌어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재빨리 궁으로 향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우리를 환영하듯이 그레이트 홀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

“…….”

우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엘리야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미리 약속한 대로 우리의 위치를 구출팀에게 전달한 거였다.

“……들어가죠.”

검을 빼어 든 칼릭스가 앞장을 서고, 중간에 나, 엘리야가 제일 마지막에 섰다.

“마침내 여기까지 도착하였구나.”

“!”

홀의 맨 앞, 옥좌가 놓인 자리에서 황제가 우리를 반겼다.

그 앞에는 어딘지 표정이 멍한 기사들과,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문양을 새긴 흰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저 문양은 분명…….’

카미엘의 과거에 떨어졌을 때 본 적이 있는 문양이었다. 황제와 함께 용제 부활을 꾀하는 이들의 표식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머리 위쪽 공간에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쿠우우우우…….

그 안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구물거리고, 소용돌이치면서 균열이 열리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 균열이 벌어졌는데도 이쪽으로 넘어오기를 시도하지 않다니.’

생각보다 더 거대한 마물인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퀘스트 발생 조건을 연산합니다…….

유저 유리 엘로즈의 정화력이 3만을 상회합니다.

‘퀘스트: 용제 부활을 저지하라’가 활성화됩니다.

‘뭐?’

‘퀘스트: 용제 부활을 저지하라’ 발생!

카시스 제국의 황제가 오랜 옛 시절의 암흑, 용제를 부활시키려고 합니다.

용제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할 시 퀘스트 수행에 성공합니다.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 목표 달성률이 100%를 달성합니다.

???? 시스템 설치를 시작합니다.

실패할 시 제국이 멸망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제국이야 멸망하든 말든, 나는 페르가나로 도망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내 삶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 생각도 않고 ‘Yes’를 선택했다.

수락함과 동시에 퀘스트 창이 사라지고, 가려져 있던 황제의 모습이 다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가 명령했다.

“세 사람 모두 이리로 오너라.”

“이런 일로 마주하게 되어 상당히 안타깝습니다만, 황제여, 내게는 당신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발밑에서 다시 한번 마법진이 번지더니,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반구 형태로 우리를 감쌌다. 실드를 친 모양이었다.

“마탑주, 그대는 마법의 비의를 탐구하는 자이지 않은가?”

황제가 양팔을 좌우로 넓게 펼치며 말했다.

“용제 폐하야말로 그대가 탐구하는 비의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분이라네. 생각을 바꾸어 우리와 함께할 기회를 줄 테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엘리야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쉽게 쓴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탐구하는 과정을 즐깁니다.”

“그런가?”

회유를 하면서도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황제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잔헤이어 소공작과 공녀의 뜻도 그러한가?”

“…….”

우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까운 일. 이렇게 제국의 인재들을 보내야 한다니.”

더 들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황제가 말을 하는 동안 조금씩 퍼트리고 있었던 정화력을 균열을 향해 집중하려고 했다.

그 순간.

크오오오오!

정화력이 닿기 직전에, 마치 고여 있던 물이 한순간에 개수구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균열이 쫙 하고 완전히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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