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182)

161화

* * *

“으음…….”

세실리아는 작은 신음을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왜일까? 이상하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것 같았다.

‘오늘도 몸이 안 좋은 건가?’

익숙한 체념을 하며, 세실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세실리아는 당황했다. 익숙한 자기 처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디?’

세실리아는 땅바닥에 내버려지다시피 쓰러져 있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중앙에 커다란 제단이 있는 동굴 같은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도무지 제국의 황녀가 눈을 뜰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세실리아.”

“아, 아바마마?”

세실리아는 흐릿한 두 눈을 비볐다. 제단 앞에 서 있던 흐릿한 형상이 황제라는 게 그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 여긴 어디인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딸아.”

“네……?”

자애롭게 대답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장소만 아니었다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는 이상해.’

세실리아는 전에 없이 긴장해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전 잘 모르겠어요……. 저랑 아바마마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죠?”

“그건 세실리아, 천천히 알게 될 거란다.”

황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편을 향해 명령했다.

“세실리아를 이쪽으로 데려와라.”

“!”

황제의 명령과 동시에, 뒤쪽에서 신속하게 나타난 사람들이 세실리아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무슨……! 이게 무슨 짓이야!”

“가만히 계십시오, 황녀.”

“이건 다 위대하신 분을 위한 일입니다.”

‘위대하신 분?’

세실리아는 겁에 질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이 자기 딸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도움을 청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팔을 붙들린 채로 세실리아는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묘하게 이 불길한 공간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어나시지요.”

사람들이 강제로 세실리아를 일으켰다. 세실리아는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무슨……! 아팟!”

세실리아는 몸을 뒤틀어 보려고 했지만, 그 간단한 반항조차도 부질없는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실리아를 제단 앞에 주저앉히고, 바닥과 연결된 족쇄와 수갑을 가져다가 그녀의 양 발목과 손목에 채우기 시작했다.

“아, 아바마마!”

소용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푸, 풀어 주세요. 저는, 도무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하지만 황제는 쇠사슬에 얽매인 채 잔뜩 겁에 질린 제 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세실리아.”

“무슨…….”

“너는 보다 위대하신 분을 위해 희생하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았으니 말이다.”

“……!”

희생이라고?

세실리아는 자신이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아바마마는…….’

평소와 달랐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모습이 진짜 아바마마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바마마.”

세실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저는, 그러니까 제게 어떤 역할이 주어진 거라면, 도망칠 생각은 없어요.”

“…….”

“하,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는 알고 싶어요. 제가 대체 어떤 위대한 분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아는 위대하신 분은 이 제국의 황제 폐하이신 아바마마뿐인데…….”

황제의 입술에 미소가 스쳤다.

“너나 이안이나, 말하는 재간 하나는 제대로 타고났구나. 과연 내 핏줄이기는 한 모양이야.”

“…….”

마른침이 꿀꺽, 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네가 알고 싶다면야 내가 알려 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황제는 세실리아가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머리를 굴려 봤자 세실리아는 세실리아였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황녀.

그가 이 아이를 그렇게 길렀다.

황제는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네가 네 운명을 알고 싶다면야, 아비 된 도리로서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하지만 세실리아야, 그러기에 앞서 떠올려야 할 기억이 있지 않으냐?”

“……!”

그 순간.

세실리아의 머릿속에 마치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묻혀 있던 기억의 잔상들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무서워요…….”

“다 위대하신 분을 위해서입니다, 황녀님. 다 드셔야 착한 아이지요.”

“싫어! 마시지 않을 거야! 우븝! 읍!”

“아파요, 너무 아파…… 살려 주세요……!”

“아…….”

세실리아는 그제야 이 제단이 있는 공동이 왜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그 이유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기억이 난 모양이로구나.”

그런 딸을 바라보며, 황제가 흐뭇하게 웃었다.

“세실리아, 안타깝게도 너는 완벽하게 용제 폐하만을 위한 그릇이 되기에는 자질이 모자랐지.”

“어, 어떻게…… 제게 그런 짓을……!”

“하지만 넌 나름대로 용제 폐하를 위해 쓸모가 있는 물건이란다. 네 몸은 마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마물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거든.”

마물을 끌어당기는 능력.

영민한 세실리아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예전에 솔레아 호수에서도 그랬고, 코랄 제도에서도 그랬다.

세실리아 옆에서 균열이 열릴 때면, 예기치 못하게 상위 등급의 마물이 나타나곤 했다.

“네가 불러들인 마물에게서 채취한 마물의 심장이 용제 폐하의 부활을 도울 테니, 얼마든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 말은……?”

“레비아탄을 놓친 건 아깝지만, 괜찮다. 네가 여기에 천 번째 심장을 줄 마물을 불러낼 테니 말이다.”

“아바마마!”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황도에서 마물을 불러내면……!”

“카미엘, 완벽한 그릇이 제 발로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세실리아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목청을 높였다.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용제는 인간을 증오해요. 마물의 왕을 부활시키는 건 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아니, 이 세상은 멸망하지 않을 거다.”

황제의 눈이 희번덕이며 빛났다.

“단지 용제 폐하의 통치하에 영원히 복속될 뿐!”

그의 얼굴에 광소가 번졌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에서 천 년 동안 인간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커다란 웃음이 동굴 안에 울렸다. 사람들이 “지고하신 폐하의 뜻이 옳사옵니다.” 하고 말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미쳤…… 미쳤어.’

세실리아는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 * *

결행 날짜를 잡고, 우리는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준비를 시작했다.

나와 칼릭스는 아버지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한 뒤, 공작의 권한을 대행하여 가문의 기사단을 비롯한 사병을 동원했다.

이안도, 카미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엘리야는 일단 상황을 봐서 그 혼자 우리의 계획에 가담하기로 했다.

“만약에 상황이 좀 더 악화한다면, 마탑 차원에서의 개입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안이 잠시 아뜩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제국 황제가 대륙 공적이 된단 말이로군.”

“걱정 마세요. 그렇게 되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지.”

카미엘은 한쪽에서 이런 우리의 대화에 하나도 관심이 없다는 듯, 제 칼만 손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병을 동원하고 지휘하는 것도 냅다 부관에게 맡겨 버린 그는 정말로 한가해 보였다.

거사를 앞두고 혼자 탱자 탱자 하는 모습이 상당히 얄미웠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카미엘, 당신 진짜 정말 이래도 돼요?”

“나?”

카미엘은 내가 이름을 부르면 일단 눈웃음부터 치고 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준비하고 있잖아?”

“이게 당신 한 몸만 준비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난 원래부터 지휘관은 아니었거든.”

“?”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최전방에 배치되는 공성 병기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아.”

나는 대번에 그 말에 납득했다. 하긴, 카미엘이 대군을 지휘해서 승리로 이끄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잘 가질 않는다.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무조건 다 박살 내 놓는 게 저 남자한테 더 잘 어울리긴 해…….’

어쨌든, 그런 카미엘을 제외하고 우리는 나름대로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부디 결행일까지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인생사는 본디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하던가?

그날 저녁, 기어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그 전조 증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나였다.

‘……어?’

끼기기긱, 하고 녹슨 알루미늄 창문이 힘겹게 열리는 것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놀라 고개를 퍼뜩 들고 말았다. 카미엘이 가장 기민하게 반응했다.

“무슨 일이야?”

“지금…….”

나는 이런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있다.

“균열이 열리고 있는 것 같아요.”

“!”

내 말에 방 안에서 각기 자기 할 일에 몰두하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균열 말입니까?”

엘리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때…… 코랄 제도에서 레비아탄이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해 봐.”

카미엘이 차분하게 권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낱같은 느낌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 쪽인 것 같아?”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집중한 다음,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안이 신음을 냈다.

“황궁 방향이로군.”

“설마.”

칼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황제가 황궁에서 균열을 열고 있다는 말입니까?”

칼릭스는 내 말을 못 믿는다기보다 황제에게 완전히 질려 버렸다는 투였다.

“공공연하게 이런 짓을 벌여도 될 정도로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인 것 같군요.”

“대마법사의 생각에 나도 동의해.”

“어떻게 하죠?”

카미엘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휘익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는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게 당면한 현실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 어처구니없는 반란 조별 과제에서 원치 않게 조장을 떠맡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당장 거병(擧兵)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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