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솔레아 호수에서 돌연 나타났던 마물도 엘레니가 불러냈던 건 아니었을까?
‘그때 분명 엘리야가 솔레아 호수의 균열은 역방향으로 열렸다고 말했잖아.’
황제가 자기 뜻대로 마물을 불러낼 수 있다면, 이거 진짜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닐까……?
‘황제라.’
‘엘레니가 균열을 열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황제 쪽에도 보고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쪽에서 돌아온 답은,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게 다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균열을 자기 의지로 열 수 있는 마법사는 없었네. 게다가 엘레니, 그 아이는 마법사조차 아니지 않았는가?”
“하지만 폐하, 저희는 분명히……”
“우연히 마물이 나타났고, 그대들이 엘레니에게 속은 거겠지.”
황제는 이런 말로 딱 잘라 일축해 버렸고, 그 덕에 마법사 차원의 진상 규명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직후 황제가 ‘민심이 동요할 수 있다’며 함구령까지 내린 탓에, 이 일에 대해서 누구에게 언급할 수조차 없게 돼 버렸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조사를 명령했을 것이다. 마물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자신과 엘레니의 연관점이 밝혀지면 안 되니까, 그렇게 묵살해 버린 거겠지.’
하지만 황제의 결정이 우리에게 꼭 해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로잔헤이어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주 직계 혈족이 마물을 불러낸 사건이다.
이 사건이 공식화되어 조사를 받는다면, 아무리 로잔헤이어 공작가라 하더라도 엄청난 수군거림과 비방의 대상이 될 터였다. 어쩌면 백성이 우리를 대상으로 봉기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그런 조치를 취하신 게 아닐까요?”
칼릭스도 그렇게 말하면서 미심쩍은 눈치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카미엘, 이안과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모든 것을 좀 더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물론, 이런 방면에서 내게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땝니까?”
반쯤 무너진 이스트 윙 로비에서 인사를 건넨 내게 엘리야가 반쯤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경직한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하지만 오랜만인걸요.”
“…….”
엘리야가 말없이 내게 척척 다가왔다.
“엘리야?”
곧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마나의 흐름이 나를 한차례 쓱 훑었다.
엘리야는 몇 번이고, 그 마법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어설 무렵에서야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이상은 없군요.”
“공작가 소속 마법사도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엘리야는 팔짱을 낀 채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심호흡으로 눌러 참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마법적으로 ‘소실’되었다고 판단한 건 접니다.”
“어, 그런가요?”
“그 말은, 즉.”
엘리야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존재 소실 선고는 죽음보다 더한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처, 처음 듣네요.”
“쉽게 말해서 당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게 나라는 말입니다.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어…….”
나는 약간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죄송해요?”
“왜 당신이 죄송하다고 합니까!”
엘리야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깜짝 놀라 “쉿!” 하고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경! 조심해요! 저희 지금 통제 구역에 남몰래 들어와 있다고요.”
이 일대가 진정될 때까지 공사 시작은 2주 뒤로 미뤄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 이 집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했다.
내 주장에 엘리야가 코웃음을 쳤다.
“은신 마법은 오자마자 걸었습니다.”
“아.”
“어쨌든, 내 말은…….”
엘리야가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내게 미안할 일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미안해해야 한단 겁니다.”
“…….”
“얄팍한 지식, 아둔한 소견으로 당신을 찾을 시도조차 않고 소실 판정을 내린 이 멍청한 한낱 마법사를……”
“경은 멍청하지 않은데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이크.’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런 내 모습에 엘리야가 다시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다스렸다.
“어쨌든, 내가 부족한 판단으로 당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단 말입니다.”
“위로가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경이 아니었더라도 누구든 그런 판단을 내렸을걸요.”
엘리야가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 위로가 안 되긴 하는군요. 차라리 저를 한 대 쳐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안 그럴 거예요.”
나는 분명한 어조로 선언했다.
“그리고 경을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요.”
“…….”
“힘들었잖아요, 제 사망 선고를 내리느라고.”
엘리야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
그가 손으로 눈언저리를 가렸다. 나는 자존심이 억센 그를 위해 잠시 모른 척 기다려 주었다.
“……해야 할 일부터 하도록 하죠.”
“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엘리야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허공에 빛으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런.”
“뭐가 나왔어요?”
“예.”
엘리야가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곳의 균열의 흔적은 솔레아 호수의 흔적과 일치합니다. 아무래도 그 사건이나 이 사건이나 범인은 동일인인 것 같군요.”
“역시…….”
“그렇게 한가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냉정하게 말했다.
“엘레니 로잔헤이어가 당신의 진명을 알아내려고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다행히 경께서 마법을 걸어 주신 마나석이 있어서 살았지만요.”
“……?”
엘리야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네?”
무슨 소리냐니?
“전에 코랄 제도의 하이 마켓에서 경이 사 주신 마나석 말이에요.”
“그건 저도 기억납니다. 하지만 거기에 마법을 걸었다니?”
“네? 경이 해 주신 것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만 무슨 소린지 감도 안 잡힙니다.”
“네에? 하지만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쪽지에 사용법이 적혀 있었어요. 진명을 보호할 수 있는 마법을 걸어 두었다고 설명도 되어 있었고…….”
“내가 그런 일을 했다면 쪽지를 남기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 말을 했겠죠.”
“그럼 대체 그건……?”
“정확히 무슨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까?”
“그게…….”
나는 마나석에 걸려 있던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엘리야가 인상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새긴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경이 아니에요?”
“내가 이런 일로 농담을 할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일단 남은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죠. 마나석,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그게요.”
나는 곤란하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일회용이라서, 부서져 버렸는데요…….”
“……일회용이라.”
엘리야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가는 곳은 없습니까?”
“전혀요. 제 주변에 그런 마법을 걸어 줄 만한 마법사는 경뿐이에요.”
“어떤 놈이 대체 나보다 먼저…….”
엘리야가 뿌득, 이를 악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 바로 마탑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여기서 수집한 단서도 정리해야 하고…….”
“아, 네.”
“분명히 그 마나석, 일회용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저는 다회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네?”
“그까짓 정신 보호 마법, 저도 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야 그럴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진명을 아는 게 자신뿐이라고 했으니까. 굳이 누군가의 정신을 보호해서까지 지켜야 할 비밀이 있지는 않았을 거다.
“어떤 놈이 그런 발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좋아요. 나를 한발 앞서간 건 인정하도록 하죠.”
“경? 왜 그 말씀을 하면서 이를 가시는지……?”
“내 말 알아들었습니까?”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엘리야가 한숨을 쉬며 다시 설명했다.
“당신의 진명을 지켜 줄 그 마법, 이번에는 제가 걸어 주겠다는 겁니다. 좀 더 쓸모 있게 다회용으로.”
“아…….”
그 말을 이렇게까지 돌려 말할 수도 있는 거였어?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흥.”
엘리야가 코웃음을 쳤다.
“어느 놈이 만든 건진 몰라도, 제가 만든 게 좀 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아, 예…….”
아무래도 엘리야는 그 이름 모를 사람에게 한발 밀렸다는 생각에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럴 때 보면 꼭 애 같다니까.’
나는 속으로만 몰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파괴된 마나석 대신 엘리야가 새로 마법을 걸어 준다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엘리야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내 방에 들어와서, 내 물건에 그런 마법을 걸어 주고 떠난 걸까?’
……짚이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다.
* * *
“응, 그거 나 맞아.”
카미엘이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나는 반쯤 예상했으면서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시간에 딱 맞춰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겠어?”
“그건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불가해한 생물을 바라보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설마, 마법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