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내 실수야. 세실리아도 함께 황궁을 벗어났어야 하는 건데.”
“밖에서 손을 써 볼 방법은 없나요?”
“시도는 해 보겠지만…….”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두 분 다 에스테반 후작의 남동생을 아시죠?”
카미엘이 손을 들었다.
“난 모르는데.”
“그럼 지금부터 알아 두세요.”
“응.”
카미엘의 문의 사항을 대충 정리해 버리고, 나는 세드릭의 남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일을 대강 털어놓았다.
“그런 위험한……”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나는 불리한 화제를 재빨리 돌려 버리면서 주장했다.
“세실리아 전하, 대공 전하, 그리고 테오도어 에스테반의 공통점은 하나예요. 제가 이들과 접촉한 다음부터 ‘비틀린 마류’를 감지하지 시작했다는 거예요.”
“질문이 있는데, 테오도어 에스테반과 접촉은 어떻게 한 건가?”
“걷어차 줬어요.”
“아.”
카미엘의 문의 사항은 이번에도 쉽게 정리되었다.
이안이 중얼거렸다.
“비틀린 마류가 느껴지지만 정화는 불가능하다, 라…….”
“…….”
나는 흘긋 카미엘과 눈치를 주고받았다. 특별히 그만 정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일단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카미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애초에 마물의 왕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졌으니 비틀린 마류가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리고 에스테반 후작의 동생 말인데, 살해당한 게 아닐 가능성이 높아.”
“어떻게 알아요?”
“그릇이 되는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거든.”
탈락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굳이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이안이 머리를 싸쥐었다.
“대체 왜 부황은 용제 따위를…….”
“뻔하지 뭐.”
카미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제가 영생불사를 약속했거나, 뭐 그 비슷한 걸 준다고 했겠지.”
“영생불사라니…….”
“흔하지. 권력 있는 자들이 탐닉하는 마지막 염원이잖아.”
죽은 자의 부활이나 소통, 영생에 관한 주제는 항상 사교계에서 인기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아냐. 이유가 어찌 됐건 용제의 부활을 꾀한다는 시점에서 네 아버지는 제국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공적이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동의해.”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중얼거렸다.
“대륙 차원에서 토벌전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 선에서 정리하는 게 그나마 제국을 온존하는 길인가…….”
카미엘이 테이블을 굴러다니는 펜대를 가지고 빙글빙글 장난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
결론은 하나였다.
황제를 친다.
나는 흘긋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했던 사람처럼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언젠가 반역을 저질러야 내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예상하고 있었다면 얘기는 빠르겠군.”
하지만 야멸친 카미엘은 이안의 감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얼추 어느 정도 한 방향으로 의견이 모인 것 같자,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런데요.”
“응? 뭔데, 유리?”
“저 이제 그만 슬슬 집에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아.”
두 남자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 * *
로잔헤이어 저택의 마물 소동으로 인해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부활인 셈일까?’
“유리!”
“누님!”
수도에 있는 로잔헤이어 가문 소유의 세컨드 하우스에 도착해서, 내가 도착을 알리자마자 집 안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다행히 집사가 노련하게 자신의 놀람을 수습하고 아버지와 칼릭스를 불러왔지만, 그런다고 해서 소란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엘레니의 공격의 후유증이 남은 건지, 아버지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도 나를 껴안는 두 팔에는 힘이 있었다.
“네가, 네가 돌아오다니, 유리…… 나는 그럴 줄도 모르고 네 부고를 알렸는데…….”
“괜찮아요. 그럴 만한 일이었잖아요.”
마물의 저주와 마법이 충돌한 폭발에 휩쓸려 흩어지듯 사라졌다는데, 그 상황에서 내 생환을 예측한다는 게 오히려 더 미친 짓이었을 거다.
“……네 엄마에 이어 너까지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
나는 그 후로도 아버지의 품에 한동안 안겨 있어야 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그리고 내 무사를 확인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칼릭스가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아버지, 마법사를 불러 누님이 정상적인 상태인지 검사를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
“마법 폭풍에 휩쓸리는 전대미문의 사고를 겪으셨으니, 몸에 당장은 눈에 띄지 않는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아, 알았어. 진정해. 그렇게 할게.”
결국 공작가의 마법사와 주치의가 차례로 불려 와 나를 진단하고, ‘아무 이상 없음’이라는 소견을 내린 뒤에야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중간에 처음부터 안색이 안 좋았던 아버지가 숨을 크게 몰아쉬는 바람에 방으로 모셔다드린 후, 나는 칼릭스와 단둘이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상황을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건, 혹시…… 엘레니가 사용한 마법 탓인 거니?”
“……그렇습니다.”
엘레니가 사용한 정신계 마법이 몸 전체에 후유증을 많이 남기는 악술(惡術)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야 경에게 말해서 아버지를 한번 봐 달라고 해야…… 칼릭스?”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서 칼릭스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괘, 괜찮아?”
“누님마저 영원히 눈을 안 뜨시는 줄 알고, 저는…….”
칼릭스가 괴롭게 내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간신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엘레니.’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마물이 뻗은 촉수에 가슴을 관통당한 엘레니에게는 나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저는…….”
칼릭스는 도무지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엘레니마저 그렇게, 누님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은…… 정말, 정말로…….”
몰랐겠지.
나는 울음을 토하기 시작한 칼릭스의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며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위로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한 상황이었다.
나는 일단 손을 뻗어 칼릭스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 칼릭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하지는 않아도 돼.”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누님.”
칼릭스가 기어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 제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누님도, 엘레니도…….”
“그 애가 벌인 일도, 어머니께서 하신 짓도 네가 사과할 일은 아냐.”
나는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칼릭스의 말을 끊어 냈다.
칼릭스가 붙잡고 이마를 대고 있던 내 손에서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저희를 쉽게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네가 한 짓은 아무것도 없어.”
“저는 여태까지 누님을 오해했어요, 그리고……”
“엘레니를 막지 못한 건 네 잘못이 아냐. 그 애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나조차도.”
“…….”
칼릭스의 눈에 다시금 참담한 빛이 깃들었다.
‘엘레니.’
어쩌자고 이런 일까지 벌여 버린 걸까?
추모할 수조차 없는 방식으로 죽어 버려서, 자기를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남기고 떠난 어리석음에는 뭐라 할 말조차 찾기 힘들 정도였다.
“……괜찮아.”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일 수밖에.
“!”
“괜찮아, 칼릭스.”
나는 팔을 뻗어 칼릭스를 끌어안았다.
“나는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까 슬퍼해도 돼.”
“…….”
그 말을 듣자마자, 칼릭스가 내 옷을 부여잡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칼릭스를 토닥여 주었다.
* * *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엘레니가 불러낸 마물이 입힌 인명 피해는 엘레니 하나가 다였다.
마물이 균열 너머에서 완전히 현신하지 못한 덕분에, 집이 무너진 것도 한 달이면 복구가 가능할 거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몇 있긴 했지만, 그조차도 경상에 그쳤다고 했다.
“후우…….”
마치 거대한 파도가 일어 엘레니 하나만을 집어삼켜 버린 것처럼, 일은 일단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엘레니.’
공작가에서는 엘레니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러 버렸다.
시체를 수습하긴 해야 했으나, 대대적인 장례식은 당연히 치를 수 없었다. 엘레니가 저지른 죄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인명 피해가 없었고, 피해를 입은 게 우리 집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약소하게나마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거였다.
“아아, 엘레니, 내 딸……!”
엘레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새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칼릭스는 “엘레니가 벌인 일에 어머니께서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고 말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지만…….
“엘레니? 거기에 있니? ……아, 안 돼! 이쪽으로는 오지 마!”
아무것도 없는 방 한구석을 바라보며 덜덜 떨어 대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매일 밤 엘레니의 이름을 부르며 — 이상한 점은 엘레니를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엘레니를 피하려고 한다는 거였다 —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아버지는 결국 그녀를 한적한 시골 별장으로 내려보내기로 결정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야.’
엘레니는 대체 어떻게 균열을 열어 마물을 불러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