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182)

157화

“대체 언제부터였어요? 왜 말을 안 해 준 거예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따로 알려 줄 만한 의리는 없거든. 알잖아?”

“…….”

그 말에 나는 자동적으로 카미엘의 지독한 과거와, 그 과거의 원흉을 떠올리고 숙연해지고 말았다.

“괜찮아. 이제 난 유리, 네가 있으니까…….”

마치 어린아이가 너무 좋아! 를 외치듯이, 카미엘이 나를 꽉 죄어 안았다.

차마 아프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또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죠?”

“음…….”

카미엘이 제 목을 감싸 안은 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여러 가지?”

“자랑이다, 이 인간아!”

“아야.”

나도 모르게 그 얄미운 코를 꽉 꼬집어 주고 말았다. 그러자 카미엘이 아픈 시늉을 하며 징징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다. 나는 카미엘의 어깨를 찰싹 치며 말했다.

“칭얼거리지 말고 당장 아는 걸 다 불지 못해요?”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한술 더 떠서 카미엘은 나를 둥가둥가 어르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못 하는 사이에 이안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손수건을 꺼내 입가까지 멀끔하게 닦아 낸 뒤였다.

약간의 붉은 기를 제외하면 맞은 내색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게, 이안도 참 이안이다 싶었다.

“그만하고 여기 앉지 그래?”

“뭔데 끼어들어?”

“이안 말이 맞아요. 이제 그만 좀 앉아서 얘기해요, 우리.”

“쳇.”

카미엘이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한 투로 입술을 비죽이며 나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리고 제가 앉을 의자를 부득불 내 옆에 끌어와서 붙어 앉았다.

그러더니 이안을 향해 턱짓을 하면서 이러는 게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봐.”

이 인간이?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며 카미엘을 바라보았다. 이안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제일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건 그쪽인 것 같은데?”

“맞는 말도 지껄이는 사람에 따라서 참 다르게 느껴진단 말이야.”

“카미엘…….”

“으응, 알았어. 다 말해 줄게. 화내지 마.”

애교를 떨고 싶은 고양이가 그러는 것처럼, 내 쪽을 향해 머리를 부비는 카미엘을 차마 밀어낼 수 없었던 건, 그에게서 어린 카미엘의 간절하던 눈빛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안에게 정신계 마물이 깃들어 있었던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코랄 제도에서부터.”

다 말해 준다는 게 허언은 아니었는지, 카미엘이 냉큼 대답했다.

납득이 가는 증상이 있는지, 이안이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해 보라는 듯 이쪽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는 카미엘을 보며 약간 망설인 끝에 말을 골랐다.

“그래서 당신 목적은 대체 뭐예요?”

“글쎄…….”

카미엘의 특유의 눈웃음을 머금은 채 이안을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카시스 황가의 절멸 아닐까.”

“…….”

제국 황태자의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일까, 이거?

하지만 긴장한 건 나뿐이었다. 이안은 차분한 태도로 물까지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그걸 동의해?

깜짝 놀란 내 앞에서, 카미엘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눈썹을 으쓱할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대답할 놈이라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내가 네 비위를 맞추자고 생각을 바꿀 수는 없잖아.”

슬슬 이 남자 둘을 같은 자리에 앉혀 놓자는 발상 자체가 대단한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카미엘, 당신이 황가를 그…… 하려고 하는 건…….”

차마 당사자 앞에서 ‘절멸’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가 없어서 말을 흐렸는데, 카미엘은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맞아. 저쪽의 아버지께서 하신 일 때문이야.”

“네 말을 들으니…….”

이안이 복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부황이 선대 로엔 대공을 해코지한 게 확실한 모양이지.”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가 저지른 일은 그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걸 말할 수 있는 건 카미엘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카미엘이 그런 내 눈치를 읽었는지, “착해…….” 하고 약간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중얼거리며 내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마. 제국이 멸망해도 유리, 넌 내가 보호해 줄 거니까.”

“그것 참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요…….”

“으응.”

고맙다고 말한 것도 잠시, 다음 순간 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내 목에 코를 박는 카미엘을 찰싹, 내려치며 밀어내야만 했다.

“확 씨!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에게 혹사당한 목을 뒤늦게 감싸는 나를 보고, 카미엘이 또 너무 좋다며 치대려는 찰나.

“그만 좀 하지 그래.”

결국 보다 못한 이안이 쓴소리 한마디를 얹었다.

“이쪽은 실연당한 지 10분도 안 지났거든.”

“알고 하는 짓인데?”

와 이게 진짜…… 나는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당하는 게 내가 아닌데도 때려 주고 싶기는 처음이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깍지를 꼈다.

“애초에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모르나 본데 우리 사실 엄청 오래된 사이야.”

“제발, 카미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카미엘의 반듯한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날리고 말았다.

“제발, 도움 안 될 때는 그냥 좀 닥치고 있어요.”

“노력해 볼게.”

그제야 카미엘이 좀 대화를 하는 사람다운 자세를 갖추었다.

“아무튼.”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에이론 숙부의 일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최근에 느끼기로 부황에게서 느껴지는 건 그 이상으로……”

“그 이상이겠지, 당연히.”

카미엘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있는 거로군.”

“뭐, 네 아버지가 반쯤 미치광이라서 사람을 상대로 용의 피를 주입하는 실험을 하고 있단 이야기가 필요한가?”

“……뭐?”

이안의 손에서 컵이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카펫이 축축한 물로 빠르게 젖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듯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태자 전하.”

카미엘이 냉소적으로 비꼬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인간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정말이지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한쪽은 비꼬고 한쪽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해 울컥하고 결과적으로 난장판이 될 것 같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상대로 그 실험을 자행한 건, 카미엘.”

“…….”

“혹시…… 용제(龍帝)의 부활을 위해서인가요?”

“!”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런……!”

“맞아.”

카미엘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지만, 실제로 듣고 나니 더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제라니, 설마 200년 전에 용봉공이 봉인한 그 마물의 왕을 말하는 건가?”

“그래.”

“대체 왜 그 마물의 봉인을…… 아니, 이제 와서 봉인을 해제할 수 있기는 한 건가?”

“그걸 가능하게 하기 위한 열쇠로 내 아버지가 죽었어.”

카미엘이 담담히 말했다. 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에이론 숙부는 우리 시대에 엘리야 마라케시가 나타나기 전에 가장 위대한 마법사였어. 어떻게 그런 일이…….”

“네 아버지가 진명(眞名)을 쥐고 있었어.”

“……!”

“뭐, 그런 흔한 이야기야.”

카미엘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설명했다.

“위대한 마법사로 칭송받는 동생을 잠재적 위협으로 여긴 황제.”

“…….”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에게 정치적인 적으로서 견제당하고 있는 이안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충성의 증표로 진명을 바친 순진한 내 아버지.”

“…….”

“위대한 마법사의 피가 용제가 봉인당한 장소 위에 뿌려졌지. 그걸로 용제의 불완전한 사념이 이 땅에 깨어났고, 그때부터 용제의 부활을 위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거야.”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돌고 돌아서, 시발점인 그릇으로 돌아왔다.

“그 그릇이라는 게, 너를 상대로……?”

“다섯 살이었고, 여덟 살까지였어.”

“…….”

카미엘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때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것보다 생략하는 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기도 하는 법이었다.

“……하아.”

이안이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순식간에 까칠해진 그의 얼굴엔 언뜻 공포의 그림자마저 어려 있었다.

“그럼 우리 아버지께서 그 미친 짓을 지금도 자행하고 계신단 말인가?”

“내가 알기론 그래.”

카미엘은 유례없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인데, 그릇은 나 혼자가 아니야.”

“……!”

이안이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자세히 말해 줘. 그게 대체 무슨……?”

“용제의 사념을 깨운 열쇠가 황가의 피였기 때문에, 그릇이 될 자는 반드시 황가의 피를 진하게 이은 자여야만 해.”

“그 말은…….”

이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했다.

“세실리아…… 그 아이도, 설마?”

“나도 겪은 일을 그 애라고 피해 가진 않았겠지.”

이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참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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