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네?”
의식을 잃기 전만 해도 나는 대공저에 있었는데. 그럼 이안이 나를 옮긴 걸까?
‘카미엘이 거기에 동의했을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약간 조심스러운 심정이 되어 물었다.
“어 그럼…… 제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
이안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묘하게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이러지?’
나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카미엘은요? 카미엘은 괜찮은 거예요?”
“…….”
기분 탓일까? 한순간 이안의 눈빛이 서늘해진 것 같았다.
‘이건 진짜 좀 뭔가 이상한데.’
내가 뒤늦게 자각한 순간, 이안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유리.”
“네……?”
“왜냐면, 이제부터 당신은 제 보호하에 있을 거라서요.”
“제가 왜 이안의 보호하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안은 평소와 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상태는 결코 평소와 같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 이안의 관계창 한마디.’
“당신을 위한 새장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미친 걸까?”
카미엘이 나타나는 바람에 잊고 있었던 그 한마디가 뒤통수를 치듯 강렬하게 떠올랐다.
‘그게 이런 뜻이었어? 나를 감금하는 거?’
“저기, 이안……”
심상찮음을 느낀 내가 무어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안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의사와 마법사가 말하길 당신은 일종의 마법적인 탈진 상태라고 했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당신을 그렇게 무리하게 만든 거, 카미엘이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말을 잃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상태가 이상해.’
말이 통할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정정할 부분은 정정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아니요. 카미엘은 그저 무언가에 당해 마류가 흐트러졌을 뿐이에요. 탈진 상태가 될 때까지 정화력을 소모하기로 결정한 건 저고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카미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뻔……”
“유리.”
이안이 단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미엘은 위험해요.”
“…….”
“그 본인도 정상은 아니고, 그를 둘러싼 상황도 정상이 아니에요.”
“잠깐만요, 이안.”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이안이 카미엘을 그런 식으로 단정 짓는 것엔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어 내 말을 막고,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다간 당신마저 휘말리게 될 거예요, 유리. 그리고 난 그런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 싫어요.”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이안이 내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내 눈은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응?’
아까부터 이안의 얼굴에 묘하게 베일 같은 그늘이 드리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형상이 보다 분명하게 보였다.
엷은 먹구름 같은 게 이안의 머리 주변을 둘러싼 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기만 하는 현상이 아닌지, 그게 움직임을 시작하자 이안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잠깐만요, 이안.”
“아니.”
이안이 단호하게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들을 생각은 없어요. 이 이야기는 끝났어요.”
“아니요!”
그 말에 참고 있던 화가 울컥 올라와서, 나도 이안을 따라 자리에서 벌컥 일어섰다.
“이야기는 안 끝났어요. 그리고 당신 지금 이상해요, 이안.”
“나는……”
이안이 참을 수 없는 두통을 견디는 사람처럼 — 그러니까, 예전의 나처럼 —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빈틈!’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깐, 유리……!”
그리고 이안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정화력을 사용해 보았다.
경고! 에이드리언에게서 정신계 마물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정화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정신계 마물에게 당한 상태였던 거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정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키아아아악!
이안의 머리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검은 안개가 마치 악령처럼 들고 일어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윽…… 이게 대체, 무슨……!”
“안 돼! 조금만 참아요, 이안!”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 손을 뿌리치려는 이안에게 단단히 매달린 다음, 계속해서 정화력을 쏟아부었다.
키에에엑……!
마침내, 그의 머리를 점령했던 마물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윽……!”
그와 동시에 이안이 휘청, 하며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이안?”
“…….”
이안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깜빡였다.
기분 탓일까, 아까까지는 서늘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의 눈빛이 명료하고 깨끗해진 것 같았다.
이게 평소의 이안이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계 마물 퇴치에 성공합니다!
훌륭한 눈썰미를 발휘하여 마나가 50, 지력이 50,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정화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데 성공하여 정화력이 500 오릅니다.
상태 메시지를 채 확인하지도 못하고, 나는 이안부터 챙겼다.
“이안, 괜찮은 거죠?”
“유리…….”
이안이 꾹,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하아.”
그와 동시에 내 어깨에서도 긴장이 썰물처럼 쫙 빠져나갔다.
“다행, 다행이에요, 이안.”
이안이 정말로 진심으로 나를 가두려는 줄 알고 엄청 놀랐다.
“유리, 나는…….”
이안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아무래도 마물 때문에 저지른 짓임에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똑똑.”
입으로 내는 장난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앞에…….
“카미엘!”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카미엘이 서 있었다.
‘심상치가 않다.’
카미엘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거의 살기와 닮아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먼저 입을 열려고 했다.
“카미엘, 이건……”
“……아니요, 공녀.”
의외로 이안이 내 말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 받아 둘게요.”
실제로 겁을 먹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그쯤 해 두려 하는 걸 눈치챘는지, 카미엘이 완전히 열이 받아 반쯤 맛이 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꼴을 보아하니 공녀에게 한 대 얻어맞기는 그른 모양인데.”
“…….”
“그럼 나한테라도 한 대 맞는 걸로 하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부우웅, 카미엘의 주먹이 이안에게 쇄도했다.
퍼억!
‘아니, ‘퍼억’이 아니라 거의 ‘뻑’에 가까운 소리가 났는데!’
나는 와장창, 하며 집기들과 함께 거의 방 끝까지 날아간 이안을 경악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건 때린 사람 주먹도 걱정되는 수준인걸…….’
하지만 카미엘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는지, 성큼 걸음을 옮겨 방 끝까지 날아간 이안에게 다가가려 했다.
‘어라?’
근데 순간적으로 카미엘의 눈빛이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보였다.
“카미엘!”
“!”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카미엘의 허리에 덥석 매달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의 당연한 수순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나는 다음 메시지가 떠오르기도 전에, 카미엘을 향해 정화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25327
10327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생각보다 꽤 많이 늘어난 정화력 총량에도 놀랐지만, 한 번에 훅 빨려 들어가는 정화력의 양이 장난이 아니라서 더 놀랐다.
“아앗.”
너무 놀란 나머지 스텝이 꼬여 균형을 잃으려는 나를, 카미엘이 “이런.” 하며 단단한 팔로 받쳐 안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카미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붉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잘못 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미엘이 히쭉 웃었다.
‘어라?’
그 웃음에 방금 내 행동이 상당히 오해받기 좋은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유리, 그렇게까지 나한테 안기고 싶어 할 줄은.”
“아, 아니거든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장에 부정했지만 카미엘은 능글맞게 웃으며 날 안아 올리곤, 내 뺨에 자기 뺨을 부빌 뿐이었다.
“카미엘……!”
맞아서 처박혀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이야!
“그래, 그래. 많이 불안했지?”
“…….”
그 말에 카미엘을 밀어내려던 몸짓을 나도 모르게 뚝 멈추고 말았다.
“내가 좀 더 빨리 찾으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저 자식 아빠가 되지도 않는 개수작을 부려 가지고…….”
“…….”
아니었다고, 나는 괜찮으니까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사이에 이안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입가가 찢어진 듯 묻어난 피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말이다.
카미엘이 웃는 얼굴로 스산하게 말했다.
“아주 부자가 쌍으로 지랄을 해. 그렇지?”
“……부정할 여지가 없군그래.”
“잘도 입을 놀리기도 해. 이런 상황에서.”
카미엘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투로 쯧, 혀를 찼다.
“그게 없어진 걸 보니 유리에게 정화라도 받았나 보지?”
“!”
그 말에 카미엘의 목을 껴안고 있던 내가 더 화들짝 놀랐다.
“카미엘, 당신 설마 알고 있었어요?”
“쟤가 정신계 마물에 홀린 거? 응.”
“아니 대체…….”
너무 쉽게 떨어진 긍정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말았다.